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몽

정체성의 혼란

by 김단

씁쓸하면서도 시큼한 자몽.

어릴적 오렌지와 헷갈려 집어 먹었다가 그 쓴맛에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알아보니 자몽도 그 나름의 씁쓸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은 ‘자몽’이라는 단어가 외래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필자도 얼마전 훈민정음 게임을 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다.


나무위키에 ‘자몽’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그 유래가 일본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볼 수 있다.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원산지 국가인 포르투갈에서 포멜로라는 과일을 ‘잠보아’라고 불렀는데, 자몽을 수입하던 일본이 그걸 ‘잠봉’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자연스럽게 ‘자몽’이라는 단어로 전해졌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자몽은 포멜로라는 다른 과일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일인 것이다. 원래 명칭은 ‘그레이프푸르트’. 그러나 그의 진짜 이름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남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그 과일보다 더 유명하다. 사람들은 포멜로는 모르지만 자몽은 안다.


그도 참 혼란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나 자몽 아니에요”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국립국어원이 나서 원래 이름을 찾아주려 애쓰던 때도 있었다. ‘자몽’이 아닌 ‘그레이프푸르트’를 사전에 등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레이프푸르트는 자몽과 함께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간 존재처럼.


남의 이름을 빌려 유명해진 삶.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그 이름.


그는 지금도 가판대 위에서 홀로 외친다.


“I’m grapefruit!!”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