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OTT LIFE

나의 아저씨. 넷플릭스. 2018.

시스템과 소사이어티.

by 망고푸딩

나의 아저씨. 넷플릭스. 2018.(스포일러 포함)


사람은, 이 황무지에서 자기 십자가 지고 가는 길 어디서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내어줄 때 비로소 되살아나는 온기 나눠 품고 가던 길을 간다. 지안과 동훈도 그렇다.


철 지나 봤고 해당 논란도 이제야 알았는데 '허수아비 때리기'로 밥벌이하는 인간은 문명 최후까지 남을 것 같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당대에 맞는 안티테제를 가져야 한다. 남성주의는 현존하는 부조리지만 시비, 경중, 선후로 볼 때, 이 사회 여성을 억압하는 결정적 주체는 시스템 헤게모니 쥔 반민주세력이고 그들과 싸울 용기와 통찰, 전략연대가 필요한데 엉뚱한 짓 하고 만족하는 것 같다.


'네멋대로 해라'처럼 당대에 한걸음 앞서가는 시각과 감성, 대사가 어우러진 드라마로 기대했는데, 드라마 판타지를 큰 축으로 리얼리티와 캐릭터 직조해 폭넓은 시청자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네멋대로 해라'는 소프 드라마와 같은 소재를 탁월한 태도와 대사로 타협 없이 저세상 드라마로 빗은 것에 비해, '나의 아저씨'는 같은 소재를 고유한 색깔과 운치로 이세상 드라마로 버무렸다. 노리고 깔아 놓은 공감지뢰밭 드라마이므로 TV 앞에 앉을 형편 되는 사람 이야기는 등장인물 또는 에피소드에 반드시 걸린다. 나는 이지안, 박기훈, 정희의 기억이 섞여 있다. 특히, 삼형제+1을 통해 '남자가 선택한 고독의 무게'를 잘 표현한다. 주변인에 대한 애착이 돋보이고 다들 여러 에피소드에서 큰 역할 한다.


대사는 직설적이고 메시지 분명하다. 몸대사 많아서 좋다. 종종, 3분 전에 그러겠거니 생각해도 금방 빠져들어 예측 못한 사람처럼 울컥했다. 인물들은 대체로 성숙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보이므로 보는 데 스트레스 적다. 첫 등장부터 이광일은 단순한 폭력배가 아닌 이지안에 대한 애증 있는 인물로 드러나 극적 긴장감과 반전은 덜 한 만큼 맛은 더 풍성하고 깊다. 도준영이 발광할 때 막장드라마 카타르시스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마음껏 남 탓하고 화내고 싶었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고생한 정해균 응원했었는데 반갑고 좋았다. 주제곡 '어른'은 완성도가 독보적이라 다른 곡들이 그늘진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때그때 적합한 수용체를 세우는 게 건강하다. 나는 골깊은 감정에 쏟아진 이야기들을 정리하지 못해 크게 동요한 상태로 남았지만, 나의 아저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드라마일 수 밖에 없는 모든 면 솜씨 대단한 작품이다.


경계


'나의 아저씨' MVP는 배우 이지은이다. 기타 한 자루 들고 와 이제껏 살아남는 동안 무얼 보고 듣고 겪었을지 짐작 간다. 폐쇄 의사결정 구조속에 의사 결정자가 누구이며 그 결정이 목적인 자들이 누구인지, 욕망을 끔찍하게 해방해도 제재받지 않는 인간이 군림하는 세계, 그 위계를 구성하는 비루한 자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하는지. 밖에 있던 너드가 울타리 걸치면 괴물 되는 생태계, 보통사람 사는 일상보다 더 짙은 야생을 재능과 인기만으로 헤쳐나올 수 없다. 자기 한계와 회의, 퍼포먼스 이면에 있는 공허와 인기에 비례한 모두의 시기와 악행까지 감당하려면 매우 대단한 '내력'을 갖추고 '운명이 지켜주는 길' 안에 있어야 한다. 메소드 연기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다. 대중 앞에 숨겨야 했던 다친 야성 가둔 자물쇠 푸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다. 어색해도 천금 같은 미소에 보는 사람 숨통 트였다.

