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토요일에 여유가 생겨 모 영어 시험감독을 지원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빵을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쉬는 날 약간의 수고비를 번다는 기쁨과 학교 업무에서 벗어난 교무실의 고요함이 겹쳐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그 때문일까?
나의 심박변이 수치는 53으로 내 기준에서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시험지를 준비해 교실로 들어갔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나눠주고 듣기평가가 시작되었다.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한마디를 후 자리에 앉아 감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치 내가 직접 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마음이 조여왔다.
심박변이 수치는 순식간에 14로 떨어졌다.
‘아직도 이겨내지 못한 걸까?’
문득 겁이 났다.
시험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긴장감을 주지만 내게는 유난히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어렸을 적 나는 유독 예민한 아이였다. 시험날이면 꼭 배가 아팠다.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어떻게 시험날에만 배가 아플 수 있을까?
그 답을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요 네 과목의 시험을 봤다.
그날 나는 전과목 올백을 받을 수 있었지만 수학에서 한 문제를 틀렸다.
자를 이용해 5cm 선을 긋는 문제였다.
0부터 그려야 했는데 나는 1cm부터 선을 그어버렸다.
그 실수 하나로 전과목 만점을 놓쳤다.
[실수 였을까? 그냥 실력이였다고 생각했으면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시험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혹시 잘 보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 스스로 변명을 만들어두려 했다.
몸이 그 역할을 대신해준 셈이다.
‘배가 아파서 시험을 못 봤어.’
그건 어린 내가 만들어낸 무의식의 핑계였다.
수능을 한 달 앞두고는 결국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때도 어쩌면 ‘시험을 망쳐도 괜찮다’는 면죄부를 몸이 만들어낸 것이었을지 모른다.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는 전국 모의고사 다섯 번을 치렀고 평균 전국 3등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시험에서는 합격은 했으나 그만큼의 성과를 내진 못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늘 시험 앞에서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남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과.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준다
"시험은 내가 뭘 모르는지 확인한는 절차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