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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논리학

우린 이미 논리학을 알고 있다

by 김단

'논리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복잡한 기호로 가득 찬 노트

혹은 쓸데없는 말장난.


어느 쪽이든,

논리학은 어렵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처음 논리학 강의를 들으면서

뭔가 특별한 것을 배우게 될 줄 알았다.

뭔가 대단한 지식 같은 걸 말이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논리학은 체계화된 도구에 불과했다.


논리학의 목적은

언어를 일관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속뜻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대단한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논리학은 언어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수단이다.


결국 논리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일상 속에 녹아 있는 논리학의 흔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필요하다'와 '충분하다'

고등학교 시절 비문학 공부를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필요조건충분조건.


이 둘은 논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뚫기 힘든 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두 가지를 밥 먹듯 쓴다.


예를 들어보자.

한적한 점심시간, 책을 읽다 졸고 있는 내게 옆에 있던 친구가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와"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난 커피를 마셔도 잠이 오더라"라고 답했다.

대화를 분석하기 위해 말의 의도를 파악해 보자.

친구는 나에게 커피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커피를 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커피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즉, 나는 친구의 말을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여기서 나의 의도를 친구가 납득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의 말속에는

‘잠을 깨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커피’

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나는

‘커피가 잠을 깨기 위한 조건이 아님’

을 말하면 된다.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직설적으로

“커피를 마셔도 잠은 깨지 않아”

라고 말해도 되지만 그건 싸우자는 말처럼 들린다.


대신 조금 완곡하게 말할 수 있다.

대상을 자신으로 한정하고, 본인은 커피를 마셔도 잠이 깨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어느 쪽이든 ‘잠을 깨기 위해 커피가 필요하지 않다' 는 뜻을 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조금 고상하게 바꿔 적으면,

'커피가 잠을 깨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가 된다.


그럼 조금 더 나아가서, 내가 "찬물만 마셔도 괜찮아" 라고 덧붙였다고 하자.


이건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까?


만일 “찬물만 마셔도 충분해”라고 말했더라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대답은

“잠을 깨는 데 커피는 필요하지 않고, 찬물만으로도 충분해”

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녹여 대화를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직관에서 무언가로 충분하다면 다른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오컴의 면도날 혹은 단순성의 원리라고 한다.


한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양치를 하기 위해서는 칫솔이 필요하지만 치약도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위의 대화에서 ‘나’가 한 말은 단순성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논리학은 이렇게 일상 언어를 분석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자주 쓰이는 사고의 틀을 개념화한다.


단순성의 원리는 누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사고의 방향이다. 논리학은 그런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 것뿐이다.



삼단논법

우리가 필요하다충분하다를 알고 있기에 그것을 응용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연인과 음식집에 가서 파스타를 주문했다.
파스타가 만족스러웠는지, 남자친구가 그릇을 싹 비웠다. 그리곤 말했다.
“이 식당 음식 잘하네.”

맥락상 남자친구가 말한 ‘음식'은 파스타일 것이다. 우리는 저렇게만 말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어떻게 파스타를 ‘음식’이라고 칭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질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대부분은 “파스타가 음식이잖아”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파스타'와 '음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이렇게 설명하면,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음식이 무엇인지, 파스타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래 두 가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1. 파스타는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먹는 물질이다.

2.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먹는 물질은 음식이다.


그리고 두 가지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스타는 음식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런 과정을 논리학에서는 삼단논법이라고 한다.


우리가 “파스타는 음식이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쳐서 이미 하나의 당연한 명제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시로, “연필은 필기구야”라는 말도 이런 과정을 거쳐 굳어진 ‘당연한 명제’이다.



사이비 종교 퇴치법


뭔가 좀 알 것 같은데, 너무 당연한 것들이어서 어디에 써먹을지 궁금할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필자가 흥미로운 주제를 하나 준비했다.


지금까지 한 것들을 토대로, 길거리에서 다가오는 사이비 종교인들에 맞서는 방법을 알아보자.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에서 펼치는 주장을 보면 "절대자(혹은 교주)를 믿지 않으면 불행하다(혹은 지옥 간다)"라는 식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내재적 두려움을 자극하여 불안을 유발하는 전략인 듯하다.

만약 그들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면 그대로 믿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나요?”


그들의 논리는 ‘믿지 않으면 불행하다’이지 ‘믿으면 행복하다’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물을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던 용어로 말한다면,


믿음이 행복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임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행복한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불행한 사람은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쉽게 말하면, 믿어도 지옥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의 질문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믿지 않을 구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할까?


아쉽게도 한마디를 더 섞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 편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다음 편에서는 흔히 범할 수 있는 논리 오류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간단한 몇 가지만 알고 유튜브 댓글을 봐도 꽤나 흥미진진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럼, 우린 다음 편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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