그래도, 창 너머서 보면 철렁하제.

모든 것은 경계를 유지해야 존재할 수 있다. 사람도 여러 의미에서 여러 경계를 잘 지키는 게 사는데 중요하다. 주변 불편 아랑곳하지 않는 이지안의 경계는 인상적이다. 좋은 사람이지만 경계가 불분명해 자기도 흐릿한 동훈과 대조적이다. 자기중심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사는 게 고달파도 이지안은 자기중심을 잘 알고 그 중심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경계도 명확하게 지킨다. 이는 심리적으로 건강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경계 밖 타자가, 관계에 대한 단념이나 폐쇄로 보더라도 이지안은 문 열 준비가 되어있었고 가장 효율적인 경계를 유지하며 버거운 목표를 수행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선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는 것이 끔찍한 사건으로 꺾이지 않았거나 그 일을 극복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죽은 듯 있다 조건만 되면 살아나는 생명처럼 이지안은 언제든 사회로 돌아갈 자기 전제를 충족하고 있었다. 지안은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달려갈 기회와 영감을 줄 누가 나타날 '때'가 필요했다. 그 때 동훈이 있었다. 할머니가, 버텨야 할 마지막 생명력이라면, 동훈은 되살아나게 하는 조건이다.


이지안은 자기 경계가 있고 절대 저항하는 경계가 있는 반면, 박동훈은 자기 경계가 없다. 상원이 자아와 직면해 삶의 자원을, 길을 구하는 데 쏟아부었다면 동훈은 모든 것을 역할에 골고루 나눴다. 노력과 성취로 삶이 변하고 지위와 실력이 커가도 텅 빈 사람같다. 하지만, 이 공허한 안개가 한 씨앗을 적시고 싹이 트고 서로에게 큰 의미가 된다.


판타지와 리얼리티


극 전반을 소시민 애환과 휴머니즘을 짜임새 좋고 감성 자극하는 영상으로 꾸몄으나 낭만적인 아저씨에 대한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바른 창업주, 선량한 소시민, 계획대로 다 해내는 범죄 판타지를 바탕으로 한다. '재벌집 막내아들'과 '글로리'처럼, 결말에 맞춰진 전제와 장치 이후부터 개연성을 다루고 계획한 긴장감 능선 따라 적당한 난관과 암시를 차근차근 배치했지만, 몇몇 오류있는 전제나 판타지가 거슬려 에피소드 전부는 몰입하지 못했다. 거듭, 왜 나는 남들처럼 웃고 울 수 없는지 물어야 했고 덮었던 문제를 헤집고 통점은 다 건드려 마음이 난장판 됐다.

내가 밥부터 먹이라 그랬지, 배고프면 화난다고!

넓은 의미에서 러브라인은 진심과 오해, 해소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보통드라마는 우연히 혼잣말을 듣거나 전언, 목격, 정황을 도구 삼아 타이밍으로 포인트를 잡는 반면, '나의 아저씨'는 과감하게 범죄행위로 두 인물을 일방적으로 연결한 게 기발하다. 그 과정을 후반까지 흥미롭고 가슴시리게 뭉클하게 끌어간다.


'키다리 아저씨'와 반대로 '나의 아저씨'는 음지에서 기반 없고 어린 여자가 양지에서 기반 튼튼한 중년 남자를 은밀하게 지켜내는 이야기다. 그래서 범죄 초능력이 필요하다. 제작진의 역량이 리얼리티로 승부해도 충분할 법하지만, 도청으로 끌어낸 그리고 단절 이후 독특한 신파 모두 강렬하고 관계에 대한 은유, 이해와 진심에 관한 주제 의식과 직결하기 때문에 도청 없이 극과 인물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아저씨가 아저씨 숨소리 듣는 건 고역이었다.


