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관찰한 내 의견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by 장코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는 시점에 언론에서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국의 토마스 핀천과 중국의 찬쉐 등이 같이 경쟁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보도 내용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못 받았는지 의아스럽다는 반응이다. 사실상 매년 언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보도를 접하고 언젠가 그의 작품에 대한 나의 의견을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위의 작가 중에서 찬쉐 작가의 작품은 읽을 기회가 없었지만, 토마스 핀천은 내가 흠모하는 뛰어난 작가이다.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서 오랜 시간 인기가 많다는 사실에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동아시아의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하여 작품 대부분을 읽었으며 몇 개는 2번 이상 탐독했고, 그 이후에 하루키에 관한 평론을 해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은 감성적인 섬세함이 대단한 작품이다. 독자들은 이것 때문에 아직도 머릿속에 내용의 잔상이 남아있다고한다. 하루키의 어떤 작품을 읽더라도 독자의 뇌리에는 '노르웨이의 숲'이 떠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럴 정도로 자연스럽고 세련된 흐름이 이어지는 이다. '상실의 시대'는 단순히 남녀 간 사랑을 묘사한 것만 아니고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젊은 남녀의 시각에서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오묘한 감성적인 내면의 이야기펼쳐진 작품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감정적인 몰입을 못한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정서적으로 혹은 감성적으로 메마른 사람일 수 있다. '상실의 시대'는 그런 면에서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과 성장 과정을 그린 탄탄한 구성의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는 10대와 20대 30대를 같이 보내던 젊은 남녀들이 사랑하다가, 상대의 자살 충격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피폐를 겪게 되었지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고 둘은 서로 깊이 사랑했지만 끝내 그 연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여자는 자살로 삶의 끈을 놓았다. 하지만 남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서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치유의 희망도 던져주는 글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젊은이들이 공감하는 계기도 만들었고, 이 소설 안에서 공명하는 감성이 살아 숨 쉬는 결과도 가져왔다. 우리가 잘 만날 수 없는 감성적으로 뛰어난 전개를 지니고 있어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젊은 남녀 간의 감정과 정서와 슬픔과 죽음과 사랑이 여러 극단적인 전개 속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런 소설은 문학 역사상 보기 드물다. 이런 이유로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키며 아류작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기도 했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남녀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사랑과 슬픔의 감정이 다시금 떠올라서 스산한 마음을 느꼈다. '상실의 시대'를 접하고 문학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독자들은 그의 작품 몇 구절에도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으니 이 지역에서는 그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아마추어 작가들은 그의 책 안에서 찾아낸 마음에 드는 글을 자기의 작품 속에 집어넣기 바쁘다.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군조 신인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인 문학상을 받을만한 작품이다. 첫 작품부터 하루키 특유의 '노르웨이의 숲'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는 이런 류의 작품을 쓰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10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이 발표되었고, 하루키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한다. 