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떠올려 보면
늘 비슷한 풍경들로 채워져 있다.
침대를 정리하고,
컵에 물을 따르고,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버려야 할 쓰레기를 모아 문 옆에 놓고,
휴대폰 배터리를 확인하고,
가방 안에 필요한 물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들.
이렇게 적어보면 참 별거 없다.
누가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끝냈다고 누가 박수를 쳐주는 일도 아니다.
하루 안에 수없이 반복되지만
기억에는 거의 남지 않는 일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대개
‘하찮다’고 부른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찮기만 한 걸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순간들 속에
내 삶을 지탱해주는 다정함이
조용히 숨어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야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이부자리를 대충이라도 정리하고 나면
집 안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그 작은 정리가
마음 한쪽을 약간은 곧게 세워준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그 몇 초 동안,
나는 내 몸이 필요한 것을 챙기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눈부신 건강 습관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지만,
그건 분명히 나를 살게 하는 일이다.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텐데 뭐.’
‘오늘 안 버려도 되는데.’
이렇게 넘길 수 있는 일들을
굳이 해내는 나를 보면
어쩐지 조금 대견해진다.
그건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다.
그냥, 내가 나를 위해 해주는 일이다.
살다 보면
‘뜻깊은 순간’이나
‘큰 사건’을 찾느라
이런 하찮은 일들을 가볍게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지키는 건
거창한 다짐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반복이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려고 애쓰는 것,
피곤해도 씻고 자려고 노력하는 것,
마음이 복잡해도 밥은 챙겨 먹으려는 것,
출근 전 잠깐이라도 창밖을 한 번 바라보는 것.
이 모든 게 다,
지극히 사소하고,
지극히 하찮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늘의 나를 끝까지 데려가려는 마음’이 들어 있다.
누군가를 떠올려도 그렇다.
과제를 대신 해주거나,
큰 도움을 준 사람만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남는 건 아니다.
피곤해 보이는 날
“괜찮아?”라고 한마디 물어봐 주던 친구,
힘들어 보인다고 따뜻한 음료를 쥐여주던 동료,
별말 없이 집 앞까지 함께 걸어주던 사람.
그들이 해준 일들은
사실 말하자면 대단한 행동이 아니다.
돈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많이 빼앗긴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들도 잊어버렸을 작은 장면이
나에게는 오래도록 남아
마음속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하찮은 행동들로 이루어진 다정함이
결국 한 사람을 버티게 만든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크게 돕지 못하더라도,
멋진 말을 해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하루 중
아주 잠깐이라도 부드러운 공기를 만들어주는 사람.
말끝에 “천천히 해도 괜찮아”라고
가볍게 덧붙여줄 수 있는 사람,
힘들다는 말을 꺼냈을 때
조언보다 먼저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게 전부,
누군가의 삶에서는
결코 하찮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하찮다’는 말은
우리가 그 가치를 아직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쓰레기를 버리는 일,
머그컵을 씻어두는 일,
오늘 해야 할 일을 작은 메모지에 적어보는 일,
내일 입고 나갈 옷을 의자 위에 미리 걸어두는 일.
이 모든 걸
‘귀찮지만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면
그 순간들은 영원히 하찮은 채로 남는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바꿔 보면
이건 모두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고,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나는 내 삶을 조용히 지탱하고 있다.
그건 분명
다정한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의 관리자가 되어 살아간다.
누가 대신 정리해주지 않는 책상처럼,
누가 대신 씻어주지 않는 그릇처럼,
내 삶 역시 내가 돌보지 않으면
금세 어지럽혀진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해낸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일들’을
가끔은 스스로 기억해줄 필요가 있다.
오늘 설거지를 한 사람,
오늘 쓰레기봉투를 묶어 문 앞에 내놓은 사람,
오늘 하던 일을 멈추고 방을 한 번 쓱 정리한 사람,
오늘 지친 몸을 이끌고도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든 사람.
그 사람은,
조금 수고한 사람이다.
조금 다정한 사람이다.
조금 더 나를 지키려 애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조금’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생각에 닿고 나서부터
나는 하루의 끝에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기로 했다.
“오늘 하찮은 일들을 많이 해냈네.
그래도 잘 버텼다.”
하찮은 일을 견디는 힘은
사실, 살아갈 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
박수도 없는 자리에서
묵묵히 반복을 감당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자신과 삶을 향해
충분히 다정한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위로는
아주 거창한 곳에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오늘도 반복된 하찮은 일들 속에서
나는 나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더 견딜 만해진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조용히 이렇게 말해 줄지도 모른다.
“네가 했던 그 별것 아닌 줄 알았던 일들,
사실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어.”
그 말 한마디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내일의 하찮은 일들을
조금 더 다정한 마음으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