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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로션이 있다면 좋겠어

매일 바르고 다니게

by 오분레터

쉬는 금요일. 노조 창립일이다. 정작 나는 노조가 아니다. 그래도 얻어걸린 휴일은 고맙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 나는 뛰러 나왔다. 괜히 여유 부리는 척, 평소보다 길게 뛰었다. 뛸수록 숨이 가쁘고 무릎이 욱신거렸다. 얼마 전 내가 무릎이 아프다고 썼던 글에, 한 스치니가 장문의 조언을 남겨줬다. 보폭을 줄여보라고. 무릎은 관절이라며. 그 글이, 괜히 좀 뭉클했다. 나, 누군가한테 조언받을 만한 사람인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오늘은 그 조언대로 뛰어봤다. 15km. 땀범벅이 된 채 너덜너덜 집에 들어왔다.



운동복을 빨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 10번째 헌혈 예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을 지키는 일은 마음을 덜 구질구질하게 해준다. 책 한 권을 들고 710번 시내버스에 올랐다. 헌혈의 집까지는 1시간 거리.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요함이다. 여기는 그냥 일상이 한가하다. 그게 이 동네의 작은 사치다.



도착한 헌혈의 집은 더 한산했다. 직원 외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친절했다. 직업 특성 때문인지, 어쩜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지 궁금했다. 교육을 받은 건가, 아니면 종교적인 깨달음이라도 얻은 걸까. 그 교육, 나도 한번 받아보고 싶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곱다 못해 극세사 뺨칠 정도였다. 오는 말이 고우니 나도 자연스레 말투가 달라졌다. 이런 나의 가식, 사실 소름 돋았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듯, 이쁜 말에는 더욱 뱉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하더라도 나 또한 이쁘게 가기로 했다.



어제는 낯선 젊은 남자 직원이 있었다. 나이는 꽤 어렸지만, 친절은 노숙한 부처급이었다. 방문자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친절을 몸에 가득 바른 듯했다. 친절 로션이라도 있는 걸까. 어디서 구할 수 있다면 매일 아침 덕지덕지 바르고 싶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도, 직업도, 연봉도, 여자친구도, 결혼 여부도, 집도. 하지만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을 거라고.



친절한 사람은 완벽한 이기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진짜 그렇다. 친절은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거다. 말 한마디 곱게 했다고 기분 좋아지는 건 내가 먼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고 보면 본인의 행복을 위해 친절한 거다. 올커니~! 오늘은 나도 한번 완벽한 이기주의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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