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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l 10. 2021

제5화 새벽배송의 A to Z

결국은 냉장고 비우기로 돌아간 새벽배송 중독자 이야기

"언니, 일단 마켓XX, XX네이처, 오아XX 이 세 개 앱은 다 깔아야 해. 세 개 다 장점이 달라서 돌아가면서 써줘야 하거든."

"난 아직 괜찮은데? 동네 슈퍼가 일층이라서 필요한 것만 사오면 돼. 배달보다 더 싸지 않을까?"


입주하고 한두 달 동안은 카레, 제육볶음, 된장국, 샌드위치를 돌아가면서 먹었다. 이 메뉴를 위해 슈퍼에서 사야 할 아이템은 단출했다. 감자, 양파, 당근, 돼지고기, 계란만 있으면 계속해서 먹을 수 있었다. 샌드위치 속으로는 감자와 계란을 삶아서 마요네즈에 범벅해서 넣었다.


"언니가 코스트코 가서 대량으로 사는 것도 아닌데, 새벽배송이 더 쌀 걸, 한 번 들어가 보기나 하라니까?"


라고 하길래, 들어가서 봤더니 정말 더 쌌다! 감자도 당근도 양파도 마켓XX에서는 동네 슈퍼의 반절 가격이었다. 나홀로 아파트 1층에 자리한 슈퍼라서 고객이 많지 않다 보니 박리다매를 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야채가 비쌀 줄이야. 앱에 들어가서 본 시점이, 이미 한껏 장을 봐 둔 상태라서 아쉬워하며 마켓 XX에 당장 가입했다.



일단, 첫 구매라 혜택이 많았다. 그래서, 동네슈퍼보다 싼 사과와 감자, 본가에 살 때도 늘 구비해두었던 스파게티 소스 폰타나와 스파게티 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나서 둘러보니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자취하면 꼭 먹어보리라고 생각했던 상품들을 보며 스크롤을 몇 번이고 내렸다.



놀러 가면 친구가 늘 내주던 미미네 떡볶이를 2 봉지 우선 구매했다. 나도 이제 친구가 놀러오면 미미네 떡볶이를 내줄 수 있었다. 잼이나 소스도 모두 특별해 보였다. 이날 프랑스 산딸기 잼인가를 구입하고, 언젠가 사보리라 생각했던 바질페스토까지 구입했다.



배송을 받았을 땐, 잼을 보고 일단 황당했다. 만원에 가까운 잼은 주먹을 쥐어서 손에 들어오는 크기였다. 속았다는 생각에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처음부터 100그램이라고 적혀 있었다. 온라인으로 익숙지 않은 식품을 구매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무게에 대한 현실적 감각이 없던 탓이었다.

잼이 너무 작아 실패한 내 첫 새벽배송



지금은 500그램이면 양파는 두 개, 작은 당근이나 토마토는 세 개 정도라고 느낌을 알지만 이때는 이런 단위를 온라인으로 보는 게 익숙지 않았다. 갑자기 살림을 책임지며 민감해져 있던 터라 충격을 받긴 했지만, 첫구매 혜택으로 받은 척아이롤 600그램을 위안 삼고 넘겼다. 스파게티면도 늘 슈퍼에서 고르던 게 아니라 마켓XX에서 처음 본 유기농 통밀을 사보았는데, 무척 맛없어서 실망했다.



이날 쇼핑에서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건, 바질페스토였다. 바질페스토를 처음 먹었을 때 그 강렬한 풍미에 놀라면서 발을 굴렀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발을 구른 때는 몇 번 더 있지만. 바질페스토의 풀 맛은 인상이 남을 정도였다. 영국의 미술관 식당에서 케일페스토만 발라져 있는 차가운 펜네를 먹을 때 느꼈던 단출하면서도 강렬한 맛이 그대로 떠올랐다.



본가에서 살 때 주방과 요리는 어머니의 영역이었다. 나도 주말이면 장을 봐와서 스테이크나 스파게티를 했고, 평일 아침에 먹으려고 구운 계란을 사두기도 했고, 다이어트를 할 땐 건두부를 몇 킬로씩 쟁여두었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이국 음식으로 찬장을 채웠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어떤 걸 먹어야 할지, 새로운 걸 시도해볼지 고민하는 일은 없었다. 독립 후 나 혼자 내 식사를 책임지게 되자 그때부터 행복한 고민과 누가 시키지도 않은 노동이 자발적으로 따라왔다.



새벽배송 앱에는 그간 슈퍼에서 지나쳤거나,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식재료들이 있었다. 자취 전에는 사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다양한 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제품을 좋아해서 동네슈퍼에서 다농 요거트 40개를 한꺼번에 사두고 먹기도 했지만, 새벽배송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워크림, 무가당 요거트, 크림치즈, 브라타 치즈, 영준 목장의 구워 먹는 치즈까지 살 수 있었다.



 시리얼도 여러 가지 시도했다. 스웨덴 브랜드 뮤즐리가 가장 맛있었고, 그래놀라도 섞어먹으면 맛있었다. 그래놀라 역시 스웨덴 브랜드가 맛있었는데 뮤즐리는 무가당 요거트에 그래놀라는 두유에 넣어먹었다. 아일랜드 유명한 오트밀 역시 하나 쟁여놓았다.



