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어머니'를 만나다

가장 개인적인 저널리즘 (1) 인터뷰

by 제리

김천 모암초등학교에 다니는 8살 혜경이는 학교가 끝나면 마음이 급해진다. 바삐 집에 가서 수북이 쌓인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청소부터 요리까지 못 하는 게 없는 막내가 가게를 보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진다. 집으로 달려가 세숫대야에 빨랫감과 비눗물을 가득 넣고 푹푹 밟다 보면 그만한 상쾌함이 없다. 집안일이 한 더미씩 쌓여도, 엄마와 함께 잠에 들지 못해도, 하루하루가 마냥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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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것 같아요. 천성이랄까?”

조혜경(53) 씨는 자랑스레 말한다.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에는 부모님보다 그녀를 더 많이 돌봐줬던 고모들도 한 몫 했다. “고모들이 다 선생님이고 에너지가 많으니까 제 성장에는 좋은 자극이나 도움을 많이 줬어요. 엄마는 가게 보면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 드리라고 고모가 선물 챙겨준 적도 있어요.” 긍정적이고 태평한 그의 됨됨이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제가 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어서 (자녀 교육에) 인성 부분을 굉장히 신경 썼다기보다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살아왔으니까 그런 걸 실천하면서 아이들한테도 그냥 심어줬던 것 같아요.” 이야기의 초점이 아이들로 옮겨가자 그의 머릿속에는 스무 해 넘는 지난 시간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인가요?” 그걸 알아챘을 리 없는 기자의 뭉툭하고 성마른 질문에 그의 눈이 그믐달처럼 가늘어지며 붉게 물들었다. “지금 눈물 나는 타임이 아닌데, 여러 가지 감정이 올라와서… 아이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랄까.” 조 씨는 호탕하게 웃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시작이었는지, 본인이 ‘왕따를 당하는 것 같다'라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 게 시발점이 돼서 6학년 때는 틱도 나오고. 본인은 굉장히 열심히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주질 않는다는 것 때문에 되게 많이 속상해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안타까웠죠. 친구 관계나 잘 안 풀리는 것들을 저랑도 계속 의논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속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고등학교 때는 문제가 점점 해결되며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되게 뿌듯했어요.”


조 씨는 아이들을 대할 때 가장 투명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냐는 물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 되죠. 그걸 일로써 이뤄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사자(로 끝나는) 직업이나 돈 많이 버는 일이, (본인이 아니라) 주변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아서 ‘본인한테는 그게 즐거움일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해요.”라고 답했다. 어떤 질문을 받을 때보다도 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빛은 마치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는 듯했다. 그 속에는 누구도 곡해할 수 없는 한 ‘엄마’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모든 순간 씩씩했던 그에게도 2013년 여름은 한없이 무거운 시간이었다. 느지막이, 예상치 못하게 만난 셋째가 배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하나뿐인 언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는 입덧이 최고조였던 첫째 때보다 증상이 심했다. “먹을 수가 없으니까 길을 걷는데 너무 기운이 없는 거예요. 주변을 보니까 앞에 할머니도 걷는데 나처럼 기운 없어 보이더라고요. ‘아, 저분도 나처럼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어요.” 조 씨는 “그런데 또 내가 힘들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안쓰러워하면서도 이건 병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엔 사라질 거라고 말하니까, 위안이 되는 게 아니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싶었죠)”라고 이어갔다. 당시 마흔두 살이었던 조 씨에게는 입덧으로 고생하던 기간이 아이를 떠나보낸 후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다. “셋째를 보내기는 했지만 ‘내가 품기에는 너무 힘들었나’하는 생각도 들어요.”


호적상 이름은 ‘조동순’이지만 집에서는 ‘조은경’으로 불린 그의 언니는 똑똑하고, 자상했다. 이질적인 두 이름은 제각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밖에서는 동생에게 ‘동순이 동생’이라는 칭호 하나로 자랑스러운 후광을 가져다줬고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 돼 울음을 터트릴 때면 엄마 같은 ‘은경이 언니’가 달려와 해결해 줬다. 고등학생 때 조울증이 발병하고부터는 동생이 언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좀 힘들었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약도 계속 먹고.” 언니가 결혼하며 김천에서 대구로 분가한 후에 조울증 약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조 씨는 유산한 몸으로 언니의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그때는 진짜 힘들었는데 자꾸 나를 위로했던 게, ‘그냥은 너무 이겨내기 힘드니까 언니가 (하늘나라로) 가서 편안한 삶을 좀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여기 있는 동안 너무 힘드니까 언니가 더 편한 삶을 선택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위로했어요. 안 그러면 힘들어서.”

조 씨는 20대로 돌아간다면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독문과를 졸업한 그는 마지막 학기를 앞둔 여름,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중부유럽 2주 패키지를 계획했지만, 떠나는 비행기를 미루고 독일에서 2주를 더 보냈다. 독일에 사는 고모 부부네 집, 친구들의 기숙사를 전전하며 새로운 독일 문화를 접했다. “공부도 되고 자신감도 생기니까 너무 신세계였어요.” 해외여행 붐이 일던 1994년, 여행 가이드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여행의 맛을 알게 된 그는 여행 가이드를 준비했다. 교육을 받고 나서 가이드를 몇 차례 맡아 고되지만 행복하게 일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독일에서 공부해 보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집안은 넉넉지 못했지만, 독일에 사는 고모의 도움을 받아서 가는 ‘일종의 유학’이었다. 수속을 밟으며 고모는 조카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뚜렷한 목표 없이 독일에 오는 걸 알고 반대했다. 조 씨의 어머니까지 동조하며 독일행은 무산됐다. “’그때 그 공부를 했으면 또 어떤 나의 새로운 길이 생기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들긴 해요.”

한국에 덩그러니 남겨진 졸업생 조 씨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청소년 센터에서 10년, 초등학교 코디네이터로 4년, 초등학교 돌봄 교실에서 10년, 엄마이자 아내로 24년을 살아온 그는 어디든지 잘 정착해 자신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조 씨의 큰 눈동자에는 감정이 유달리 투명하게 비쳤다. 50분 남짓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자랑스러움이 몇 번이고 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눈물이 고였다가도, 모래에 스며드는 물처럼 기쁨 속에 잠겨 들었다. 그의 눈은 어떤 감정이든 전심을 다해서 내려앉았다가 또 다른 감정으로 옮겨갔다. 그가 살아온 방식을 보여주는 듯했다.


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