나는 과거 장영희 교수님이 살아 있을 시기에 가끔씩 이 분이 신문과 잡지에 쓴 글을 읽기도 했고, 어쩌다가 이 분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고 어렴풋이 이 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장영희 교수님은 마지막 몇 년 동안 많이 아프셨고,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병마와 싸우면서 이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신문과 방송에서 장영희 교수님께서 결국 사망하셨다는 소식을 접하였지만 남의 이야기인 양 가볍게 흘려듣고 지나갔다. 이렇게 장영희 교수님은 나에게는 언론을 통하여 알게 된 많은 인사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 나에게 딸이 "아빠! 장영희 교수님 알지? 그분이 쓴 에세이 읽었어? 한 번 읽어봐. 감동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그분이 워낙 유명해서 나도 신문을 통해서 좀 아는 것이지, 그분 책은 못 읽었어."라고 말하면서 딸이 주는 장영희 작가님의 에세이 2권을 받아 들었다. 지금은 내 딸도 어느덧 어른이 되었는데, 나와 딸은 서로 책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책을 추천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내 딸이 오래전에 읽었다는 장영희 교수님이 쓴 에세이 2권 '내 생애 단 한 번'과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내 손에 들어오자마자 연거푸 읽었다. 책의 분량이 좀 적어서 2번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영희 교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겪었던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내 마음속에는 속상함과 서글픔이 이어졌고 나도 모르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장영희 작가님이 쓴 위 2권의 에세이집에는 장애인으로서 한평생 살아가야만 했던 한 지식인의 삶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60년대~1990년대의 답답했던 시기에, 그녀의 부모님도 자식이 겪는 아픔 속에서 힘겹고 눈물겨운 시간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분 가족이 겪어야만 했던 억울하고 괴로운심정을우리들이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시절에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학생은 대학에서 입학을허락하지 않았던어리석은 구석기 같은 상황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장영희 작가님과 그녀의 부모님은 이런 한심한 행태를이겨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했다.
다행히 이 분의 아버지인 장왕록 서울대 영문과 교수님이여러 대학을 찾아다니며 장애인 자식에게 입학시험을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모두 거절당하자, 서강대 영문과 학과장인 외국인 신부님에게 찾아가서 부탁하였고, 이 외국인 학과장님은 매우 당연하듯이 허락하여 그녀는 가까스로 서강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처럼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벅찬 암흑의 시기가 있었다.물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사방은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험준한 여건이다.
원래 장영희 교수님이 쓴 책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이 분이 신문과 잡지사에 틈틈이 기고한 글들을 나중에 모아서 에세이집으로 책을 발행하였고, 이렇게 출판된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분은 살아 계신 동안 점차국내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이 분이 쓴 여러 권의 에세이 속에는 그녀가 맞닥뜨린 험난한 환경과 그 안에서 홀로 외롭게 힘들어했던 연약하고 선한 한 분이 자기의 심정을 차분하게 토로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분도 마음속에서는, 남들에게 더 많이 인정도 받고 싶었고 이성과 열렬하게 사랑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스스로 꺾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갔다. 이런 속 마음을 내보이는 내용들이 그녀가 쓴 에세이의 행간에서 자주 보인다.
나는 장영희 교수님에 대하여 글을 쓰려고, 이 분의 저서들을 더 탐독하기 위하여 자료를 찾다가 너무 깜짝 놀랐다. 이 분이 살아생전에 쓴 책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다시금 존경스러운 마음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도이 분은 꿋꿋하게 열정적으로 많은 문학작품을 쓰다가 가셨다. 특히 영문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열심히 임했으며, 영어교과서를 집필했고 꾸준히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글쓰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원래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한 장애인 교수님이 겪었던 우리나라의 엄혹한 상황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려는 의도였는데, 이분이 쓴 책을 추적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쓴 여러 문학 작품에깊이 빠져들어야만 했다.
