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시저를 보았다
모글리:정글의 전설.넷플릭스.2018..(스포일러 포함)
주식하기 전에 넷플릭스가 그토록 큰 기업인 줄 몰랐다. 유통 쪽 알바하기 전에 SPC의 실체를 몰랐던 것처럼. 펀더멘털과 모멘텀은 내가 언급할 처지 아니고 깜냥도 안된다.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양식과 이미지를 말하면 넷플릭스는 기저, 바탕, 지향 모두 독특한 기업이다. 건전한 민주주의 정신과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야망이 혼재하고 창작자가 하고 싶은 걸 할 구독자가 모르는 주제와 장르를 경험할 판을 제공한다. 비주류의 관점과 입장,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정확한 지식, 현상의 이면을 포장 없이 널리 알려 인간 본질을 이해할 창구가 단순한 쿼터 이상으로 크게 열려있어 디즈니보다 선호한다.
소설 정글북의 대표적인 실사화 영화는 넷플릭스 '모글리'와, 디즈니 '정글북'이 있다. 노벨상 받은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이 쓴 정글북에서 각자 적당히 가져와 다듬은 작품들인데 '모글리'는 어두운 자기색을 더했다. '모글리'처럼, 주인공의 정체성과 경계인 주제 의식이 원작에서도 큰 축 아니었을까 추측했지만, 작가는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 한계 안에 있었고 원작도 별 의도 없는 기발한 모험극이라는 점에서 '정글북'이 원작에 더 충실하다.
'정글북'은, 완성도 높고 덧붙일 말 필요 없는 디즈니 그 자체인 창작물이다. 누구나 재미있게 저마다 좋은 기억 남길 수 있는, 근사하고 깨끗하고 맛 좋고 여운까지 좋은 완벽한 추억으로 남아 다시 찾고 싶고 정보와 정서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이상적인 휴양지 같은 영화다. '모글리'는, 썸네일 숏영상에서 부터 경계인 시놉시스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인공이 가야 할 어둡고 힘든 여정을 예고한다. 같은 소재를 두고 OTT 서비스 기업의 정체성과 지향이 드러나는 듯하다.
감독
사람들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몰랐으면서 아이언맨 시리즈 보고 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며 지낼 때 1편을 봤다. '죄많은 소녀' 보고 같은 감정이었는데 이런 작품 만든 감독의 성취가 부러웠다. 존 '먼치킨' 패브로의 경력을 보다, 잘사는 사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신의 지나간 것과 함께하는 시간이 짧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쉼표'를 잘 다룬다. 완급조절은 물론, '쉼' 자체 뜻까지 잘 다룬다. 쉬는 내용을 스토리와 인물에 타당하게 잘 이끌어 가고 쉼표 앞뒤를 매끄럽게 연결한다.
아이언 맨은 1인자의 고뇌와 영웅 탄생 및 성장을 논리적으로 서사 하고 토니 스타크를 묘사할 때 쉴 때 잘 쉬는 것으로 주인공의 디테일과 심도를 높인다. 애니메이션 원작을 안 본 내게, 라이언 킹(2019)은 고전 서사의 완결성이 현대 기술과 조화를 이룬 위트있는 작품이다. 내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지만, 프로필 소개를 '하쿠나 마타타'로 바꿀까 충동 일만큼 울림 있었다. 일상과 일생에 필수적인 휴식과 숨 고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독은 잘 안다. 탁월한 역량으로 밀어붙인 생에, 적당한 역경은 성장과 효율을 뒷받침한 컨디션 관리로 무난히 넘어서며 그런 선순환을 경력과 자산으로 쌓아왔을 것이다. 존 패브로는, 거듭한 성공 경험과 기억 토대 위에 있는 성격 좋은 자기 작품세계로 모두를 끌어들여 유쾌한 재미를 준다. 이런 맥락은 '정글북'의 벨루에서 '라이언 킹'의 티몬과 품바까지 이어진다.
반면, 앤디 서키스는 영상 CG 기술 폭발 직후, 남다른 프로정신과 기량으로 기술과 배우, 대중을 연결한 입지전적 아이콘이다. 세계확장의 경계에서 진보에 이바지하며 시대와 함께 성장한 사람이다. 근본이 배우였음에도 골룸을 연기할 당시 '클래스'가 다른 '동료'배우들이 외부인으로 여겼지만 단 하나, 실력으로 모든 걸 바꾼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모글리'에서, 쟁쟁한 배우들이 얼굴에 점 붙이고 크로마키 앞에서 그의 디렉션을 받고 연기를 하는 것은 CG 같은 일이고 이 가운데, 계급사회 영국의 예비 기사(knight) 베네딕트 캠버배치의 프로정신도 특히 인상적이다. 앤디 서키스의 인생 스토리는 극적이고 이런 경험과 기억이 '모글리'에 녹아있다. 고립과 고통을 이겨내며 자기 본질을 거듭해 재정의하는 과정을, 숨 고르는 일과 어두움을 환기할 밝은 조력자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다.
