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재미있으니까"
'지능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사람의 두뇌가 원시수렵 환경과 현대국가의 환경을 구별하기 어려워함을 지적한다. 우리가 TV 속 상황이 허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쉽게 이입할 수 있는 게 이러한 두뇌의 착각 때문이다. 원시시대에는 드라마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게 다 현실이었는데 현대인의 형질이 그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미국의 일부 기업가들은 데드라인이 임박했을 때 팀원들의 업무효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선용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인터뷰에서 매일매일 회사에 나갈 때마다 회사가 파산 위험에 있는 상황인 것마냥 일에 몰두한다고 말했다. 또 어떤 기업가는 시간에 쫓길 때에는 빠르게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들을 맡고, 평소에 차분할 때 창의력이나 완벽성을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게 좋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하지만 보통 기업들이 그 둘을 거꾸로 하기 때문에 효율이 좋지 않음을 지적한다.
사람은 맹수에게 쫓기거나 먹잇감을 쫓는 정도의 긴박한 느낌이 안 들면 좀처럼 온 힘을 다할 생각을 안 하는 기질이 있다.
요컨대 현대인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몰두하는 경우는 대체로 원시인 입장에서도 번식이나 목숨과 직결된다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이때 TV를 보고 실화라고 착각하는 특성은 축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목숨을 걸거나 신체를 해하지 않아도 목숨이 걸렸다는 착각만 일으키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 특히 달리기를 하면 그날 머리회전이 잘되는 것도 이 기전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한다. 찬물샤워를 하면 마약을 할 때와 비슷한 도파민이 검출된다는 것도, 원시인이 굳이 냉수에 마찰해야 한다면 필시 위기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만 찬물샤워가 마약/인터넷 등등과 다른 점이, 찬물에 닿으면 찬물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지 찬물을 계속 맞으려는 미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높아진 도파민을 3시간 동안 유지한 채 다른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을 어디까지 불신하고 어디까지 신뢰할지는 개인의 자유다. 사실 생물학 자체가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이 분야에서 반증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맞아떨어지는데다 특별한 부작용의 가능성이 없는 좋은 수단을 굳이 엄밀 따지면서 경멸한다면, 그건 과학철학적 소양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추론능력이 결여되고 둔한데다가 이미 SJW*들에게 선동까지 당해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분명히 말하지만 원시인을 통한 추론은 사주팔자 따위와 결이 다르다.
더 나아가면, 10년 전부터 찬물샤워가 우울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우울증은 현대 민주정과 도시 라이프가 어떤 면에서 보면 기괴하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탐색할 가치가 있다. 선진국, 특히 치안이 좋고 교육열이 높은 동아시아에서는 평소 죽을 위험이 0에 수렴하지만 운신의 폭이 제약되고 새장 속에서 얌전하게 자기개발이나 하는 삶이 강제된다. 21세기부터는 서양 미성년자들도 동아시아화하면서 폭력성이 급감하고 얌전해졌는데, 여하튼 얌전함이 사회 안정에는 이로우나 개개인을 결과적으로 옥죌 수도 있다. 게다가 전쟁, 쿠데타, 시민혁명 등 사회전복으로 계층이 역전되는 상황도 벌어지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부분도 많지만, 자연에서 한참 벗어난 '기괴한' 삶에서 기존에는 없던 부작용이 나타날 각오는 해야 한다. 문명과 도시는 인류에게 음식과 생존과 여흥을 보장해줬고 현재도 지수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나 이제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줄 번식 및 위기감 둘 다 박탈하고 있다. 번식을 하더라도 서른다섯 다 돼서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타협하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 역시 본성대로 살기 어렵게 하는 문명의 부작용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진격의 거인>에서 이 대사를 하필 그로스 상사가 했다는 게 유감이다. "거인의 위협에서 벗어난지 80년, 다들 안전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생명체들이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을 살아가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로스 상사는 살아있는 느낌을 받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유린하다가 본인과 세계인들의 목숨까지 수렁으로 처박는 스노볼링을 야기했다. 그러나 저 대목만큼은 매우 동의한다. 다만 누구의 목숨도 희생하지 않고 '위태로운 느낌'만 재현해내면 될 뿐이다.
흔히들 정신이 나약해 빠졌으면 군대에 보내라는 말이 있는데, 국군 부대는 기간병의 운신을 과하게 구속하는데다 부조리로 정신적 고통을 줄 우려가 크기 때문에 반쯤은 틀렸다. 그러나 몸이 힘들면 정신적 자학을 덜하게 된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다만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그냥 시키는 대로 살면서 마음이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시간 버리다가 밖에 나가면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Woke와 비슷한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