박동훈도 표준보다 판타지에 가깝다. 뛰어난 실력, 훌륭한 태도와 지위, 건전한 윤리에 준수한 외모까지 갖춘 중년남성은 아주 드물고 비정하다. 자신이 겪고 넘어선 허들 밖 허덕이는 사람에 사적인 마음 쓰지 않는다. 다만, 통과했을 때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자신이 내색하지 않은 등가 고통 이상을 이겨낸 이후부터 유대는 시작한다. 보통 사람이 마음 뺏긴 문제는 자신의 개입보다 시스템 문제로 접근한다. 즉, 상응하는 능력과 지위가 있다. 그렇게 사는 게 맞다.


중년 남자와 어린 여자의 조합은 보통, 거래 관계 속에 여자가 종속하거나 기생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반면, 순정에 기반한 관계도 있다. 여자는 헌신이 목적인 시기가 있고 그 기억은, 같은 여자를 대할 때 긍지로 작용하고 이 시기는 어릴 때 흔하다. '알리타'가 값진 심장을 꺼내 기꺼이 싸구려와 맞바꾸려 하듯, 마음이 동한 어린 여자는 자기 진가를 모르고 부성의 결핍이나 동경심리 등으로 아저씨에게 끌리는 경우 있지만 합당한 중년은 귀하고 온전한 솔로는 더 귀하며 있어도 오징어이거나 크게 흉진 사람이다.

너 참 불쌍타

'사람'이란 '논리'에 연민은 합치하는 것이고 자기연민은 오류다. 자기연민은, 사회 속 인간이 공공자산으로 불려야 할 윤리 자산을 횡령하고 자신의 부채까지 더 늘리는 일이다. 여기는 동훈을 중심으로 '우리도 남도 아닌 유대'가 대조를 이룬다. 헌신으로 찬 지안은 동훈을 연민하고 텅 빈 동훈은 지안을 연민하며 서로 힘을 얻는다. 자기연민 빠진 윤희는 허튼 헌신 하고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 동훈을 탓하지만, 애초 동훈은 생에 자기가 없었다. 윤희는 동훈이 품은 빈 둥지였고 지안은 동훈을 품은 둥지였다. 다른 길에서 온 지안과 마주친 그때만 살아 있고 그 이후에도 남은 생 전부 죽어 있을 것이다.


이야기 대부분 메우는 아저씨 군상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포장했지만 '아저씨'는 대체로 추하고 무책임하다. 정감 넘치는 그들의 유대는 어떤 극도 다루지 않은, 여러 의미로 여자를 성착취하는 일상 위에 있다. 부정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참회하는 윤희에 대비해,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아저씨는 그보다 더한 부정을 예사로 거듭한다. 이 드라마 아저씨 군상은 건전한 단면만 조합한 것이고 실제 아저씨들은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주인공을 둘러싼 수컷들 수준이 태반이다. 상(喪) 에피소드와 반대 구도로 현실에서는, 은폐에 대한 강한 연대 의식 때문에 한 남자에게 맞서는 한 여자는 집단을 홀로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 이지안이 겪는 극단적 고립은, 운명이 지켜준 일상에서 두 걸음 더 미끄러지면 여자 누구나 직면하는 흔한 상황이다.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구출될 때까지 길짐승처럼 버티는 이지안을 응원해도 감동할 수 없었다.

또 다른 현실의 반대 구도.

