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남원
나는 1989년, 지리산과 섬진강을 바라보는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때의 남원은 지금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이고, 시장의 냄새가 살아 있고,
밤이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삶이 환하게 들리던 그런 도시였다.
인구 10만이 넘는다고,
나름은 도시라고들 했다.
그러나 사람은 흘러나가고, 땅은 그대로 남아
이제는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고장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남원은 독자적으로 국회의원을 뽑았다.
몇 해 지나 서울로 대학을 가 있는 사이
남원은 순창과 손을 잡더니
또 어느덧 임실까지 더해 선거구를 채웠다.
나는 그 변화를 멀리서 보며
고향이 이렇게 작아지는구나, 실감했다.
내가 고등학교시절 배우던 한국지리 교과서에는
지리산을 대표하는 도시로 남원이 소개 되었다.
옛날의 남원은
지금보다 훨씬 큰 이름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춘향제가 열리고
지방 축제라는 말조차 귀하던 시절엔
그 한 축제만으로도
남원은 한 해를 밝히는 고장 같았다.
지금은 신생 축제인 김천의 김밥 축제에도 밀린다니
세월이란 게 이렇게 뒤척이는구나 싶다.
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원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대대손손 그 땅의 바람을 마시며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모두 남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예전에는 떠나는 사람이 드물었고
시골이라고 해도
사람 사는 일의 자리가 곳곳에 있었다.
친가는 10남매, 외가는 6남매였다.
친가의 여섯은 아직도 남원에 남아 살았고
외가 식구들은 엄마를 빼고 거의 서울로 갔다.
그 시절, 나는 시골이 싫었다.
남원 시내 한복판에 살았지만
조금만 나가면 읍과 면의 적막이 논과 강 사이로 흘렀다.
드넓은 논이 사철 같은 얼굴로 나를 따라와
어쩐지 갑갑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부모님까지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남원을 잊은 채,
벌써 십 년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 그 시절이 자꾸 마음을 건드린다.
고향이 그리운 게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고
남원이 싫었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어느 날 문득
그때의 냄새와 햇빛이 떠오르면
고향이라는 이름이 따라온다.
그러니, 아마도
나는 고향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그 시절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참, 그립다.
그때의 나와, 그때의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