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영리한 전략
태국 치앙마이에 정착한 첫 주, 간단한 간식과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들른 동네 슈퍼에서, 낯선 풍경과 마주했다. 입구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꽃미남 커플 등신대.
아이돌 멤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다정한 포즈였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맥도널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이어졌다. 매장에서 반복 재생되던 홍보 영상 속 또 다른 미남 커플, 치킨을 먹으며 주고받는 눈빛이 너무 멜로다.
집에 돌아와 무심코 튼 지상파 채널에서는 남남 커플의 로맨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것도 황금 시간대에.
‘와우~, 태국 쿨하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기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누구이기에 태국의 방송과 광고에 이처럼 자주 등장할까?
이들은 태국에서 하나의 대중 장르로 자리 잡은 ‘BL(Boy’s Love)’ 콘텐츠 주인공들이다. 이 콘텐츠의 핵심은 ‘CP(Couple) 마케팅’이다. 드라마 속 커플이 현실에서도 연인처럼 활동하며 팬들의 판타지를 24시간 관리한다.
이 콘텐츠의 타깃은 뜻밖에도 여성들이다. 현실의 남녀 관계에서는 신체적 차이와 사회적 불균형이 작용한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이 제거된 BL 로맨스는 쾌적하다. 성별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수평적 서사. 그 속에서 누리는 '무중력 상태의 평온함'이야말로 여성들이 BL을 소비하는 이유다.
강력한 구매력을 가진 2040 여성 팬덤의 행보는 단순한 시청을 넘어 소비로 이어진다. 스타가 광고하는 제품을 완판 시키고 고가의 굿즈를 수집하며 시장의 체급을 키웠다. 팬들의 압도적인 소비력은 곧 자본의 논리로 이어졌고, 태국 BL 스타들은 이제 로컬 스타를 넘어 샤넬, 프라다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앰버서더 자리를 꿰차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들을 보며
“에구, 부모님이 속상하시겠다.”
라는 지극히 유교 문화권 부모다운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팬덤이 기대하는 관계를 24시간 연기를 해야 하는 아들을 보는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이들의 부모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아들의 비즈니스를 돕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태국 중산층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출연료가 아닌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이다. 아들이 확보한 영향력에 가문의 자본을 더해 사업 영토를 확장하려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다. 결국 아들의 활동은 정서적인 소모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자본을 높이는 '가족 합작 프로젝트'인 셈이다.
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한국이 꽉 잡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서 'BL'이라는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태국 BL 드라마가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드라마 속 커플의 해외 팬미팅 티켓이 고가에 거래될 만큼 폭발적인 팬덤이 형성된 것이다.
이에 태국 정부는 BL 콘텐츠를 국가 소프트파워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소수의 취향으로 여겨지던 서브컬처가 국가의 경제에 톡톡히 기여하는 산업으로 탈바꿈한 순간이다.
태국의 문화 산업은 오랜 시간 축적된 사회적 관용과 철저한 실용주의가 빚어낸 가장 현대적이고 화려한 결과물이다. 태국은 자신들의 유연한 문화를 자본으로 바꾸는 법을 깨달았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이 설령 낯선 파격일지라도 기꺼이 수용하고 상품화하는 태국의 유연함은 때로 무서울 정도로 영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