이 드라마의 판타지는, 무심한 시스템이 외면한 망가진 여자를 다정한 소사이어티가 포섭해 양지에 사는 일반인으로 다시 살 기회 주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나는 그 판타지를 건너지 못했다. 현실에서 아저씨들이 이런 여자를 구하는 사례는 몇 년 만에 뉴스에 나올 빈도지만, 멀쩡히 살 수 있는 아이를 끌어들여 망치는 경우는 폭넓게 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소사이어티


법은 사람을 지켜주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지킬 뿐. 이지안 문제는, 건강한 시스템에 어쩌다 일어난 종기같아 소사이어티의 온정주의로 도려내면 될 게 아니라 사회 암 덩어리로 인해 드러나는 증상의 하나로 암세포를 파괴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해결할 수 있다. 인본주의 기반에 세운 제도와 취지에 부합하는 실행이 주된 것이고, 시급하거나 제도 사각지대에 남은 문제에 대한 사적 구제는 부차적인 일이다. 그래서 시스템을 장악한 부패한 엘리트 집단의 전횡과 기만, 구조적 모순을 그대로 두고 정치 외부 사인(私人)만을 통한 해법은 틀렸다. 근원을 덮어두고 내가 좋은 사람인 느낌과 문제 해결한 듯한 효능감, 세상이 나아진 듯한 착각으로 보상회로는 반짝이겠지만, 때에 따라 혼자서 충분한 사람을, 도움 필요한 사람으로 정체성 강요하고 오히려 짐 되는 도움 던지고 자위하는 행위일 수 있다.


제도 의미에 한정한 시스템은, 그 사회의 중추인 정치이념에 기반한 법체계와 관습, 구성원 정서 및 요구, 반향 큰 사건들로 만들어 고쳐지는 것이 정석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기본권을 보장하며, 기본권이 충돌할 때 조율하는 사법제도를 두고 있다. 또한 기본권 보장 위해 여러 제도를 만들어 운영한다. 문제는 민주주의 시스템은 법치를 통해 실현하는데 이 법치 주체가 행한 해석과 집행이 부당한 자의로 이루어질 경우, 주권자가 견제하는 것에 큰 한계가 있다. 사회를 위해 시스템 운영을 위임받은 공복들은 자신들을 견제할 권한을 자신들에게 남겨 두고 기본권 문제를 포함한 모든 충돌을, 자신들 연대의 재산권 보장과 헌법이 부정한 계급 유지에 부합하게 해결한다. 시스템이 부여한 권한을 사사로이 행사해 이익을 얻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자발적 무지와 의도된 무식 상태 남겨두는 노력을 병행한다. 무도한 권력 집단이 다른 주권자 권리를 침해하고 자신들 사익에 유리한 입법작용과 행정작용 진행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다. 한마디 더 해야 하는데...

MV5BNDE2NGVmOWItYWI2NC00ZDcxLTk1NmQtYTE5M2U0MmIyYWM1XkEyXkFqcGdeQXVyNDg4NjY5OTQ@._V1_.jpg 이젠 남 일이 아니라서.

한국 사회는 쓸 수 있는 돈이 많다. 그 돈을 다루는 자들은 대체로 자기 지위와 인사가 최우선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사회 역할에 관한 고민이 없다. 드물게 교과서적인 의사결정을 하려 해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사회 매장을 감수해야 한다. 안팎으로 금융민주주의 당위를 소리 높여도 바뀌지 않고 공적자금이나 은행자본이 부실 경영이나 불법, 편법대출에 들어가 증발하는 것에 공손하고 생존에 직결한 작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준엄하다.


같은 맥락으로 복지예산 규모는 큰 데 어느 항목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 실제 지원이 절실한 취약계층에 유효하게 도달하는 돈은 부족하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부주의하게 더 열심히 살면 차상위계층이 되어 복지 사각지대로 들어간다. 이런 부당수급자에게 추심하러 가는 말단 공무원이나 병원 직원도 괴롭다. 어리석은 의사결정자의 착각과 감정이 지시로 내려오면, 힘들게 꾸려 가던 제도를 무너뜨려야 한다. 이번에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찾아보았는데, 드라마에서 체납독촉 요양원은 이해관계인으로 장기 요양을 대리 신청할 자격 있는 자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체납액을 누적시키고만 있었다. 채권자로서는 억울하지만, 이지안 입장에서 상속 포기나 한정승인 신청했다면, '아무것도 아닌'일이었다. 이미 완비한 시스템 안에서 운용 주체인 사람이 구체적 사례에서 사소한 일을 하고 안 하고 차이가, 한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치명적으로 반대쪽에 밀어붙인다. 이건 한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다.


