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길에서 미술을 보다.

삼성동, 발걸음의 시작

by Euri 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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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로 이어지는 길목

아버지의 서대문 적십자병원 입원 덕분(?) 종로와 광화문 일대를 걷는 일이 잦아졌다.
차 안에서는 신호와 앞차에 쫓기느라 놓치던 풍경들이, 이제는 발밑에서 또렷하게 펼쳐진다.

광화문 흥국생명 본사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은 한겨울 산타클로스 모자를 눌러쓴 채 묵묵히 망치질을 이어가고, 김세중의 〈충무공 이순신상〉 앞 광장에서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주말마다 시위가 계속된다.
청계광장 초입,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 주변에 겨울 축제 구조물들이 뒤섞여 서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던 어느 날, 2003년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조영남의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가 문득 떠올랐다.
서울 한복판이 다시 한 번 미술관으로 변하던 순간이었다.


삼성동, 발걸음의 시작


한가한 주말, 발길은 자연스럽게 예전 집으로 향했다.
서른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작은 빌라는, 어른이 된 눈에는 예전보다 훨씬 초라해 보였다. 사춘기의 무거운 가방 끈을 메고 학교를 피해 걸었던 그 길, 삼성역 7번 출구까지의 한 블록을 다시 밟아보고 싶어졌다. 삼성역 7번 출구로 이어지는 길은 공사로 시끄럽고, 부산하지만 놀라울 만큼 그때 그대로다.

두툼한 네이비 모직 교복 자켓이 어깨를 짓누르던 고1의 봄, 학교 가기가 싫어 지하철을 타지 않고 마냥 걸었던 그 블록.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포스코 빌딩 앞에 불쑥 솟아 있던 거대한 철제 조형물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비행기 잔해인가 봐. KAL기 잔해인가?”(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해역 상공에서 폭파된 사건)

아버지는 담담히 대답했다.
“미술 작품이래.”

그 짧은 문장이 세상을 뒤집어놓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수백 점의 고철 덩어리가 모여 형상화된 그 조형물은, 설치 당시 ‘흉물’이라는 비난과 함께 철거 위기에 처했지만 지금은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프랭크 스텔라(1936~2024)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추상화가이자 조각가로, 미니멀리즘에서 출발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초기 ‘블랙 페인팅’ 연작에서 평면성과 단순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그는, 1960년대부터 사각 캔버스를 벗어나 사다리꼴·오각형·육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캔버스를 실험했다. 대학 시절, 한가람미술관에서 그의 입체적 사각형 캔버스 작품을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볼록거울처럼 중앙이 부풀어 오른 화면 앞에서, 도대체 어떻게 캔버스를 저렇게 입체적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섰고,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작품 만지시면 안 됩니다!”라는 경비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함께 있던 남자친구는 “대체 어떤 무지한 사람이 작품을 만지려 하나 하고 돌아봤는데, 키 큰 네가 머뭇거리며 물러서더라”고 웃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작품은 아마도 스텔라가 “회화가 더 이상 평면일 필요는 없다”고 선언하던 전환기, Polish Village Series(1970–73) 계열의 작업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사각형 회화지만 내부 구조는 나무와 캔버스를 여러 겹 쌓아 만든 부조처럼 중앙이 앞으로 밀려 나와 있어, 정면에서는 평평해 보이지만 옆으로 비켜 서면 화면 전체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그날의 나는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은근히 정당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면 위에 머물던 회화가 건축과 조각 사이 어딘가로 돌출되던 과감한 실험을 지나, 스텔라는 곧 금속과 알루미늄 같은 산업 재료로 대형 입체 작품을 제작하며 자신의 세계를 본격적인 3차원으로 확장해 나갔다.
포스코 앞 〈아마벨〉이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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