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려움 없애기, 일단 길을 나서기. 정현종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새로운 숙소로 옮긴 지 삼일째. 완전히 낯선 지역이라 첫날은 집앞 가까운 곳 익히기. 혹여 집을 못 찾으면 안 되니까. 둘째 날은 어제 익힌 곳에서 한참을 더 탐험해 보기. 그런데 아니 이럴 수가! 내가 몇 달을 있던 곳에서 가까운, 거기부터는 내가 익숙한 접점을 찾았다. 겨우 10분 거리에 있었다. 좋아하는 두부 튀긴 것 파는 집도 알게 되었다. 당장 샀다, 가격 싼 것은 덤. 이런 곳을 두고도, 그저 두려워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해서, 그동안 이 두부집을 모르고 살았구나, 늘 다니던 곳에서 불과 몇 미터의 거리인 것을!
셋째 날 오늘, 서둘러 집을 나선다. 내가 늘 가던 큰 마트를 찾아 나선다.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란다. 중간중간 몇 번을 물어서 간다. 내가 다니던 옛길로 가는 법은 이미 어제 익혔다. 좀 더 빠른 새로운 길에 도전한다. 찾았다, 아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원래 방향과 지리에 약하다, 눈치가 없고 본능적 감각이 부족한 탓이리라. 뭐 어쩌겠나, 이런 사람은 또 이리 살아야지?
양손 무겁게, 꼭 그 마트에서 사야만 하는 것 위주로, 몇 번을 쉬어서 새로운 숙소로 잘 돌아왔다. 이게 뭐라고, 그래도 뿌듯하다. 평소 나의 일상 속에서 칭찬해 주는 사람, 따뜻한 말 살갑게 건네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일에도 그저 기분이 좋다. 오늘 점심에는 드라이 레드 와인 한 잔 하면 좋겠구먼! 미국 오리건주의 버터리한 그 피노누아, 아 간절하다! 오다가 점 찍어둔 이곳의 길거리 밥집 '껌 땀'의 돼지갈비 직화구이 덮밥 (최대한 고상하게 말하면 그렇다! 여기서는 껌 승이라 부른다, 구운 고기를 얹은 흰밥 그런 뜻이다, 물론 풀럭풀럭 날리는 안남미의 그 밥)과 함께 마셔도 좋으리라. 그런데 여기서는 그 와인을 구할 수가 없다, 오호통재라!
근처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살 곳은 어딘지, 게 국물의 국수 '분 지우'는 어느 집이 잘할 것 같은지, 집 가까운 곳 채식중심의 그나마 우아한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메뉴도 어제 이미 봐 두었고, 하루 종일 고기 굽는 흰 연기에 손님이 붐비는 껌 땀 집은 이미 찾아두었고. 도착 첫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의 늦은 오후 산책길에 뜻밖에 정말 맛있어 보이는 통닭구이집을 보았다. 그날 저녁을 위해 샀다, 반마리짜리밖에 없다, 아니면 50분 기다리란다.
와우, 명동의 오리구이 명가 신정의 오리구이보다 더 맛있다. 닭을 오리구이 하듯 그리 요리했다. 닭 자체도 풀어놓고 키운 닭이라 슬림하다. 양념을 바르며 계속 기름을 뺀다. 반마리가 사실 부족했다 그날 내게는. 하루 쉬었으니 오늘 저녁으로 또 먹을 것이다. 역시 와인이 생각난다!
몇 달만에 참으로 꿀잠을 잔다. 조용하다, 이 동네가 조용하고 이 집은 더욱 조용하다. 옛날 서울 집 내 침실만큼 그렇게 편안한 공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이제서야? 그동안 난 무엇을 한 것이지?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이것저것 지나갈 것이 다 지나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달콤함은 내게로 온다. 에이, 처음부터 그냥 직통으로 내게 달려올 것이지? 그건 도둑놈의 심보다. 그랬으면 아마도 지금의 것이 얼마나 내게 고맙고 소중한 것인지를 잘 모를 것이다.