장영희 작가님은 특히 영시의 번역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서 '축복' 등의 여러 번역 시집 책을 출판하였고, '펄벅'과 '벌리 도허티'의 작품을 번역하였으며, '안네 프랑크'에 관한 책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특히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다른 에세이와 다르게 문학 작품을 간략히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의 성격도 지닌 좀 색다른 책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녀가 겪었던 설움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녀의 책에서 알 수 있었던 몇 가지 가슴 아픈 내용을 열거한다면, "그녀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힘겹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던 시절의 속상했던 이야기, 장애인에게는 대학 입학시험조차 허락하지 않던 그 암울한 시절 아버지의 노력으로 대학에 힘겹게 겨우 입학한 이야기, 국내의 대학원에서는 장애인이라서 도저히 받아주지 않아 부득이 석사와 박사 과정은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미국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거의 끝내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미국 생활을 정리하던 중에 친구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 사이에 도둑이 이분의 주차된 차의 뒷 트렁크를 열고 실려 있던 짐 꾸러미를 몽땅 훔쳐 달아났고, 그 속에 있었던 전동 타자기로 정리한 '박사 학위 논문'도 통째로 같이 도둑맞았다. 그녀는 이 충격에 닷새 동안 거의 초주검인 상태로 누워 지내다가 기운을 내어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힘겨운 살림 속에서도 1년 더 미국에서 공부하여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무사히 끝냈던 이야기(그 당시에는 PC컴퓨터가 일상화 안 되었던 시기였다), 여동생과 같이 간 국내의 한 백화점 옷 매장에서 목발을 짚은 그녀를 본 점원으로부터 '돈을 구걸하는 거지 취급'을 받으면서 동생과 같이 당황했던이야기" 등 억울하고 힘들었던 경험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괴로웠던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무척화가 난 심정이었는데, 이런 충격적인 행위를 당하는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장영희 교수님이 쓴 에세이 중에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많은 내용 중에서 한 가지를 아래에 원문 그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이 분과 이 분의 가족은 아래와 같은 서러움을 이겨내면서 살아왔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엄청난 문학작품을 만들어냈다. 장영희 작가님은 실로 대단한 분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 브루닉 신부님은 나의 대학 스승님이다. 아니, 단지 스승님을 넘어 내 삶의 은인이시다. 신부님이 안 계셨으면 나는 아예 대학에 다니지도 못했을지 모르니까.
아직 우리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의식이 전혀 없던 19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아니, 아이로니컬 하게도) 내 학교 성적은 좋았고, 나는 대학에 꼭 가고 싶었다. 내가 고3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시면서 입학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구걸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 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했다.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신부님은 너무나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은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라고......
이렇게 험난하게 살아온 장영희 교수님도 박진식 시인에 비하면, 아마도 자기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기에 자식을 자기와 똑같은 영문과 교수로 만들기 위하여 열심히 지원한 도움이 있었고 여기에 그녀의 어머니도 처절할 정도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힘들었지만 무사히 잘 이겨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박진식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장애의 정도에 따라서, 장애인이 처한 가정환경에 따라서 그들의 삶에서도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박진식 시인의 시를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점은, 이와 같은 캄캄한 어둠과도 같은 장애를 지닌 분들이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박진식 시인은 어릴 때부터 평생 그의 몸은 석회화가 진행되어 돌덩어리처럼 굳어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조차 쓸 수 없었다. 그가 쓴 책은 그가 입에 볼펜을 물고 마치 수를 놓듯 한 자 한 자씩 컴퓨터에 타이핑해서 쓴 유서 같은 시집이다.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어머니는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자식을 돌보며 살았고, 공사 현장에서 노동을 하시던 이버지도 새참인 우유를 안 먹고 품에 넣었다가 퇴근 후에 자식에게가져다주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인의 부모님은 자식을 위하여 눈물겹도록 최선을 다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서박진식 시인이 쓴 대부분의 시는 워낙 슬픔이 묻어나고 안타까워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도록 저미어 온다. 아래의 '소망'과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2개의 시는 내 가슴을 가장 심하게 울리던 박진식 시인의 시다.시인은 이토록 숨 쉬기조차 벅찬 삶에서도 귀한 시집 여러 권을 출판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 박진식 시인의 힘겨운 노력에 대하여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