내 생각에는 '노르웨이의 숲'은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확대 버전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당연히 나중에 쓴 '노르웨이의 숲'이 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하루키의 문제가 그 이후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의 소설 대부분은 '노르웨이의 숲'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의 걸작품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하루키 필생의 역작이라는 '1Q84'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의 느낌을 도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들은 절대로 같아서는 안 되는 성향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여전히 '상실의 시대'를 못 놓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를 버리지 못한 채 대부분 소설에서 그 영향력을 이어보려는 의도적인 시도가 전개되고 있다고 보인다. 나의 냉정한 판단으로는, 그는 '상실의 시대'를 끝으로 오히려 작품 실력이 하락하고 있다고 보이며, 그 이후부터 인기를 부여잡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었던 행위는 작품 외적인 하루키 작가 개인 마케팅에 더 집중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일상과 작품 속을 넘나들면서 작가를 알리는 것에 유독 신경 쓰는 하루키 습성을 추적하면서, 하루키는 문학사에서 실력은 부족한데 충성 고객 덕분에 책이 비교적 잘 팔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작가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들이 있다. 작품은 정말 형편없는데 TV 채널 여기저기 나와서 소설가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만약 방송 섭외 책임자가 그의 책 단 한 권이라도 정독해서 읽었다면 과연 그를 선택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에 일대 큰 충격을 가한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사건으로 많은 고민을 거듭하였고 결국 이에 관한 작품을 쓰기로 결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Q84'이다. 이 책이 나온 순간부터 혹독하고 뜨거운 비평이 국내외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비평가들의 의견처럼 이 책은 깊이가 없는 매우 가벼운 전개와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버무려진 소설이다. 작가로서 진정으로 고민을 한 흔적은 있지만,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허술한 면이 많다. 또한 여기서도 '상실의 시대'의 정서가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다. 하루키는 일본 문학계에서 찬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에게 일본 국내 문학상은 받을 수 없는 난공불락 같은 영역이다. 그래서 하루키도 자기를 무시하는 일본 문학계를 대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의 여러 책에서는 이런 의중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1Q84의 책 내용 속에서도 비록 설정이지만, 일본 출판계와 문학상에 관한 부정적 감정을 이야기 속에서 표출하고 있다. 이런 방식 통해서 그를 무시하는 일본 출판계와 문학상의 내부를 폄하려는 생각이 다분히 엿보인다. 그의 이런 의도를 여러 작품을 섭렵하고 나서 비로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책을 찾는 독자가 많기에,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하다. 물론 작품 속에는 확실하게 독자들이 좋아하는 몇 가지 유형의 정서와 내용들이 항상 들어 있다. 그는 이 방식에 심취해서 을 쓰고 있고 독자들이 이런 글을 부지런히 퍼다 나르는 것을 알기에, 자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욕구에 집착하며 계속해서 집필 중이다.


내가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처음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읽고 나서 역시 하루키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1Q84'를 읽었는데 나는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작품이 하루키가 쓴 최고의 소설이라고?"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1Q84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과연 다른 작품들은 어떠한지 알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키는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하여, '자기 작품은 좀 난해하다는 설명'으로 화살을 피해나가고 있지만, 그의 글은 전혀 난해하지 않고 철저한 준비 없는 상태에서 고뇌도 없이 써 내려간 인상을 받는다.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 기사 단장 죽이기, 양을 쫒는 모험, 어둠의 저편' 등의 책들을 연이어 읽어나가면서 그는 계속해서 '상실의 시대'의 흐름을 가져가고 있고, 심지어 많이 팔린 '1Q84'의 성향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하루키가 한국의 작가였다면, 아마도 그는 작품을 신문사의 연재소설에 넣으려고 앞다투어 모시려는 최고 인기 작가의 반열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를 신문사는 절대로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작품의 상당수는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이렇게 쓴 거지?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라는 여러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작품을 비평한 일본 평론가들의 평론을 찾아내어 읽었는데, 일부 평론가도 한결 같이 내가 느낀 그대로 그들도 나 같은 의견을 지닌 채 평론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왜 하루키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지 더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에세이들을 세밀하게 읽기 시작하였다. 