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희라와 정보석이라는 이름만으로 예약을 했다. 마침 절친 부부와 일본 여행 중이었다. 절친의 노력 끝에 겨우 2자리를 찾아 예약을 하며 무슨 복권 당첨이라도 된 듯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여독이 겨우 풀렸던 토요일. 절친과 둘이 공연장을 찾았다. 뜨거운 오곡 라떼 한잔을 시켜 마시며 토요일 오후 한가함을 즐기며 입장했다. 관객들을 둘러보니 다양한 나이 층.
자리에 앉아 프로그램을 펼쳐봤다. 미국 극작계의 거장 A.R. GURNEY의 원작. 1988년에 초연 이후 탐 행크스, 멜 깁슨, 브룩 쉴즈, 시고니 위버 등 할리우드 대표 배우들이 출연하였던 작품. 브로드웨이뿐 만 아니라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적으로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드라마 데스크상 4회. 루실 로테상 2회, 퓰리처상에 2회 노미네이트 되었던 작품.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가장 완벽한 무대를 선사한다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미 희곡의 명작.
연출가, 김민정. 여성으로서, 연출가로서 늘 고민한다는 어느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고, 공연 철학이 확실한 연출가의 섬세하고 감정이 최대한 표현될 작품을 만나겠구나 기대가 되었다. 빛을 좋아한다는 연출가. 대본의 토씨 하나도 점검하고 또 하는 완벽 주의자이기도 하고 무대도 삼각형이나 십자 모양을 쓰는 등의 실험적인 무대를 올리기도 하지만, 연극무대는 모든 장식을 뺀, 가장 담백한 무대에서, 배우의 연기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연극을 연출한다.
이야기는 앤디(정보석 분)가 8살 때 멜리사(하희라 분)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고, 감사하다는 답장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후 50여 년 동안 333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알고 마음을 확인했던 친구이자 애인이자 심리적인 연인이었던 관계.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50년 동안 각자의 삶과 그들 사이의 희망과 야망, 꿈과 사랑, 실망들을 전하는 메모, 편지, 카드를 주고받는다.
“나는 어딘가 구석에 앉아 글을 쓸 때 살아 있다고 느껴”라는 앤디.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종이에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라고 소리치는 멜리사.
모범생이었던 앤디에 비해 자유분방했던 멜리사는 그의 진정한 사랑을 곡해하게 되고 둘의 길은 자꾸 엇갈려만 간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앤디와 멜리사의 관계. 절묘한 타이밍과 전쟁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긴다. 앤디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멜리사는 먼저 결혼을 해 버린다. 그러나 멜리사의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고, 이혼했고, 양육권도 빼앗긴 채 술에 의존하여 피폐해 간다. 한편 앤디는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으로도 명성을 얻어 성공한다. 잠시, 앤디가 멜리사를 다시 만나 불륜의 관계가 되는가 싶었지만 앤디는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버림받은 멜리사는 더 피폐해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멜리사는 연극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디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오열하며 쏟아낸다. 멜리사의 토해 내는 듯한 대사를 들으며 나도 같이 울었다. 옆자리에서도, 앞자리에서도, 숨 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들 지난 사랑의 상처가 없을까?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아픈 상처는 누군가 건들면 또 덧난다. 나도 또 다른 관객들도 하희라의 연기에 몰입해서 충분한 감정 이입이 되었겠지
심플한 무대에서 두 배우가 끌어 가는 90분. 단 일초도 시선을 흩트리지 않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작품. 두 배우의 탄탄한 연기력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의 표현들은 정말 압권이었다. 더하여 배우들의 대사 위에 함께 했던 배경음악. 장면들에 맞추어, 배우의 움직임에 맞추어, 노래의 반주처럼 이어졌던 피아노 연주. 배우의 감정 선을 고스란히 나타냈던 선율. 무대의 한쪽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그 연주자에게 기립 박수를 보낸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옅은 어둠이 내렸고 라일락 향기 가득하다. 조명을 받은 고운 실루엣의 봄 잎새들.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옛 기억들이 서서히 다가온다. 침전되어 있던 첫사랑의 추억. 아픔이 되어 가슴으로 올라온다. 부유하는 아픔의 추억들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오버랩되며 흐르는 눈물. 애써 참지 않는다. 오래 흐른다. 옆에 앉은 절친도 아무런 말이 없다. 절친을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고, 애써 다독인다. 이럴 땐 알싸한 위스키 한 모금 넘기며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꿈에서라도 한번 만나 묻어둔 이 아픔 풀어놓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