신이나 섭리가, 아니면 스피노자의 그 대자연이 그냥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깊은 뜻이 여기 있다. 때가 되었기에, 그리고 그동안 잘 참고 이겨낸 내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이제 내게 주시는 것이다. 끝까지 안 주면 어쩔 것인데? 그저 준 것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그러니 지난 몇 달간의 그 소음과 그 돈과 수많은 불편함은 그 나름의 역할과 소용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늘 그리 해석한다. 그게 내게 좋다, 물론 여전히 나를 아끼는 다른 이들에게도 좋다. 언제나 이런 아전인수로 험한 이 세상을 살아낸다.
'껌'은 이곳 현지어로 쌀의 뜻이다. '땀'은 깨어진/부스러진 이런 의미다. 그러니까 부스러진 쌀로 지은 밥, 이것이 껌 땀이다. 옛날 이곳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이 어려웠던 시절 그때 먹던 추억의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런데 오늘 먹어보니 그 맛이 단지 추억만은 아니다. 길쭉한 이곳 쌀 (안남미/인디카)로 지은 식감과는 또 다른 묘한 맛이 있다. 마치 우리네 좁쌀이나 기장, 혹은 둥글둥글한 수수로 지은 밥을 먹는 느낌이다. 아는 분은 아실 것이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입안에 닿는 밥의 면적과 횟수가 기분 좋게 많다. 구강 이곳저곳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그 촉감. 아 이래서 이곳 사람들이 이런 밥을 즐기는구나! 밥의 표면적이 작으니 반찬과의 교감과 협동도 그만큼 좋다. 바로 반찬의 맛이 느껴진다.
직화로, 불이 난 듯한 흰 연기 속에 구워대던 문제의 그 돼지갈비. 어릴 적 어머니의 불고기 혹은 소갈비 양념의 맛이다. 단맛이 강하다 싶을 정도, 하지만 일본간장과 조선간장의 적절한 배합이 그 단맛과 짤떡궁합이다. 당연 불맛이 결정적인 피니시다. 우리네 돼지갈비보다 고기의 두께가 두껍다. 식감이 좋다. 마치 찢지 않은 소고기 장조림을 먹는 듣한 느낌도 난다. 한 덩이 더,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주인집 아저씨가 어찌 알고는 내가 좋아하는 아욱 혹은 근대 비슷한 채소로 방금 끓여낸 맑은 국을 한 그릇 가져다 주신다. 작은 새우를 달달 볶고 갈은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시원한 국이다. 점심에 먹으려던 양배추 맹물에 끓여낸 나의 섬유소 보충용 채소 요리는 뒤로 밀린다. 사람이 이렇다, 이사 때문에 요 며칠 못 먹어서 오늘 일부러 만든 것인데, 이리 찬밥 신세다.
그동안 대형 수퍼에서 사먹던 망고와 어제 이곳 길거리에서 사온 망고는 그 품종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수확 당시의 숙성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 아무튼 그 맛이 사뭇 다르다. 이곳 시장의 것이 훨씬 맛있다. 오늘 사온 미니 후지사과까지 그 맛을 뽐낸다. 이래저래 오늘 점심은 그야말로 만찬이었다. 좋았다!
갑자기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윌리엄 월튼 (Sir William Walton)의 화려함 가득한 칸타타 (이탈리아어 칸타레, 노래하다에서 유래한 음악 용어. 여러 악장으로 구성된 성악곡) '벨쉐저의 향연' (Belshazzar's Feast, 우리말로는 통상 벨사살의 향연)이 생각난다. 그 화려함, 그 장엄함이라니! 클래식 음악임에도 영국의 각종 현대적, 캐쥬얼한 소품 음악회에서 단골로 연주되는 이유다. 35분 가량 되는 이 곡은, 어떤 날 들으면 좀 시끄럽다는 느낌이, 또 어떤 날 듣다보면 사람의 목소리 코러스와 관악기 중심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물결이 마치 한여름 홍수처럼 그렇게 몰려오고, 모든 것을 싹 씻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혹시 이러저런 이유로 마음이 심란하실 때는 꼭 한번 그 음악을 들어보시라. 살짝 시끄러움 속에 가슴이 뻥 뜷리는 것을 경험하실 것이니.
