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TT LIFE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넷플릭스. 1995.

Just stay, that's all I want.

by 망고푸딩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넷플릭스. 1995. (스포일러 포함)


볼 수 없었을 때부터 봐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영화다. 악몽 같은 일이지만, 동화처럼 순하고 덤덤하다.


오래전, 모든 걸 두고 집 나서며 현관 벽 거울 비친 나와 마주쳤다. 지 앞가림도 못하는 핏덩이가 위한답시고 여자들에게 여자 제1원칙은 '그러기엔 내가 아까워'라고 지껄였는데, 그 말을 돌려주고 있었다. 2년이 더 지났지만, 침대 위 진동 듣고 누군지 알았다. 개처럼 달려가 받았다. 갈림길에선, 받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고 받으면 인생은 돌아갈 수 없는 한 길로 정해진다. 본성이 그러한 동물은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정해진 길을 간다. 선택하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 같은 일은 낭만적이지만 버겁다.


좋은 여자


즉문즉설 영상을 수많은 캡처로 이은 게시물을 본 적 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은 좋은 여자에 대한 나름 기준과 판단이 있는데 만날 여자가 좋은 여자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있느냐 물었다. 스님은 "그 여자의 친구를 보라" 답했고 나는 스크롤 내리는 대신 탭을 닫았다. 좋은 여자는 필요를 충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서 충분한 나를 반쪽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언제나 나를 이기는 남자로 만들고, 헤어져도 그런 나를 잃지 않을 긍지를 남긴다. 질문한 자는, 좋은 여자는 고사하고 그냥 여자의 고려 대상도 될 수 없어 보였다. 그의 맵시에서 좋아하는 여자를 얻으려 애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별이 없고 성찰까지 부족한 것 같았다. '좋은 수박 고르는' 일상 경험으로 가득 찬 인생이 던진 물음에, 불법으로 내공을 단련한 사람이라면 "질문이 틀렸다" 답하고 스스로 질문을 거듭하게 하거나 그간 화두로 고민한 인연에 대한 깨달음을 중생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는 게 어울린다. 더구나, 그가 제시한 여자를 파악하는 방법도 틀렸다.


보통, 남자의 심리는 개와 애의 조합으로 유년기 디폴트가 평생 가고 격과 결이 다르면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남자의 경우 유유상종을 근거로 판단해도 엉터리는 아니다. 반면 여자는 시간과 경험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서 실체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여자는 어느 시점 또는 어느 사람 앞에 강인한 여자와 약한 여자로 있다. 여자의 가치 좌표와 해석의 영점은 유동적이고 포인트를 소진하지 않는 한 맺은 관계의 변동 폭은 극단적이지 않다. 각자 완충 기제와 정치 기술을 활용해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공주와 공주병 환자, 염치있는 여자와 얌체, 복많은 ㄴ과 박복한 ㄴ, 천진한 여자와 노회한 여자가 팔짱 끼고 다니는 경우는 흔하다. 그래서 어떤 여자의 친구인 여자는, 그 여자를 판단할 준거가 될 수 없다. 여자는 제게 효용 없는 남자에게 곁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를 판단하려면 그가 곁에 두는 남자를 보면 된다. 그게 그 여자의 필요이자 한계고 현실이다. 위의 질문한 자가 알아야 할 답이다. 만날 여자가 좋은 여자인지 아닌지는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늘 나약한 여자는 모든 현실을 망치고 어떤 현실도 항상 강인한 여자를 다르게 규정하지 못한다.

시방, 머라 하셨소?

세라, 좋은 여자


영화 '비스티 보이즈'는 포스터와 달리, 하정우는 위대하다. 터미널에서 심부름하고 내려가 '서울은 차만 많더라'하는 촌놈 같은, 소위 텐프로를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하류인생 스테레오 타입을 담은 이야기다. 멸시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들의 양식은, 저차원 욕구 메커니즘으로 가득 찬 서로를 심지어 혈육까지 뜯어먹고 사는 생태계를 이루는 말하는 벌레와 다름없다. 그들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사람의 상식을 얹으면 그만큼 병든다. 영화 '우주전쟁'의 톰 크루즈 부녀는 주인공이라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주인공이다. 학살 현장에서 셀 수 없는 사연들이 증발하거나 핏물로 변할 때, 자신의 명(命)을 자신이 놓인 운(運)안에서 딸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살길로만 달렸기 때문에 끝까지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성노동자 세라와 알콜중독자 벤이 사회와 인생의 바닥에서 만나 나와 우리를 확인하고 진심을 나누는 이야기다. 이 인물 구도에서 벤에 대비해 세라는 약물에서 자유로운 인물이다. 여기 지나치기 쉬운 중요한 것이, 세라는 그 바닥에서 그 대접받고 그 일을 겪고 사는데 담배와 가오로 자신을 지켜내는 비범한 인물이고 벤 또한 정신 온전하고 '뭘 아는' 남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쓰레기통에서 장미 피는 이야기가 나온다. 형편 맞춰 짝지어 거래하고 포장하는 관계를 미화한 게 아니다.


입의 본원 기능은 살기 위해 삼키고 살기 위해 뱉는 것이다. 뱉는 것은 목을 넘겨선 안 될 것과 목에서 나오는 소리다. 입을 성교 도구로 삼는 것은, 본질 한계 밖에서 관계성과 유희에 관해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행위다. 세라가 마주하는(face) 남자들은 생계를 인질로 세라에게 본질 아닌 부차적인 의미와 일방 관계만 요구한다. 벤은 그녀의 입에 마시거나 말하거나 그마저 내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세라가 망각한 본연에 대한 자유를 제안한다. 그는 당연한 것을 이미 오래전에 단념했기 때문에 가식 없는 존중에 홀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쫌ㅅ 양 ㅛㅐㅕ ㄴ묘?

