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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희 Sep 03. 2022

상실, 그 이전에

스타벅스에 앉아 이런저런 마음을 써 내려가는데, 마스크 속으로 뚝뚝 흐르는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다.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던가. 이러려고 시작한 글이 아닌데.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친한 작가 언니에게 울며 전화를 걸었다. 쓰는 게 너무 힘이 든다고.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숨쉬기가 힘들 만큼 눈물이 난다고. 언니는, 지금 네가 쓰는 이야기는 당연히 쓰기 힘든 이야기라며, 지금까지 써낸 것도 대단한 거라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해도 괜찮다며 다음과 같은 위로를 건네 왔다.  

너에게는 6주 만의 유산이었지만 쿠앤크에게는 전 생애였을 수 있어. 비록 세상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네 품 안에서 따뜻하게 있다 갔을 거야. 너희 어머니가 너로 인해 걱정하지 않길 바랐던 너의 마음처럼, 쿠앤크도 네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길 바라지 않을 거야. 쿠앤크에겐 네가 엄마니까.

쿠앤크로 인해 기뻤던 시간들을 기억해봐. 유산의 아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 쿠앤크로 인해 기뻤던 시간들이 있었잖아. 생명이 주는 기쁨, 그 축복 같은 시간들을 떠올려봐. 비록 유산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너희 가정에 생명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쿠앤크가 너희 가정에 남긴 기억이, 유산으로 인한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들만 있지는 않을 거야. 그보다 먼저 축복과 기쁨이 있었지.

도와달라고 내민 손을 잡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때마다 언니는 나를 따뜻한 벽난로 앞으로 데려가 담요를 덮어주고 따뜻한 코코아를 건네주는 것 같다. 그런 언니의 위로에 불이 탁 하고 켜지듯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상실’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려면 상실한 대상이라는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가졌었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들이 떠났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집중하려 한다. 반려견이라는 말보다는 우리집 막내라는 표현이 더 걸맞는 장군이가 무려 16년이나 장수하며 내 곁에 있어주었고, 장군이와 바통 터치하듯 우리 가정에 찾아와 기쁨과 위로를 주었던 작디작은 생명 쿠앤크가 우리 품에 있었다.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감사함의 무게를 깊이 묵상하고 싶다. 내게 이미 허락되었던 많은 것들에 시선을 맞추며, 그 기쁨을 오래오래 기억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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