가장 즐거운 건 소스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본가에도 내가 사둔 굴소스가 남아있겠지만, 부모님과 살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적극적으로 소스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동네 슈퍼에서도 마요네즈와 케첩, 간장 정도는 구입해두었지만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는 소스들은 모두 새로운 요리를 위한 이국적인 소스였다. 동남아 요리를 위한 땅콩버터, 피시소스와 코코넛 밀크, 중국식 요리를 위한 두반장과 굴소스, 다이어트 용 스리라차 소스, 어디에나 필요한 레몬농축액, 그라인더가 달린 후추와 페페론치노까지 사야 할 소스는 무궁무진했다.



코로나 이후 제대로 밖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 쌓인 식탐을 새벽배송 앱들을 탐구하면서 풀기라도 하는 듯 온라인 쇼핑에 몰두했다. 동료의 조언대로 세 개의 앱 모두 장점이 달랐다. 마켓XX는 인지도가 가장 높은 브랜드답게 모든 상품을 구비하고 있었지만, 쿠폰 발송 빈도가 낮았다. XX네이처는 매주 꼭꼭 쿠폰을 발송해주기에 대부분의 상품은 여기서 주문했다. 오아XX는 질 좋고 믿을 수 있는 야채와 계란, 고기를 사기 위해 이용했다. 결국은 XX네이처와 오아XX를 번갈아 이용하고 마켓XX에서는 쿠폰이 올 때마다 들어가주서 결제해주는 패턴이었다.



밤이면 잠들기 전 상품 설명을 읽으며 자고 장바구니를 업데이트해두고, 낮에 쿠폰이 문자메세지로 오면 결제했다. 처음엔 동네슈퍼로 충분한 줄 알았던 내가 일주일 두 번 새벽배송을 주문하고 있었다. 이런 패턴은 세 개의 앱을 소개해준 동료도 비슷했는데, 이 친구 역시 나처럼 외식과 배달 없이 모든 끼니를 직접 만들어먹는 친구였기에 소비가 가능했다.



그런데, 진짜 소비가 가능했을까?



사도사도 사보고 싶은 건 많았다. 연어, 삼치, 고등어, 오징어가 얼린 채로 냉동고로 들어가고 평소 회식 때 많이 먹던 항정살, 부챗살, 차돌박이도 그 위에 쌓였다. 그동안 먹어보고 싶었던 걸 산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러다 일이 바빠져서 장바구니를 채우지 못한 날, 문자메시지로 배달 온 쿠폰이 아까워 쌀 4킬로와 김치 4킬로도 주문했다. 그 정도는 채워야 4만 원 이상 구매 시 1만 원 할인 쿠폰을 쓸 수 있었고, 배송비도 무료였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출근 전 배송 온 김치를 비닐봉지에서 꺼내 미리 씻어둔 통에 담기 위해서였다. 4킬로 김치는 생각보다 많았다. 이제 냉장고엔 우유 하나를 넣기 위해선 두유 하나를 빼야 할 정도로 꽉 차 있었다. 냉동고는 이미 포화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냉장고 비우기부터 해야겠다...'



결심은 했지만, 오는 쿠폰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먹고 싶었던 비싼 열대과일을 주문한 후 정말로 새벽배송을 한 달간 독하게 끊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쌓아온 냉장고 안에 주목했다.



정확히는 냉장고 안 음식물들의 유통기한을 살폈다. 다행히 크림치즈는 유통기한이 일 년에 가까웠지만 구워 먹는 치즈는 유통기한이 매우 짧아 이미 지나있었다. 조그마한 게 구천 원이나 하는 호사스러운 치즈라 아까운 마음에 얼른 구워버리고 반절은 먹고 반절은 냉동실에 넣었다.


기름을 안넣어도 기름기 줄줄 흘러나오는 구워먹는 치즈. 유통기한이 지나서 구워서 냉동에 넣었다. 조리하면 유통기한이 다시 셋업된다고 믿고있다.



냉동실은 더 가관이었다. 그동안 다양한 고기와 생선을 샀음에도, 대부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나는 2~3월에는 매주 생닭을 조리해 먹었고, 그 이후에는 한돈을 사서 채소, 두부, 카레에 넣어 먹고 있었다. 습관처럼 익숙한 요리법만 택하다 보니, 오징어 외 10가지 종류의 살들은 냉동실에서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목적으로나 존재하고 있었다.



이 날부터 새로운 재료를 꺼내 요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냉동닭가슴살을 꺼내 단호박에 볶았다. 얼렸던 명란을 꺼내 파스타도 만들었다. 조금이나마 냉동실에 여유가 생기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냉동실 닭가슴살과 명란을 꺼내 만든 요리. 둘다 유통기한이 한참지나있었지만 냉장시 유통기한이니 괜찮다고 믿고있다


사실 결심을 한 뒤로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새벽배송을 자제하고 나서는 야채를 사기 위해 망원시장을 자주  찾는다. 무료배송을 위해 더 채워사야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가장 저렴하게 야채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야채를 업그레이드하고 나니 사놓고 뜯지 않은 재료들이 보인다. 라이스페이퍼와 피시소스를 꺼내면 금방 월남쌈을 만들 수 있다.


냉장고를 비우겠다는 의지 덕에 피시소스와 라이스페이퍼를 산지 사개월만에 개봉했다.


이러다가도 너무 더워서 야채를 지고 집까지 오기 어려워지면 바로 새벽배송을 이용할 거다. 코로나가 가시고 가족이나 친구가 놀러 오기로 하면 미리 장바구니를 채워두고 쿠폰이 오기를 기다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도 냉장고엔 노르웨이에서 온 연어와 아르헨티나에서 온 새우가 꽁꽁 얼어있으니, 오늘은 마켓XX 대신 브런치를 보다 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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