내가 읽은 에세이 중에서 '먼 북소리'는 대학생 기행문 정도의 수준이라서 읽는 과정에서 실망감에 계속 읽어나가기가 괴로웠고, 그나마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정도가 비교적 읽을만한 작품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독자들에게 자신이 마라톤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자랑하는 여러 내용을 써 내려간 그의 습성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평이하고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간 이 에세이는 비교적 읽을만한 작품이다. 다음에 읽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만나고 나서, 하루키가 이토록 이해 안 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이유를 이 책 속에서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에세이는 하루키 작가 자신이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는데, 자신감에 넘친 자세로 대중에게 자신의 작가 생활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글 실력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에서, 또한 일본 출판계와 평론가를 비판하려는 속마음을 가지고 쓴 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하루키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문학계를 간접적으로 무시하는 내용도 일부 나온다. 즉 이 책은 출간 목적에 관한 순수성을 의심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심오한 마음의 준비 없이 글을 쓰는 작가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에세이임을 알 수 있었고, 하루키가 왜 지금까지 미진한 글을 썼는지 그 이유를 여러 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출판사의 편집인이라면 이 책은 절대로 발간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가로막았을 것이다. 잘못된 방식으로 책을 쓰는 자기 고백을 한 대표적인 '에세이'라서 작가에게는 극도로 불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스스로 그런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거나 글을 쓰는 전문가라면 이 문제는 곧바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하루키 자신도 당연히 이 정도쯤은 인지할 수 있어야만 했는데, 자신감이 충만했는지 자기의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자세가 부족했고 아내 역시 부족했다. 이 책은 인기 있는 한 유명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는 방법과 습관 등에 관한 일종의 자기 고백인데, 여기에 올린 내용을 보면 작가로서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일부 심각한 행태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아내조차도 이런 책의 발간을 제지할만한 판단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하루키의 출판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외부 편집인의 조언을 무시하면, 바로 이 같은 어이없는 우를 범한다. 내가 앞에서 거론한 '해럴드 블룸'평론가와 한국의 '한강' 작가는 물론이고, 여러 위대한 작가들도 편집인 출신이 많다. 편집인은 대부분 글 실력이 뛰어나며 대체로 객관적인 자세로 작가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낮은 자세로 편집인의 의견을 겸허하게 경청해야만 자기 작품에 대하여 올바르고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있다. 하루키는 여러 가지 이유로 편집인과 의견 대립을 가지면서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아내의 조언으로만 책을 마무리하는 습성을 가진 작가라고 이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 편집인이 조언하는 퇴고에 관한 내용을, 자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더구나 퇴고를 겨우 6~7번만 했으며, 마지막에 아내의 의견으로만 마무리하고 출판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에서 우려스러운 하루키 작품의 출판 과정 알 수 있었으며, 이런 과정이 문제라는 것을 하루키 자신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가 작품을 쓰면서 벌어진 행태이다. 이 책에서 특히 마지막 퇴고 시점에서조차 편집인의 조언을 되도록 안 받아들인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상황인가? 그가 퇴고를 20번 혹은 30번 이상 거듭하기 싫다면, 최소한 객관적인 의견을 지닌 편집인의 조언을 낮은 자세로 경청해야만 옳은 일이다. 그런데 그는 퇴고마저 적게 하고 편집인의 조언도 아예 안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아내의 의견을 끝으로 책을 끝낸다고 설명한다. 사실 이 설명은 다분히 자기 자신의 글 실력을 자만하는 의도를 비친 것이지만, 나는 그의 소설 흐름과 내용의 전개가 왜 그토록 의아스러웠는지, 이 에세이 책을 읽고 상당 부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덧붙여 얘기하면 그의 소설 중에서 '해변의 카프카' 등은 말도 안 되는 읽고 싶지 않은 수준이고, 여러 다른 소설도 대체로 이 정도의 수준이다. "그의 책에서 읽을만한 책은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아주 가벼운 중편 작품과 '노르웨이의 숲',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등 3 작품뿐이다." 