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길에서 미술을 보다.

프롤로그

by Euri Sim

프롤로그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떠난 1년의 어학연수는, 뜻밖에도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캐나다의 따뜻하고 건조한 햇살, 물결처럼 번지던 바람, 웅대한 록키산맥과 에메랄드빛 호수의 고요 속에서 나는 유년의 속도를 잃고 대신 천천히 사는 법을 배웠다. 잠깐 머물다 돌아올 줄만 알았던 1년은 어느새 10년이 되었고,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문득 어머니의 시원한 김장 김치를 떠올리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한국은 기억 속 풍경과 달라져 있었다. 거리는 더 반짝였고, 공기는 한층 더 조급했다. 그럼에도 나를 감싸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국어의 따스함은 오랜 타국 생활로 굳어 있던 마음을 단숨에 풀어주었다. 안도의 시간 속에 살던 어느 날,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버지의 병은 생각보다 깊었다. 병원과 집, 시간과 시간 사이를 오가던 차갑고 시린 계절 속에서 나는 삶이 얼마나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자꾸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게 되었다. 회색 빌딩 사이의 낯선 조형물들, 오래된 담벼락의 벽화, 계절의 빛을 머금은 공원의 조각상들. 그것들은 마치 조용히 말을 건네듯, 내 마음 어딘가에 색을 남겼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다시 걷고 싶어졌다. 기억과 현재, 일상과 예술이 스며 있는 도시의 결을 따라 한 걸음씩. 도시의 소음 속에서 발걸음을 멈출 때마다 깨닫는다. 예술은 거대한 미술관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길 위의 공기와 녹슨 철의 흔적, 그리고 남겨진 기억 속에서도 자란다는 것을. 캐나다의 햇살이 나를 천천히 살게 했다면, 서울의 금속빛 조각들은 내게 ‘계속 걸어가라’고 속삭인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숨결과 어머니의 손맛, 그리고 나 자신의 시간을 하나로 잇는다. 파편처럼 흩어진 시간들이 예술로 봉합될 때, 도시는,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삼성역 7번 출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삶과 예술 사이의 그 ‘미세한 간격’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