직시


세라는 입버릇처럼 "Let's face it."라 말한다. 그렇게 세라는 자신과 현실을 직시한다. 휩쓸려 들어온 절망스러운 현실 안에서 힘들다고 허튼 보상으로 결핍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개방시스템도 인풋 대비 아웃풋이 커야 유지, 성장할 수 있다. 자기 경영이 순조로우면 의식과 철학의 영역에서 많은 것을 모르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찾는다 해도 위장이나 허영, 장사에 관한 효용인 경우가 많다. 어떤 이유가 자기 본질에 관한 경계를 침범하는 일을 경험해야 고민은 시작한다. 자질이 훌륭하면 의식과 자기의 경계가 공동체와 역사로 확장하지만, 보통은 단순한 자아 경계의 문제에 머문다. 자질과 관계없이, 경계에 치명적인 충돌이 발생하거나 버거운 마찰이 지속하면 도달하는 개념이 '삶의 정당성'이다. 이 정당성 토대 위에 뒤섞인 모순 속에 있는 삶이란 논리가 자기 완결성을 갖추는 과정을, 운명이 버릇없이 길들인 생은 그 길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세라는 타자의 일방적인 규정에 저항하며 삶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자신을 위한 거짓 없이 모든 것을 직시하며 산다. 반면 벤은, 운명이 무사함을 조금씩 거두어 갈 때마다 그만큼 무너지고 세상이 허락한 영역은 생과 함께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줄어들고, 어찌할 수 없는 소멸 그 종착지를 라스베가스로 정한다. 세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이 있었기에 누구나 부정하는 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 넓은 세상 스쳐 갈 수많은 우연에 마지막 나, 점 대 점으로 마주해 한 길 가는 필연을 그어 간다. 그리고 처음 벤이 바라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같이 있어만 달라는 그러기 위해 살아만 있어라는 그러기 위해 병든 현실을 직시하라 애원한다.


아무리 강해도 여자는 남자를 진심에 담은 때부터 그 사람 앞에 약자가 된다. 수많은 명장면 중에 세라의 마음에 씨앗이 내린 순간(Just stay, that's all I want)과 대구를 이루는, 세라가 간절하게 자라난 바람을 말하는 장면은 너무 아프다. "You’re staying here. You are not going to any motel. This is one thing you can do for me, just one thing. That's all I ask. I’ve given you gallons of free will here. You can do this one thing for me!"

호연지기.

벤, 아티스트


벤은 정신이 멀쩡하다. 그래서 괴롭고 그래서 마신다. 무너진 인간은 주변을 힘들게 하면서도 저는 편하다. 하지만, 벤은 모든 것이 괴롭다. 감각과 감성이 어느 날 참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수많은 자기모순 현실 모순과 어울려 내면에서 강한 운동을 만들어 내면 그 움직임이 영감이 열어준 길로 쏟아질 때, 의미와 퍼포먼스가 나온다. 하지만 그 큰 힘이 몸과 정신을 통과하지 못하면 계속 안에서 움직인다. 그렇게 예술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자기 안에 무거운 의미가 쌓여갈수록 다른 것으로 전부 치환하지 않은 움직임은, 담은 그릇을 피폐하게 만든다. 예술가에게 자기 파괴와 파멸이 존재 증명인 것을 예술인자가 발현하지 않은 부류는 알 수 없고 그 힘을 경험할 수 없으므로 그저 광기나 기행, 방탕으로 밖에 못 본다. 오늘도 수많은 예대생이 미쳐야만 하므로 미친 척만 한다.


벤이 극복하기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족과 행복이 떠난 게 아니라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이고 재능이 빠져나간 자신이다. 세라는 좋은 여자라 벤을 안을 수 있었지만, 알 수는 없었다. 세라에게 벤은 나를 나답게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에 이면 너머 벤의 세계와 결정을 볼 수 없었고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끝을 외면하려 한다. 그래서 벤은,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세라의 현실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세라가 상처받을 걱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고통스러운 위악을 선택한다. 그래도 세라가 덜 아프도록 해야 할 일을 매듭짓지 못한 채, 온 힘 쥐어짜 내 마지막 오아시스를 떠나 처음 그대로 사막에서 외롭게 생을 정리하려 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가 모르는 것이, 그런 배려 없이 이별하는 아픔도 여자는 반드시 이겨내고 남자가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서로 진심과 우리를 확인한 뒤 세라의 마지막 대사에 이어지는 벤의 모습이 세라가 발견한 벤의 정수(essence)다. 이 장면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고 크게 감동했고 괜히 할리우드가 아니구나 생각했다.

회광반조.

관조


예술가는 어디에 있든, 참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집을 품고 이에 반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저항해 본색을 드러낸다. 또한 모든 것을 관조하며 도출한 '자기만의 보편성'을 빛내기도 한다. 그렇게 철학자처럼 공학자처럼 사람이 갈 길을 비춘다. 직시하는 태도는 뜻을 두면 어떤 구애도 받지 않지만, 관조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고 그중 내면 역량만큼 물질 안정이 중요하다.


푸바오의 귀여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야생이나 우리 안에서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다가 귀여워서가 아니라 판다를 귀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내 의식과 자유의지를 담은 물리 실체를 안전하게 두고 있기 때문에 흐뭇하게 보는 것이다. 관객이기에 비탄까지 잔잔한 감동으로 간직할 수 있지 의식과 기억이 세라나 벤의 현실 안에 있으면 추억은, 잊고 지내다 쓸리면 한번 더듬어 보는 흉으로 남는다. 사실, 사람에게 희열과 행복은 순간이고 생사 경계에서 외줄 타는 삶이 나머지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는 건 운명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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