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나는 이제 잘 살고 싶지 않다

by 뚱냥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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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지음

열림원



나는 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놓지 않는 것들로 살아가고 싶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안에 오래 머물렀으나 끝내 문장이 되지 못했던 감각들이 비로소 언어를 얻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웠다. 우리는 대개 ‘잘 산다’는 말을 남의 입에서 먼저 배운다. 더 안정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더 인정받으며 사는 삶,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잘 산다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익숙한 통념을 이 책의 인터뷰를 통해서 틀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아니라, 끝내 어떻게 존재했느냐는 것이라고. 책을 덮었을 때 내 가슴에 가장 크게 메아리친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책은 구절구절 필사를 하고 싶은 만큼 좋았던 구절이 많았지만, 내가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은 탕자의 비유에 관한 저자의 성찰이 담긴 인터뷰 장면이었다. 저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나선 목자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밀어붙인다. 왜 우리는 늘 남아 있는 아흔아홉만 헤아리고, 사라진 하나가 품었을 낯선 세계와 공포와 굶주림은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말한다. 목장 안의 안전한 풀만 뜯고 살던 아흔아홉보다, 길을 잃고 바깥의 세계와 대면한 한 마리가 어쩌면 더 치열하게 존재한 것일 수 있다고. 탕자는 단지 비뚤어진 자식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로 살겠다고 집을 나간 존재였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따라붙는 문장들은 내게 하나의 심문처럼 다가왔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나는 그 질문들 앞에서 오래 멈추었다. 독자로서가 아니라, 대답해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살아왔다는 것과 존재했다는 것이 서로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아프게 알아들었다. 무사히 버텨낸 시간과 나답게 통과한 시간은 같지 않았다. 남들이 괜찮다고 말하는 삶과 내가 끝내 놓지 못하는 삶도 같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나는 자꾸 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퇴근해 현관문을 열면 수많은 고양이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나는 먼저 전체를 보지 않는다. 본능처럼 빠르게 스캔하고, 보이지 않는 한 마리를 찾는다. 다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하나를 먼저 찾는다. 그 아이를 찾고 나서야 모두에게 밥을 준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은 많이 거느리는 감정이 아니라, 사라진 하나를 알아채는 시선이라는 것을.


저자가 말한 존재의 감각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미 내 삶 속에서 오래 반복되고 있었고, 나는 다만 그것을 말로 붙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 책은 좋은 책들이 대개 그러하듯 삶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도망칠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너는 존재했는가. 너답게 존재했는가. 너만의 이야기로 살아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삶은 더 이상 성취나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이고, 시선의 문제이며, 끝내 무엇을 놓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다.


나는 이제 잘 살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놓지 않는, 놓을 수 없는 것들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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