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는 왜 그리 댓글에 박할까?

- 말, 그 신비의 기적. 선함과 의로움. 이해인 '나를 키우는 말'

by 가을에 내리는 눈

고래를 칭찬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왜 고래를 칭찬하려고 하나 나는/고래는 나의 칭찬을 알까/그래서 뭐가 달라졌나, 그에게 또 내게? 오늘 새벽 잠결에 뜬금없이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느 작가가 이미 확보한 브런치 구독자의 10% 정도가 그의 특정한 날의 글에 대해 라이크잇 표식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또는 이례적으로 구독자 수의 두세 배가 넘는 분들이 좋아요 사인을 보내는 경우도 가끔 본다. 통상 구독자의 20%-30% 수준에서 어느 작가의 어느 날 특정 글에 대해 라이크잇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것은 그렇다.


이상하고 신기한 것이 하나 있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 내가 읽은 어느 작가의 글, 좋아요 버튼을 누른 분이 이미 60명이 넘는다. 그런데 댓글은 하나도 없다. 이건 뭘까?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물론 작가가 일부러 댓글 금지를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달 수 있었으니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누군가의 글을 읽고 거기에 라이크잇 표식까지 달았는데, 정작 작가에게 그리고 그 글에 대해 할 말은 없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요즘 세상은 다 그런가? 그동안 내내 궁금했다, 물론 지금도.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나를 위해 반찬을 새로 만드신다. 아내가 오후 내내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가족의 저녁 식사를 위해. 맛있게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는 것이 정석 아닌가? 물론 맛이 없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맛이 좋았다, 아주 좋았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이 없으면, 어머니와 아내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맛이 없었구먼! 뭐라 말은 못하고 그저 저리 속으로만 새기고 있는 거야! 내 요리 솜씨가 그렇게 별로인가, 그 오랜 세월 내 음식을 먹어왔으면서도 아직도 그렇게 까다로워? 아범 입맛은?"


왜 댓글이 없을까, 유독 브런치의 세계에서는? 물론 유명 특정 작가의 경우에는 엄청 댓글이 많다. 그런데 통상, 일반적으로 보니 그렇더라 뭐 그런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작가에 대한 배려인가? 어떤 배려? 그냥 입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아니, 상대가 기분 나빠할 소리라면 그렇다고 쳐도, 좋았다고 꾹 누른 버튼 아닌가? 아, 그것도 그냥 예의로? 그건 좀 곤란한데? 좋지 않았던 글에 대해 굳이 그렇게 라이크잇을 누를 이유는 서로에게 없는 것인데? 뭘까?


둘, 무관심? 아이고, 그냥 읽었다는 표시이지! 그거 하나 누른 것도 나름 마음먹고 한 것이구먼. 글에 대해서는? 사실 내가 그 글 끝까지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인지, 잘 기억도 안 나고. 지금 바빠요!


셋, 게으름의 한 형태일까? 그럼 그 글 읽을 그 열정과 노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직은 크게, 아니 전혀 유명하지 않은 어느 누군가의 글을 일부러 시간 내어 읽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충분히 부지런한 분인데? 그런데 왜 그 짧은 한 줄 글은 쓰지 않는 것일까?


넷, 그저 부끄러움? 아니 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글의 세계 속이지만 대화를 해? 그것도 내가 먼저 말을 시작해? 쑥스럽기도 하고, 내 정서와 습관 속에서는 여전히 좀 낯설구먼.


다섯, 댓글, 그 필요성 혹은 그 존재 의미나 가치에 대한 충분한 인식은 아직 없음의 결과? 자신의 한 줄의 글이, 따뜻함과 정성 가득 담긴 그 2-3분이면 되는 글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로, 가치로,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의미가 있어요, 내 댓글 한 줄에? 나는 몰랐지.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누구라도?" 그래서 오지랍 넓은 제가 총대 메고 이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오늘 지금 이 글에서!


여섯, 충분히 안전한 공개된 공간에서, 뭘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글에 대해, 그로 인한 인연의 가능성에 대화 몇 마디 나누는 시도는 위험한 것도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자리라면 얘기가 다르다. 성별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그런데 브런치는 뭐 그런 것이 전혀 개입될 자리가 아니잖아요?


친구 중에 국내 유력 일간지의 논설주간으로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더욱 부럽다 그가. 우선 여전히 젊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 자랑스러운 사실. 지금도 돈을 번다는 점. 그러나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매일매일 그의 글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구독자의 수도 라이크잇을 누른 사람들의 숫자도 전혀 신경쓰지 않을 그.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그/무엇보다 그의 글들은 언제나 제대로, 신경 써서 읽힌다는 것.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몇 번 논설 면도 아니고 특별히 마련된 고정석에 떡하니 실리는 그의 글. 모두가 정독을 한다. 학생들도 그 학부모들도 스크랩까지 하며 금과옥조로 읽는다, 논술에 도움이 된다고.


브런치 겨우 4개월의 신참이지만 우려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좋은 대화의 장이다, 브런치스토리라는 곳은. 좋은 작가들의 좋은 글 또한 많다. 문제는 '너무 많다'는 점이다. 어떤 글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쉽게 알 수가 없다. 시간을 내어 그 글들을 정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더욱 어렵다. 많이 아쉬운 낭비이고 비효율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현실이 그러니 당장 달리 묘수는 없다. 그게 안타깝다.


언젠가는 나도 브런치 글쓰는 일을 그만하는 때가 올 것이다. 사실 그래야 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작금의 글의 홍수가 개선될까? 잠재적인 독자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일까? 지금으로서는 그저 난망의 근본적 제약이다. 아깝다, 많은 좋은 글들이 그저 그렇게 묻혀버리는 당장 지금의 현실이!