불편한 골짜기에 사는 친구들
'모글리'의 모글리는,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소년 대신 2차성징 이전 미확정 이미지와 지역색 명확한 인종 특성을 강하게 반영한다. 주인공 캐스팅에서 문화 및 인종의 다양성과 젠더 이슈를 아우르는 접점을 잡은 것 같고 배우는 작품이 의도한 여러 고민과 주제 의식을 커다란 눈으로 잘 그려낸다. 문제는 기술자의 손과 연산으로 그려낸 숲속 친구들의 얼굴이다.
앤디 서키스 감독이 다른 상황에서 자신의 기존 성공 공식을 고수해 실패한 사례 같다. 그의 필모 정점이었던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침팬지 얼굴에 자기 얼굴을 넣어 '시저'를 탁월하게 재창조했다. 그래서 동물 모두에게 인간 가면을 씌운 것 같다. 이는 '정글북'에 대비한 '모글리' 기술팀의 역량 차이와 맞물려, 언케인 밸리로 인해 영화 내내 인지 자원이 누수하는 걸 인지하며 감상해야 하는 고충이 생긴다. '정글북'과 '라이언 킹' 제작진이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만화 과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짐승을 짐승답게 묘사하며 챙긴 실익이 '동물의 눈'이다. 동물은 종마다 저마다 고유한 자존심이 눈 안에 있다. '모글리'는 서로 다른 동물의 자존심을 인공적인 사람 눈으로 지워버렸다. 작품 메시지 및 지향과 정반대의 모순적인 폭력, 이기적인 사냥꾼에 가까운 결정을 내린 게 치명적인 오류다. 제작 과정은 내가 알 수 없고 감독은 책임지는 자리니까, 이는 앤디 서키스 감독의 명확한 철학 한계다.
보다 무심결에 욕을 뱉은 굳이 그래야 했나 싶은 희생자 에피소드도 불편하다. 사회 약자 및 동물 보호, 사회와 인간의 양면성, 한 인물의 성장통과 그를 둘러싼 부조리를 풀어갈 연대 등 다양한 쟁점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의도는 알지만, 일탈하는 인간이 숨긴 유별난 살생 유희 욕구를 인간성 기저에 있는 어두움으로 일반 치환해 모글리가 마을을 등지게 하는 건 안일한 논리였다. 하지만 숲에 있는 압도적인 안타고니스트를 관용하는 결론의 전제가 될, 그 이상의 관용할 수 없는 빌런이 마을에 있어야 했고 액션 어드벤쳐 장르 문법상 달리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각색하고 자기 해석을 덧붙일 때는 철학자처럼 제대로 한 걸음 더 딛지 않으면 아니함만 못한 일이 되는 걸 배웠다. 다른 감독의 작품 '모글리'와 '정글북'은, 결국 답습에 머문 초라한 각색과 관습 안에서도 모든 세계를 확장하는 길을 보여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바기라
철창에 갇힌 모글리가 바기라와 대화하는 장면은 백미다. 중대한 플롯 전환 구간이고 구도, 인물, 메시지 바탕에 관한 유기적 정보 밀도도 높고 복잡한 감정들을 한꺼번에 끌어 올린다. 첫 번째 사회화로 부여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식구에게서 어쩔 수 없이 분리되어 낯선 사회에 홀로 적응해야 하는 자식 같은 형제와 이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틋하다. 모글리를 살리기 위해 살아남은 그다음을 위해, 표범이란 실존에 반하는 과거를 통해 얻은 수치스러운 지혜, 본성인 야성을 자신 안에 가둘 때 그 세상이 가둔 철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서글픈 "단념"을 "신뢰를 얻어라."라는 바기라답고 서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비장하고 운치 있는 말로 설득한다.
다른 서로가 달리 온 여정에서 어쩌다 함께한 소중한 모든 것들이 끝이 보이는 허락된 아름다움임을 알기에 우리가 절실했음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야 하는 슬픔과 아직 할 수 있는 헌신을 거두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유를 담을 수 없는 너를 아프게 품고 떠나야 하는 고독이 크게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