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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뽑기

시가 있는 풍경-4

by 봄비


모 주변 사방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물여뀌,

모보다 더 높이 자라

모를 덮치고 쓰러져

햇빛을 보지 못한 모는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모 하나라도 햇빛에 보일 수 있도록

피를 뽑고 또 뽑는다.

어깨와 팔의 힘줄이 늘어날 지경이지만

모를 살리기 위해

쓰러진 물여뀌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논둑에 던진다.


수천 개의 하얀 뿌리가

흙까지 끌어당겨 더 무거워진

물여뀌 무리들을 논둑으로 던지느라

팔뚝이 불끈거린다.

얼굴이 후끈거리고,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해가 저물면 결국 무릎까지 꿇고

피를 뽑는다.

마지막 힘을 다해 피 뭉텅이를 뽑아

논둑 너머로 던진다.


허리와 골반이 시큰거리고,

손가락 마디는 얼얼한데

풀 먹으라고 논에 넣은 우렁이들은

야속하게도 짝짓기 하느라 바쁘고,

어스름 여름 저녁은

바람 한 점 없이 끈적거리기만 하다.


팔과 다리를 물어대는 모기와 쇠파리,

고개를 숙일 때마다 펄럭이는 윗옷에서

훅 끼치는 쉰내,

논장화가 푹푹 빠져 발을 옮기는 것마저 힘든,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던 날들


백혈구가 부족해 헌혈을 할 수 없었는데

논에서 원 없이 피 뽑기를 한다.

﹡피:풀,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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