절대 오해마시라, 지금 제 글이 좋다고, 좋은 글일 수 있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그저 이런저런 이유에서 나의 초보적 수준의 글을 읽어주는 소수의 독자분들을 위해, 오늘도 나의 일상 속 느낌을 다른 시인들의 좋은 시와 함께 써내려 가는 것 뿐이다. 그러나 나의 글과는 아예 처음부터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런 좋은 글들이 브런치에는 많다. 내가 직접 읽은 것들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 좋은 글들을 읽은 독자들이 자신의 감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의 소통의 한 방식이다.


한자 비수 비(匕) 자가 있다. 정말 비수처럼 그리 생겼다. 웅크리고 돌아서서 날카로운 칼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다. 무섭다. 그것이 둘이 모이면 이제 견줄 비(比)가 된다. 서로 등을 맞대고 아니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서, 그 비수를 들이대며 나 잘났다 너 잘났다 겨루기를 한다. 그 순간까지 둘 사이에 대화는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둘 중의 하나가 입을 연다. "어, 너 브런치에 글을 써? 나도 그런데? 필명이 뭐야? 그거 내려놓고 이리 와봐. 얘기 좀 하자." 이제 다 개(皆) 자가 탄생한다. 조금 전까지의 비수 비와 달라진 것은 단 하나 - 말을 한다, 사뢸 백(白). 둘이 함께, 다 함께 뭔가를 하기 시작한다. 공통의 관심사가 생겼다. 이제는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참고로 이제 여기에 나이 지긋하게 들어가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 (人)이 등장하면, 그 둘이 일상 속에서 다정하게 서로 의지하며 그렇데 대화를 이어가면, 그것이 바로 함께 해(偕) 자의 탄생이다. 해로의 그 해. 나의 글에 이렇게 한자를 쓰는 것은 지난 100개 넘는 글 중에 몇 개 안 된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내가 그의 속을 어찌 알겠나? 내 안의 내 속도 모르는 때가 많은 것을? 그러니 제발 말을 하자. 표현을 하자, 좋으면 좋다고 하자. 싫으면 '나 솔직히 말하면 지금 좀 기분 나빠. 하지만 우리 관계 더 나빠질까 걱정이 되어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하고 말을 하자. 물론 때를 잘 골라서/충분히 예의를 갖추어/최대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감정을 누르고/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목적과 동기 속에 그렇게.


제가 말을 좀 잘하는 편이라고 다른 글에서 말씀드렸지요? 제가 생각하는 '말 잘하는 사람'은 우선 언제 말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는 꾹꾹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본능적으로, 눈치로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언제 아버지에게 추가 용돈 얘기를 꺼내야 하는지. 그 결과는 많은 경우 아버지의 기분과 상황, 나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때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저 때의 차이일 뿐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확연하게 갈립니다, 예스 아니면 노우!


그 다음은 충분히 준비하고 여러 번 연습한 다음에 말을 시작해야 합니다. 불쑥 꺼내는 말도 (상대방이 보기에는 갑자기/예고도 없이/어쩌면 그래서 뜬금없어 보이는) 사실 말하는 사람은 몇 날 며칠을 준비하고 연습한 것이어야 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 좋다 말합니다. 아와 어는 크게 다르고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이 들어주기에도 좋습니다'. 감언이설, 거짓을 말하라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바로 치명상입니다.


'들어주기에도 좋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귀 기울려 최대한 성의껏 집중해서 듣는다. 그러면 당연 처음부터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추가 용돈이든 다소 용감하게 우리 둘만이 며칠 여행을 가자는 조심스러운 부탁이든) 혹은 정중히 요구하는 것을 수용할 가능성 또한 높아집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들어주기에도 좋다는 말의 뜻입니다.


어떻게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지, 내 얘기에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까지 이미 내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 그에 대한 상대방의 예상 질문과 함께.


평소 내가 상대방에게 주고 있는 신뢰의 정도 또한 중요하지요. 지금껏 한참을 지켜보았는데 그 사람 괜찮은 것 같아. 진중하고 왠지 그냥 믿음이 가. 이런 평가?


너무 자주 말을 하지는 않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지요? 희소성의 가치. 물론 그렇게 하면 불필요한 실수나 오해도 줄일 수 있지요. 약간의 신비감 혹은 긍정적 의미의 호기심도 유발하게 되고요.


나이가 이렇게 들어도 누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그렇게 응원하는 말은 늘 기분 좋습니다. 반면에 정말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도 부정적인 말은 여전히 듣기가 거북합니다. 하긴 새삼 이 나이에 그런 조언과 권고의 말을 들어서 뭐 어디다 쓸 것인가 하는 기본적 회의 또는 저항감도 있겠지요?


주위의 사람들에게, 특히 아내나 남편,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기회 나는 대로 칭찬하면 좋겠어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달리 뭔가를 노리고 하는 일은 더욱 아니니까요. 그렇게 잘한다 잘하고 있다 말하면, 정말 그렇게 잘 해 나가는 상대방을 보게 됩니다. 오래된 영화 중에 '가스 라이팅'에 관한 것이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나쁜 목적을 가지고 끈질기게 반복하는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과 평가는, 정말 말하는 그 사람 자신도 그리고 늘 그런 말을 들어온 '피해자'도 놀랄 만큼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브런치의 만남의 장에 모이는 분들은 다들 선한 마음 속에, 의로움 가득 늘 상대방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그렇게 칭찬하는 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이미!


오늘의 시를 봅니다. 이것이 말의 힘이고 말이 가져오는 그 신비로운 기적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옮겨 적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라고. 이 시를 읽으니 저도 불끈 힘이 납니다. 나의 용기를 키우는 고마운 말입니다.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