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지는 정했는데, 목적지는 아직이야
관광버스 예약을 받다 보면 간혹 이런 전화를 받는다.
"출발일은 확정인데요, 목적지는 아직 고민 중이에요."
이 말은 일정을 시작해 놓고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버스를 예약한다니.
그런데 해를 거듭하며 알게 되었다.
이런 여행은 생각보다 많고 그 안에는 단순한 '미정'이 아니라 '함께 정해 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는 걸.
여행당일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된다.
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슬쩍 묻는다.
"여수로 갈까요, 삼천포로 갈까요?"
그제야 누군가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는다.
총무 또는 회장, 아니면 말 잘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이후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바다가 좋다는 이, 산이 끌린다는 이, 새로 생긴 출렁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이까지.
각자의 욕망이, 기억이, 취향이, 그날의 기분이 버스 안에서 부딪친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이번엔 식사 메뉴다.
한정식이냐, 장어냐, 회냐.
유람선을 탈지, 케이블카를 탈지,
식당에 들어갈지, 도시락을 깔지.
무계획의 여행은 번거롭다.
계획이 없는 만큼 의견이 많고 누구 하나 확신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결국엔 간다.
어딘가로. 어찌어찌.
때로는 투덜대면서, 때로는 양보하면서
그리고 어느 순간엔 그냥 웃으며.
이런 날 가장 고생하는 건 운전기사다.
노련한 기사는 조용히 경청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추천은 하되 결정은 하지 않는다.
운전대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의 작은 드라마를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
그러고 보면 관광버스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다.
목적지가 같아도 그 안의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하루를 함께 보낸다.
어쩌면 관광버스 여행의 본질은 이동이 아니라 조율일지도 모른다.
결정되지 않은 여정을 함께 고민하고, 갈등하고, 웃고, 결국은 도착하는 그 과정.
그 여정 속엔 누군가의 고집도, 양보도, 침묵도 들어 있다.
누군가는 불편을 감수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아본다.
그렇게 한 대의 버스는 그날 그 사람들만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런 여행이 좋다.
계획보다 감정이 앞서는 여정.
목적지가 아니라 마음으로 흘러가는 길.
그날 그들이 정한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는 사실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 버스 안에서 오갔던 말들, 주고받은 눈빛, 타협과 침묵,
그리고 마지막에 울려 퍼진 노래 한 곡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관광버스를 좋아한다.
매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싣고 어딘가로 향하는 관광버스는 출발지는 분명한데 목적지는 늘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까
이건 여행이 아니라 하나의 드라마다.
오늘의 출연진은 누구일까.
나는 조용히 예약내용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