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없는 스릴러

by 꿈꾸는오월

“다래끼인가?”

씻고 나서 거울에 비친 눈이 이상하다.

빨갛게 부푼 왼쪽 눈가. 이러다 말겠지, 혹은 더 심해지면 안과에 가야겠다고 K는 생각했다. 다음 날은 신년 맞이 점심 회식이 있는지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다. 더 이상 눈을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빨리 자야 한다는 생각뿐. K는 그저 무심히 넘기고 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회사 어르신들은 ‘MZ 같은 회식’를 표방하며 점심 회식을 열었다. 하하 호호, 사회적 식사가 끝난 직후부터, K의 눈은 다시 붓기 시작했다. 목에도 붉게 오른 발진이 목걸이처럼 걸렸다. 급히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갔다. 동네의 나이든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항히스타민제 반 알만 처방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약을 보며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약은 듣지 않았다.


한밤중부터 K의 눈두덩이는 벌에 쏘인 듯 부풀어 올랐다. 목부터 얼굴 전체는 발진으로 뒤덮였다. 새벽에 때려 넣은 약도 소용없었다. 따가움과 가려움에 밤을 새운 후에야, 큰 병원으로 향했다. 동네 피부과가 최소한의 약과 자연치유를 지향한다는 오래된 소문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병원을 바꿔도, 약을 바꾸어도 차도는 없었다. 종합병원에서의 진료, 120여 가지의 알레르기 항원 검사도 받았다.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고 한약을 먹어봤지만, 차도는 없었다. 스테로이드 약을 줄이면 발진은 그대로 다시 올라왔다. 결국 면역 질환 검사까지 한 후에 알게 된 건 하나, 면역이 위험 경계에 있다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면역 저하로 인한 원인 불명의 알레르기. 그것이 K가 받은 병명이었다. 그저 스테로이드 치료와 면역 주사를 계속 맞아야 한다는 처방만이 남았다. 겨울과 봄, 여름의 초입까지, 때 되면 약을 먹고, 병원을 찾아 주사를 맞고, 또 약을 먹었다.


현대의학이 찾지 못하는 원인.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믿어온 K의 지론에 완벽하게 상충하는 것이었다. K는 스스로 그 답을 찾고자 마음먹었다. 생활 습관, 식습관을 바꿔보고, 집안의 온갖 섬유 직물들을 다 꺼내 삶았다. 집 먼지에 좋다는 피톤치드 99.9% 스프레이를 침대, 커튼, 옷 모든 섬유에 뿌려댔다. 도심 속의 아파트에서 제주의 산림욕 향이 날 정도로. 세제, 샴푸와 같은 화학제품도 교체했다. 식습관까지 바꿔봤지만, 약 없이 발진을 잠재우기란 불가능했다.


달리 바꿀 환경적 요인이 없을 때쯤, K는 심리적 원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니까. K의 직장 동료들은 회사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단정 지은 지 오래였기도 했다. 그러나 K는 그 추리에 아무래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회사 전체, 국내외를 막론하고 본인보다 일 잘하는 사람은 없다는 만년 부장 밑에서도 그럭저럭 적응한 터였다. 부장이 시키는대로 보고서 내용보다는 실선의 색깔을 파랑에서 노랑, 다시 파랑으로 바꾸는 것, 폰트는 9에서 9.5 정도로 조정하는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트레스란 언제 어디서 올 지 모르지만, 무조건 오는 무언가였으니까.


원인 찾기를 거의 포기할 무렵, K는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사람 만나기도 어려웠을 때라 반가움이 컸다. 그중 P가 ‘용한 보살’ 이야기를 꺼냈다. 다니는 요가원의 원장이 조언을 구한다는, 대구에 있는 재야의 고수라면서. “너도 한 번 연락해 봐. 이 사람 진짜 유명하대. 서울서도 온다더라.” 지방에선, ‘서울에서도 온다’라는 것은 상당한 공신력을 지니는 말이었다. K는 연락처를 받고도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궁금했다. 오리무중의 상황에서, 그냥 들어나 보자는 마음에 고심 끝에 전화 상담을 예약했다.


“이런 거 안 믿으면서 왜 전화를 했어?”

K는 순간 멈칫했다. 왜 전화를 했는지도,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대면 한번 없이, 생년월일의 숫자만으로 K의 가족사와 인생사 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맞나’하는 생각과, ‘그럴싸하게 말하는 거겠지’하는 의심은 여전했다.


“올해 날 삼재야. 그래서 힘든 거야.”

삼재 3년의 마지막 한 해라 유난히 더 힘들다고 했다. 그녀는 여름이 지나면 괜찮아지고, 운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희망적인 말도 잊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삼재도 끝은 온다. 하반기만 지나면 돼.”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이유 모를 원인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의외로 마음을 가볍게 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겪는다는 말에도 단순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이후, K는 문득 집 안을 다시 정리하고 싶어졌다. 전처럼 먼지를 박멸하기 위해서가 아닌, 다가올 계절을 조금 다른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청소하다 서랍을 열었는데, 올해 초에 썼던 구겨진 일기가 나왔다. 그 안에는 미뤄둔 목표와 ‘언젠가’라고만 적어둔 계획들이 가득했다. K는 알레르기의 원인도 찾지 못했으니, 목표의 이유도 따지지 않고 하나씩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사소하지만, 분명한 움직임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여름의 초입에서, 신기하게도 발진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상은 그대로였고, 습관도 끈질기게 관성적이었는데도. 어느 순간 약도 끊었다. 그게 진짜 삼재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약이었는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다. 다만 알레르기와 함께 사라진 건, 원인을 꼭 찾아야 한다는 집착이었다.


매미가 우는 여름의 한가운데, K는 올해가 꼭 힘 빠진 스릴러 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반전도, 결정적 단서도 하나 없이, 그저 시간의 흐름만으로 끝나버린 이야기. 반년씩이나 괴롭히던 발진의 그 촉감과 통각은 시간에 녹아 사라졌다.


K는 잠시 눈을 감았다. 세상에 이유 모를 일도 때때로 일어난다는 생각에. 원인을 찾지 않아도,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또 사라질 일들은 사라진다. 늘 모든 것에 원인과 결과의 이름표를 붙이던 습관이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삶도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채로 나아지는 날이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답을 찾는 것보다, 모르는 채 시간을 건너는 일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K는 알았다.

반전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K는 다시 시작점에 서 있었다.

이전 16화이기적 오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