사람, 등불

a5fb2f668cb2c.jpg 인간성의 보루

세 살 이전 말도 잘 못할 때, 방 한쪽에 누워있던 증조할머니를 뚜렷이 기억한다. 사진도 없고 아무도 말해준 적 없는 증조할머니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아버지는 놀라고 신기해했다. 증조할머니는 언제나 한자리에 정물처럼 누워 있었다. 어느 날, 딱딱한 스펀지처럼 튀긴 맛없는 과자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심중을 헤아리려 고민했다. 숨인지 말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 먹으려는 건지 먹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검고 깊은 눈, 모처럼 비스듬히 몸 일으킨 것도 신기했고 그리 나쁘지만 않았던 쿰쿰한 냄새, 머리숱 많이 남은 내 평생 거의 본적 없는 곱게 늙은 노인이었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 같잖은 소리 하는 것도 알았고 대화가 안 돼 답답했다. 열린 미닫이 문밖을 오가며 살피다 들어와 나를 떼어놓은 할머니가 매정해서 증조할머니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정서까지 기억한다. 그날과 장지 아래에서 동생과 작대기 들고 놀던 때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쌍둥이 여동생이 나처럼 작대기 후리며 웃는 걸 의아하게 여기며 아니무스를 처음 느낀 것도.


지안의 할머니로 내 고운 증조할머니가 떠올랐다. 증조할머니는, 살며 겪은 인간이란 어둠 속에서 등불 같은 존재다. 그런 사람이 있었고 어딘가에 또 있으리라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지안의 할머니는 이지안의 세계에서 유일한 혈육이자 내 편이다. 그는, 가난에 비롯한 열악한 공간과 뜻대로 거동할 수 없는 육체 한계로 겹겹 감옥에 갇힌 영혼이지만, 항상 맑은 정신으로 밤하늘에 밝은 달을 구하고 어둠에 싸인 손녀의 삶을 주시하며 귀한 조언과 좋은 길을 비추는 강인한 인물이다. 이 설정을 배제해도,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잃은 사람이지만 그 존엄을 지키는 것은 이지안의 인간성을 유지할 마지막 동아줄로 의미 크다. 생을 걸고 자기 인고를 대가로 타자의 존엄을 지키는 신념은 숭고하다. 여력을 나누는 것과 차원이 다른 윤리다. 이지안은 지켜야 할 사람을 둔 여자의 강인함을 잘 표현한다. 그러하게 있도록 헌신하는,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 드라마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람에 대한 정의. 여러 관계와 사연, 인물 중 이 이유 하나로 이지안은 다른 누구와도 무게가 다르다.


무상


드라마는, 현실과 무상의 표리인 동훈과 겸덕의 입을 빌어 아무 일도 아니라 한다. 그런 마인드셋이 실효적인 범주가 있고 수습할 수 있는 과오와 극복할 수 있는 기억은 제한적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운명이 지켜준 사람들이고 이지안은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불필요하게 그 밖의 사람들을 떠올려 '아무 일도 아니다'라는 말을 공허하게 느꼈다.


'나의 아저씨' 주인공 이지안 보면 인어공주가 떠오른다. 인어공주는, 더 가치 없는 것에 더 가치 있는 것 대가로 가장 빛나는 때를 청승 떨다 물거품 만든 게 아니고 고통스러운 선택 끝에 가슴 시린 희생과 이별로 이룬 사랑의 경지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이야기다. 세상의 길이, 마녀가 말하는 방도 아닌 내 고결한 선택에 아무도 몰랐던 미래로 열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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