그가 지닌 넘치는 자신감이 오히려 자기 작품에 관한 객관적인 시각을 저버린 결과를 가져온 상황이다. 그는 항상 자기를 찾는 단골 독자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기 의도대로만 작품을 써도 책이 잘 팔린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일본 평론계를 인정 안 하는 성향을 지닌 작가이다. 물론 반대로 일본 평론계도 그를 대체로 인정 안 한다. 이것이 그가 처한 일본 문학계의 상황이고 현실이다. 그는 편집인이 권하는 의견을 안 받아들이는 출판을 강행하면서, 스스로 자기 작품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믿는 작가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싶다. 위대한 프랑스의 '플로베르가 쓴 보바리 부인 작품'은 6년 이상 매일 같이 강도 높은 자세로 자료를 찾고 정리하면서, 퇴고를 수십 번 거듭하고 밤낮으로 고민에 휩싸인 불안과 초조의 뒤안길에서 탄생했다. 진정한 최고 천재인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쓰기 위하여 전쟁이 일어난 현장을 7 차례 이상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꼼꼼히 수집하고 끊임없이 실수를 바로 잡으면서 확인 작업을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끝없이 고뇌하고 연구하다가 나온 내용들을 암기하였는데, 글을 쓸 수도 없는 감옥 속에서 이렇게 절절하게 암기한 내용을 감옥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쓴 책이 바로 '죄와 벌'이다. 헤밍웨이는 오직 책을 쓰려는 목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직접 자발적으로 뛰어 들어가서 군인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고 병원 침대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죽음 직전까지 경험하면서 그 실전 바탕으로 글을 쓴 작가이다. 허먼 멜빌은 자기의 귀중한 목숨을 매일 같이 바다의 공포스러운 거대한 파도가 무섭게 흔들어 대는 현장에 던져 놓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버텨야만 하는 원시적인 뱃사람으로 험악한 대양 한가운데서 모비딕을 구상했고 써 내려간 처절한 작가이다. 반면에 여러 에세이에서 밝히는 바대로 하루키는 글을 쓸 때면, 아내와 유럽의 고즈넉한 지역에 한동안 기거하면서 여유 있게 즐기고 여행도 하면서 소설을 썼다. 문학 천재도 아닌 그가 뼈를 깎는 고뇌의 시간도 없이 또한 괴로움에 떠는 마음 가짐도 없이 얼마나 가치 있는 글이 나올 수 있을까? 더구나 편집인의 조언은 끝내 인정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과연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그가 좀 더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로 작품에 임했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세계 문학계에서는'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 제럴드'를 대단한 작가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피츠 제럴드는 전형적으로 미국인이 좋아하는 작가이며, 미국인의 정서와 성향에 해당하는 소설가이다. 하루키는 평생에 걸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대한 개츠비'작품을 내내 칭찬하고 열렬한 팬으로 자처한다. 그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하루키는 그의 소설 속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많이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내 견해로는 '위대한 개츠비'는 좋은 작품이지만 반면에 비교적 가벼운 유형의 소설이다. 즉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의 한 시대를 세밀히 묘사한 잘 쓰인 작품이지만, 하루키가 부단히 칭찬할 정도로 뛰어난 소설은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허리우드 영화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며, 안나카레니나와 보바리 부인과 같은 세계적인 걸작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경향의 소설에 끌리는 작가라는 것은 그가 쓰고 싶은 작품 세계를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옛 선인들이 우선 고전을 읽는 것에 집중하라는 조언에 대하여 나는 정말 올바른 의견이라는 사실을 하루키의 작품을 읽으면서 더 느꼈다. 고전에서도 간혹 미진한 작품이 있는데, 끝없이 쏟아지는 현대 작품을 대하다 보면 도저히 읽기 힘들 정도의 수준 낮은 소설들이 너무 많다. 그의 작품 수준이 다소 낮아서. 아니 그보다는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그의 글 작업 방식을 보면서. 나는 혹시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곤 한다. 노벨문학상이 냉정한 잣대로 평가받는다면 다소 실망을 준 결정도 있었기에 내가 우려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일 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하루키는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안 놓치려고 발버둥 치는 대중 소설가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고뇌하는 작가가 아니라 단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에 노벨문학상이 그를 찾는다면, 이 상의 가치는 더 떨어질 수도 있다.


