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그림책부터 시작하자면, 30년은 족히 된 독자였다. 게다가 꽤 성실했다. 한 권의 책을 표지부터 표지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다음 책을 펴는 것은 언제나 꼬박 다 읽은 후였다. 동시에 여러 책을 기웃거리는 병렬 독서는 머릿속에 책들의 내용을 혼탁하게 만들 것 같은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책을 신격화했던, 신실한 독자였다. 열성적인 신자였던 그는 책에 메모를 휘갈겨 쓰거나, 혹은 형광펜을 들어 행간에 칠한다거나, 펜으로 줄 하나 긋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유성의 잉크로 줄을 긋는다는 것은 마치 오래된 성전에 콘크리트로 땜질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신앙심의 절정은 청소년기였다. 소화하지 못할 내용들도, 공격적으로 읽어 내려갔다. 고백하건대, 돌이켜보면 당시에 스마트폰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게 당시 책이란 재미고 유희였고, 때론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여가를 함께한 친구였던 책이 내용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어느새 권위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 권위란 실로 무서운 것이어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맹목적 믿음에 이르렀다. 책 앞에서 수직적 관계가 형성됐다. 그에게 책이란 언제나 진리만을 말하는 성경이었고, 저자는 항상 옳고 바람직한 성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2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독립을 하게 되었다. 작은 울타리 속 이웃들과 친구였던 책을 넘어, 넓은 세상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과 이야기들은 책의 권위에 금을 내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사람은 그저 읽을 뿐, 읽지 않은 삶에서도 배움은 있었다. 오히려, 활자 밖 세상에 현실과 꿈이 존재했다. 활자에 대한 무력감과 회의감이 엄습했다. 불안함에 다시 책을 펼쳐 들었지만, 권위의 벽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책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을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론 현실 도피의 수단, 새로운 자극을 위해 혹은 지적 허영심에 기인한 철저한 자기만족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읽기의 시작은, 전적으로 그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이타심이라곤 하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책의 권위에 짓눌려, 얼마나 많은 오독(誤讀)을 해 왔다는 것도.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깨졌다.
이후 그는 한동안 책에서 멀어진 냉담자가 되었다. 그리고 활자 밖의 현실 세상에 나가 마음껏 부딪혔다. 그러다 다시 읽기를 시작했을 때는, 그는 더 이상 신실한 독자가 아니었다. 외려, 다른 종교에서 온 선교자 같았다. 중구난방,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렸다. 여러 책을 동시에 읽다가도, 또 읽지 않았다. 읽고 싶은 부분만을 읽고 던져 버리기도 했다. 책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형형색색의 펜들, 수평도 맞지 않는 막 그은 줄들이 가득했다. 종이는 귀가 접혀있는 곳이 여럿이나, 때론 그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도 책장에 꽤 됐다. 충동적으로 책을 사기도 했고, 또 손때 묻은 중고 책도 선호하게 됐다. 커피 얼룩이 남은 책장을 넘기는 일도 흔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냉소적이고, 의구심을 마음껏 가지기도 했다. 책에 대한 다른 의견들도 찾아다녔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게 됐다. 그에게 책이란 이제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이기적인 독자다. 자신의 필요로 읽고, 자신을 위해 읽는다. 하지만 이기심의 방향은 달라졌다. 심지어 이제 오독을 즐긴다. 권위에 의한 오독이 아니라, 의지에 의한 오독이다. 예전의 그는 책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려 했고, 스스로 겪고 고민하는 대신 이미 쓰인 문장들을 삶의 해답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책이란 진리가 아닌, 단지 누군가의 관점일 뿐이며, 시대적 맥락과 개인의 편향에 따른 것임을 안다. 책에 삶의 방향키를 외주 주는 것이 아닌, 책과 함께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책은 이제 그의 삶을 대신해 주는 지침서가 아니다. 그저 생각을 조금 더 멀리 데려다주는 도구일 뿐이다. 믿지도, 기대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문장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건드리고, 어떤 이야기는 그 안의 감각을 깨운다. 삶에서 느낀 것들과 책의 문장을 나란히 놓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젓기도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해 읽었던 그는 이제 더 좋은 질문을 만나기 위해 읽는다. 돌아온 독서지만, 그는 이전과는 다른 독자다. 책에 자신과 삶을 맡기지 않는다. 대신, 삶 위에 책을 포개어본다. 어떤 문장은 겹치고, 또 어떤 문장은 멀어지지만, 그 거리마저 소중하다. 책은 이제 그를 대신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이기적이게도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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