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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식주의의 맹점

by 평사원철학자

오늘날 지식을 얻는 방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 책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생각은 이미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TV, 인터넷, 잡지 등 여러 매체들은 20~30년 전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설명하며, 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로지 책만을 고집하는 기성세대의 지식관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관심 있는 분야를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유튜브 같은 플랫폼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실제 경험자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한 간접경험은 뇌에 착각을 일으킬 만큼 강렬한 희열과 피로감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집에서도 유튜브 하나만으로도 지식 습득의 완성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완성도와 방대함에 있어 인간은 결국 컴퓨터에게 주도권을 내어줄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글이나 챗GPT와 같은 AI 기반 검색 플랫폼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지식 전달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식의 완성도란 무엇이며, 그것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야고보서 1장 25절

성경은 지식을 실천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라 말합니다. 기독교의 핵심 원리는 형식적인 교회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 불리는 ‘성도’들의 삶과 행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지식을 머리로만 외우고 있다면, 신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 즉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결국 지식은 개개인의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자 지침일 뿐입니다.


“학문에 대해서라면 아마도 내가 남보다 못하지 않겠지만, 군자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 『논어』, 술이편 제7, 제32장

공자는 논어에서 학문에 대해 자신이 남보다 뒤처지지는 않지만,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다며 겸손을 보입니다. 논어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군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논어의 내용을 자랑하기 위한 지식으로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공자의 집필 의도와는 정반대의 행위일 것입니다. 지식은 결국 개개인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성경이든 논어든, 지식은 단지 머리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세상의 지식 속에서 개개인의 삶이 방향 없이 떠돌게 된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식의 완성도는 외부 기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자기 기질과 삶의 방향성을 얼마나 잘 살려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완성의 과정과 결과는 결코 타인과 비교될 수 없는 고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세상에 보다 선한 지식이 축적되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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