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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3. 2021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

그린 나이트

삶이란 아주 복잡한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삶의 밝은 면이 존재하기에 삶의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의 밝은 면만 보고 살 수도 없고 매사 어둠에 갇혀 살 수도 없다.


그럼에도 삶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굉장히 불쾌하다. 이런 류의 고통은 내가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찾아오는 고통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갖는 고통이다. 또한 이 고통은 누가 나를 때리고 꼬집어서 느끼는 통증이 아니라 저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나오는 삶의 부조리함이다.  상식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세상은 이유도, 도덕도 없다. 애초에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세상도 아닌데. 의미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의미를 갈구한다. 그러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그렇기에 예술도 항상 즐겁지만은 않, 않아야 한다. 오히려 예술이 항상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밝은 분위기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마약이다. 예술은 때론 아프기도 불쾌하기도 하다.



데이비드 로워리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포스터와 대충의 줄거리만 들으면 악당 그린 나이트를 무찌르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기사의 얘기지만 영화 <그린 나이트>는 그런 류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대놓고  삶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을 비웃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정체불명의 기사 그린 나이트가 왕의 만찬에 들어와 게임을 안한다. 서로에게 단 한 번의 일격을 허락하자고. 선빵의 기회는 주겠다. 솔직히 개꿀 제안이다. 먼저 쳐서 목을 베어버리면 게임이 끝나버리니까.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영웅담 하나 없는 기사 가웨인이 호기롭게 나선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다. 근데 이게 무슨 조환지 목이 잘린 그린 나이트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주섬주섬 챙기고 말한다. 1년 후에 나에게로 오라고, 같은 일격을 날려주겠다고 말이다.


이런 걸 우리는 사기라고 부른다. 불공정 계약이다. 불공정 계약은 의무 이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근데 애초에 서로 한 번의 일격을 주고받자는 계약도 불법이니까 가웨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살인자가 되거나 1년 후에 그에게로 찾아가거나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린 나이트에게 그런 인간적 마인드로 접근하면 안 된다.


다소 장난스럽게 설명했지만 결과는 장난이 아니다. 가웨은 죽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망각하고 산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감독은 죽음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자 여기 죽음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세상이 네가 살아야 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면?


가웨인은 죽음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물론 그는 죽음과 당당히 맞닥뜨릴 정도로 용감하지 못하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그는 사기도 당하고 유혹에도 빠진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스멀스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닐까? 죽음에 맞서는 당당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에 영화는 대답이라도 하듯이 가웨인을 죽여버린다. 아니, 죽여버렸다가 되살린다. 강도를 만난 가웨인을 묶어놓고 하나의 가능세계를 보여준다. 그가 묶인 끈을 풀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죽어 해골이 되어버리는 세계를 말이다. 전하는 카메라는 시간의 흐름을 은유하고 우리는 그 은유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본다. 정해져 있는 운명은 없고 인간은 모두 다 죽는다는 진실. 왜 내 인생의 끝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왜 죽음은 나랑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내 삶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감독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우여곡절 끝 그린 나이트와 대면한 가웨인은 공포에 떨며 고뇌한다. 도망칠까 말까. 가웨인은 그의 앞에 놓인 또 다른 가능세계를 본다. 도망친 그가 왕이 되어 노년이 되어 죽는 세계. 그의 옆에는 자신의 운명을 조종하기 위해 허리띠를 만들어 주었던 그의 어머니가 있다. 이 세계에서 그는 장수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수동적인 삶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정수는 그가 그린 나이트를 거역하고 도망쳤을 때 이미 죽어버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그의 인생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을 내린다. 여기서 죽자.


가웨인이 허리띠를 풀고 그린 나이트 앞에 목을 내밀며 영화는 끝난다. 가웨인 인생 처음으로 스스로 개척한 운명이지만 아마 목은 잘렸을 것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반전은 없으니까.


우울하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와서 하는 것이라고는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뿐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다. 내 인생이 다른 인생보다 나을 이유도 없고 더 가치 있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져야 할 것허리띠를 풀 수 있는 용기이다. 어차피 죽어 없어질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더욱더 제대로 살아야 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죽어 없어질 존재이기에 생은 의미가 있다. 실존은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나가는 삶을 살 때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시한폭탄의 째깍거리는 시간이 아니라 선물이다.


가웨인은 죽기 직전에야 이를 깨달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세상이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숨 막힐 정도로 꽉 짜인 영화다. 모든 상징과 은유들이 하나의 주제의식 아래 단결했다. 자칫 잘못하면 가볍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잘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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