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말없이 걷고 싶을 때

by 오월

어떤 날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걷고 싶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딘가 멋진 곳에 도착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말없이 걷고 싶은 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날의 걸음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단순히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예쁘게 꾸며진 산책로를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여줄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머릿속의 복잡함을 잠시 떼어내고 싶어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안에서

나를 잃어버린 듯,

혹은 다시 찾는 듯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왜 걷는 거야?”

“어디 가는 길이야?”

라고 묻는다.


하지만 걷고 싶은 날에는

그 질문들이 모두

조금 귀찮게 느껴진다.

걸음을 멈추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걷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몸이 알고 있다.

걸어야 한다는 걸.

움직여야 한다는 걸.

정해진 말 속에 마음을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그냥 걷는 시간 속에서

내가 조금은 안전해진다는 걸.


마음이 말없이 걷고 싶을 때는

대부분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 담아 놓았을 때다.


말로 풀어내기엔 복잡하고,

누구에게 설명하기엔 어딘가 모호하고,

이유를 정확히 붙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얽혀 있을 때.


그때 나는 말이 아닌

‘걸음’을 선택한다.


걷다 보면

감정이 몸의 리듬에 실려

조금씩 아래로 내려온다.

머리로만 견디고 있었던 것들이

발끝으로, 바닥으로 천천히 스며들어간다.

그 과정이

이유를 붙일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걷는 동안,

세상은 말없이 나를 받아준다.


가로수 아래로 떨어진 잎들이

내 발걸음을 대신 위로하고,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나 대신 생각을 정리해준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거리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 순간만큼은

누가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의 리듬을 따라갈 필요도 없다.


걷는다는 건

잠시라도 내 마음의 속도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어떤 날은 길게 걷는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발이 멈추라고 말할 때까지.


그런 날엔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먼 자동차의 소음보다

내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톡, 톡, 톡.’

그 단순한 반복이

마음 안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준다.


어떤 날은 짧게 걷는다.

집 근처 편의점까지,

혹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정도로.

그런 짧은 걸음만으로도

“그래, 괜찮다”는 마음이

조금은 다시 살아난다.


걷는다는 것은

멀리 가는 일보다

내 안으로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걷는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그때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걷는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아.

하지만 걷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조금 달라져.”


달라지는 건 세상이 아니라

그 세계를 바라보는 ‘나’다.

복잡했던 일이 단순해지고,

어둡게 보이던 것이 조금은 밝아지고,

꼬여 있던 마음이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고 느껴질 만큼

부드러워진다.


말없이 걷고 싶은 날은

내 마음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다.

“지금은 말보다 걸음이 필요해.”

“지금은 설명보다 호흡이 중요해.”

“지금은 어딘가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움직이면 돼.”


그 신호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걷는 일을

더 이상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걷는 것은

내가 나를 돌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걸음을 멈춘 뒤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늘 이렇게 느낀다.


“조금 나아졌어.”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상처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

다시 나를 붙잡아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내 곁으로 돌아온 느낌.


그것이면 충분하다.

삶은 가끔

그 정도만 있어도

버틸 힘이 생기니까.


그래서 나는

마음이 말없이 걷고 싶을 때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걷는다.

나를 지나가는 바람과

나를 스치는 저녁 햇살과

내 발을 받쳐주는 길을 믿으며

천천히, 천천히 걸어간다.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나에게 조금씩 돌아온다.

그리고 그 돌아옴이

내일을 버티게 할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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