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이 필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워라밸을 지키기 위한 나만의 생각 지우기 방법

by 오월
"재택근무라 워라밸이 보장됩니다."


-는 말이 종종 보이거나 들릴 때가 있다. 재택근무자로서 이 말은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의 줄임말인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재택근무가 워라밸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나에게 재택근무란 일과 삶의 양보 없는 공존이기 때문이다.


업무 공간과 삶의 공간이 일치한다는 것은 업무 시간에도 삶의 영역이 침투하고, 내 자유시간에도 업무가 뒤쫓아온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첫 몇 달간은 업무 이외의 시간에는 내 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다.


공간에는 기억이 스며든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나만의 공간이자, 업무 공간이 되어버린 내 방에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수한 에피소드가 새겨졌다. 기억하고 싶은 에피소드만 있으면 좋으련만, 괴로운 기억들도 상당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재택근무라는 장기전과 타협하거나, 맞서거나, 어찌 됐건 그 기간을 견뎌내기 위한 나만의 생존전략은 필수이다.




"아, 모르겠다. 뛰고 보자."

약 한 달 전, 나는 업무를 하며 실수를 저질렀다. 아주 기본적인 실수라 너무 창피했고, 스스로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회사의 이익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실수는 아니지만, 나와 우리 팀을 향한 신뢰도 하락에는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였다.


'내가 왜 그랬을까...', 실수를 지나쳤던 상황을 머릿속에서 비디오를 되감듯 회상해 보았다. 당시 나는, 예상치 못하게 들이닥친 다른 업무들 때문에 내 작업의 우선순위는 잠시 양보한 채 급한 업무에 집중했었다. 다시 내 업무로 돌아왔을 땐 나의 판단력과 집중력은 흐트러져 있었다. 당시에도 이를 느꼈지만, 별일 없겠거니 하고 지나쳤던 게 화근이었다.


이 모든 파노라마의 배경은 언제나 내 방이 되었다. 조촐한 내 컴퓨터용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순간, 마우스를 클릭하며 내 작업물이 내 손을 떠나버렸던 순간, 조용하게 연락해 내 작업의 오류를 알려주었던 동료의 메시지...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와 내 방 곳곳에 전시되었다. 떨쳐버리기 어려운 기억들이었고, 내 방에 있을수록 상기되었다.


이 불편한 감정에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그만 나 혼자 찌질 대고 싶었다. 옷방으로 가 주섬주섬 운동복을 껴입었다. "아, 모르겠다. 일단 뛰고 보자."




우리 동네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탄천이 있다. 이 탄천을 따라 아파트 단지도 형성되어 있고, 지하철 노선도 나란히 위치해 있다. 나는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탄천의 산책로를 따라 뛰었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저 먼 아파트 단지를 보며 뛰었다.


얼굴이 저릿할 만큼 차가웠던 밤공기가 내 몸의 열기와 만나 더 이상 차갑지 않았고, 운동복에 조금씩 땀이 스며드는 걸 느끼니 기분이 상쾌했다. 편도 4km를 뛰면서 나는 내 방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고, 울적한 기분도 옅어졌다. 내 몸속 아드레날린이 내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 둘 다른 것들로 대체해 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4km의 길, 내 마음은 참으로 고요했다. 그제야 건조한 수풀이 웅장하게 둘러싼 탄천의 야경이 보였고, 저 멀리 아직도 야근을 하는 빌딩 속 근로자들의 뒷모습도 언뜻언뜻 보였다. 비로소 지금의 발걸음에 집중하고 있는 현실의 나로 돌아온 것이다.


1:1 영어 수업 때 내가 종종 조깅을 하는 이유는 '복잡한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이를 '클렌징(Cleansing)'이라고 명쾌하고 심플하게 표현했다.


그렇다. 나는 조깅을 통해 내 마음속 불편함을 클렌징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고 있다. 나에게 조깅은 워라밸을 지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생존전략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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