하루키는 대중소설가로서 미국인의 취향들 글 사이에 끼워 넣는 독특하고 이해하기 힘든 습관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과 유럽의 영향을 받은 '팝송과 클래식 음악과 와인, 위스키와 칵테일, 메이저리그 야구와 서양 음식' 등을 항상 소설 속에 일부러 넣는다. 한국인과 일본인과 일부 중국인에게는 근대화를 기점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넘어온 이런 것들을 글 문맥에 넣으면 독자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더 구체적으로, 국내 가요보다는 언제나 팝음악이 흐르거나 팝송과 팝 가수에 관하여 자세히 말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글이 많고, 우아해 보이게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서 이에 관한 설명도 동반하는 구절이 많고, 우리가 자주 먹는 땅콩이나 아몬드보다 피스타치오를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우리에게 친숙한 축구 경기보다 미국 스타일의 메이저리그 야구와 간혹 일본 프로 야구를 얘기하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독자들이 안에서도 이 같은 미국 문화에 환호할 것이라고 확신도 했지만, 하루키 자신도 매력 있고 젊은 이미지의 작가라는 것을, 이런 구절을 자주 나열하면서 독자에게 은연중에 알리려는 의도에서도 이런 글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글의 내용에 진지하게 집중하지 않고 인기 있는 연예인처럼 작품 속에서 일부러 작가 자신을 독자에게 어필하려는 이런 글 습관이 하루키의 큰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작가의 의도를 지켜보자면, 그는 문학가인 동시에 인기로 먹고사는 탤런트 같은 이미지를 지닌 게 사실이다. 그 결과 이런 내용이 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생뚱맞게 많이 들어가는 게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불필요한 구절이 불쑥 나올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거나 결국 단락 전체가 가벼워져서 실망스러운 적이 많았다. 이 같은 미국인 취향(유럽인 취향도 있음)은 그가 영문 번역을 하면서 미국을 좋아한 이유도 있을 테지만, 소설을 쓰기 전 20대부터 술집을 운영하면서 접하게 된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루키는 칵테일 바 종류의 술집을 운영하면서 위스키와 칵테일 등 술의 전문가가 되었고, 매일 가게 영업을 할 때마다 가게 안에 깔리는 팝송과 클래식 음악을 선별하던 일상이 이에 관해서 알게 되었고, 술과 같이 나오는 안주 등을 준비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들을 작품 안에 삽입한 것이다. 저녁부터 가게 장사를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까지 일하다가 아침 무렵에 퇴근하여 낮에는 잠을 자는 날도 있었지만, 일본 프로야구 구경을 가던 습관이 그를 일본과 미국의 프로야구에 빠지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체험을 줄거리 안에 어떻게든 사용하려는 의욕이 지나쳐서, 작가 자신의 일상과 매력을 독자에게 글 안에서라도 전달하고 싶은 그의 마음만 들킨 결과를 가져왔고 끝내는 하루키의 단점으로 굳어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책을 대할 때마다 항상 들어가는 하루키의 최대 무기인 남녀 간의 성적 묘사, 소설을 가볍게 만드는 위와 같은 습성은 하루키 작품이 대중 소설로 안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이 그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같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브런치 스토리를 읽는 분도 하루키의 책들을 다시 정독하면서 내가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여러 문제를 자세히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처럼 하루키는 삶의 철학과 역사의 고뇌와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가혹한 실상과 권력자의 준동에 대한 분노 등에는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그의 독자들도 대부분 관심이 없으니까."


나는 한강 작가의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가 '한강'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한 내용을 여기에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나는 한 때 고고한 원칙을 내려놓고,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대중 소설로 방향을 틀어서 글을 잠시 쓰기도 했지만, 내 딸 한강의 작품에서는 단 한 줄도 의미 없는 글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신문에서 읽은 내 기억을 더듬어서 내 방식대로 쓴 글이지만, 바로 이 의미를 하루키에게 전하고 싶다. 한 때의 인기도 중요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고통과 역사적 사명과 외로운 철학적 사고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본분도 있다. 나는 '한강 작가'가 인기도 없고 잘 팔리지 않는 자기의 작품을 외롭게 써 내려가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괴로워야 했는지,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슬픈 감정이 뒤섞이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강'이 처절하게 써 내려간 '인간의 고뇌와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통곡'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자 '니체'는 사람들이 대중을 위한 저급하고 품위 없는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질책한다. 즉 글은 독자만을 염두에 두고 쓸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충분한 사색도 진지함도 영혼도 없는 글을 쓰지 말고 스스로 사상가가 되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와는 반대로 펜과 잉크와 책상, 즉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정만으로 글을 쓰려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쓴 부류의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의 통로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나는 하루키와 그를 숭배하는 초보 작가들에게, 그리고 무심코 그의 작품을 애독하는 독자들에게 '철학자 니체'의 이 조언을 꼭 들려주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부 작품에 대하여 사랑하는 독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작품 성향과 방식에 관하여 내 나름의 의견을 열거했다. 물론 작가 자신이거나 혹은 그를 좋아하는 작가, 독자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는 전 세계 문학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작가이며, 그의 소설 작품들을 냉철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평론가로 데뷔하지도 않은 내가, 그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 느낀 바를 '나만의 시각으로 평론'한 내용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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