일전에 다른 글에서 '두려움의 원인/우리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셨다. 나는 특히 두려움 속에 살아온 것 같다. 오죽하면 내 카톡의 커버 메시지가 'Fear fogs our vision' (두려움이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많은 가능성을 가로막는다)가 되었겠나?
손가락 굵기의 작은 쇠사슬에 한쪽 발이 묶여있는 서커스 공연단의 코끼리.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것 쉽게 끊어내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일까? 늘 그리 생각했다 나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고 그의 용기 없는 그 덩치를 힐난하기도 했다. 그냥 내가 화가 나는 때가 많았다. "왜 그리/저리/이리 사는 것인가?"
어느 순간 '그 또한 생각이 없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도 영물에 속하는 존재인데, 이미 그 정도 몇 자리 앞의 수는 다 읽어냈다. 그래서? 쉽게 끊고 달아난들? 어디로? 어디까지? 그래서 그 다음은?
그렇게, 영물인 코끼리는 그냥 지금처럼 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은 큰 차이 없을 그 뻔한 결론. 이렇게 있자, 그냥!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한번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해보지는 않았잖아? 그냥 머릿속으로 바둑 수읽기처럼 그리 한 것뿐? 그런데 이건 바둑과는 많이 다른 게임인 것을? 한번 해보시게, 내 친구! 최악은 그냥 지금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야. 사육사에게 다른 더 나쁜 수는 없어. 그에게도 서커스단에게도 자네는 이미 중요한 존재이거든!"
오늘 점심에 오리건주 버터리한 벨벳 느낌의 피노누아는 마시지 못했지만 내게는 참으로 신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두려움을 끊어내고 편도 40분 이상의 그 낯선 길을 갔다 왔다. 목적지에 안착했다. 새로운 먹거리들도 살 수 있었다. 구글의 도움은 없었다, 오직 나의 힘으로만. 물론 주위 사람들의 도움 속에.
묘한 쾌감과 함께 새로운 자신감 또한 새록새록 솟아난다. 베토픈의 성악곡 '안 디 페르네 게리브테' (To the distant beloved, 멀리 떨어져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를 들었다. 당연 사랑하는 내 아들 생각을 한다. 독일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르는 버전이다. 나긋나긋한 테너 페터 슈라이어의 그것과는 또 그 맛이 다르다.
베토픈의 음악은 결국은 우리에게 승리를 말한다. 그 승리가 산전수전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내고 얻은 것이라 더욱 그 의미가 크게 느껴진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그렇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런 아름다운 곡을? 그의 나이 46세 때, 참으로 많은 난관이 그에게 들이 닦친 그때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에는 승리한다, 그리고 이런 명곡을 세상에 주었다.
오늘의 시를 본다. 철학자 시인의 시다.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결국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우리 소심한 범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시작을 한다.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단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더구먼요' 하고 토를 다는 나지만, 그래도 큰 그림에서 동의는 한다. 일단 리포트를 내면, 내고 나면 F를 주는 일은 별로 없다고. 안 내면? 기다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일단은 마음을 먹을 것, 그리고는 만물의 귀로 듣고 만물이 눈으로 볼 것, 시인은 우리에게 살짝 이런 추가적인 팁을 준다. 그리되면 저 아득한 옛날, 그 태고적 마음도 돌아보게 되고 아직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내 마음과 나의 눈, 그리고 내 영혼에는 벌써 동이 터 오른다면서.
오전 내내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뜨거운 햇빛이 오히려 낯설게 그 존재감을 자랑하더니, 웬걸 갑자기 다시 비가 내린다. 이곳의 하루 날씨가 이렇다. 그러고 보면 나 먼 길 잘 갔다 오라고 자연이 나를 응원한 것이다. 고마운 자연, 크게 감사해야 할 신과 섭리와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그 대자연!
"어이 임자, 해봤어?" '네, 해봤습니다. 그래서 손에 넣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씀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