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기대치가 없기에 기계적이지만, 대개의 투자자는 기계의 속성을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이기에 늘 기대치만 앞서 나간다. 인간 본성은 본래 시장이라는 정교한 기계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투자자는 시장 메커니즘의 작동 원리를 철저히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야 하며, 자신의 본성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낮추어 가야 한다. 기대치를 낮춘 자리에 시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쓸모를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다수의 투자자는 주식이 부의 증식 수단이라고만 생각하지만, 본질을 꿰뚫는 소수는 그것이 인간 성찰의 도구임을 알고 있다. 시장에서 증명해야 할 쓸모란, 어떤 일정한 틀(원칙)의 반복성을 자신의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스스로 그 쓸모를 증명해 내면 그것은 하나의 장엄한 이야기가 되고, 타인의 공감을 얻으며 그 가치는 더욱 확장된다. 자본주의의 원리가 그러하듯, 시장이 베풀어 주는 수익은 바로 그 다듬어진 쓸모에 대한 정직한 대가다.
투자자의 임무는 자신만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이다. 평생 할 자기반성을 시장에서 숱하게 겪으며, 때로는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고 때로는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가는 곳—투자는 결국 그 성숙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쓸모를 완성해 가는 여정이다.
시장은 어려운 파동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나마 쉬운 파동을 고르고, 확률이 낮은 수많은 기회 사이에서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려야만 복잡함의 미궁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지 않게 된다. 이것저것 다 먹고 싶은 마음이나 어떻게든 수익을 내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지상정이나, 시장에서 다수가 가는 그 길에 꽃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작정 진입하여 막연히 기대하고 끝까지 버티고 싶은 본능이 감정을 엉키게 하기에, 손실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법을 습관처럼 익혀야 한다. 멈추는 법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시장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멈추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만 사고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스케이트를 배울 때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잡는 법부터 익히고, 수영을 배울 때 지치면 가만히 떠 있을 수 있는 법부터 연습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멈추는 기술에 숙달되지 않고서는 결코 기다림의 미학을 논할 수 없다. 사람의 에너지 또한 수렴과 발산의 연속이기에,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동작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음 반복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잘 멈추는 자만이 가장 멀리까지,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다. 반복의 위대한 전제는 멈춤이다. 멈추는 법을 정확히 알아야만 파멸이라는 대형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멈추지 못하는 광기 어린 질주는 결국 벼랑 끝으로 향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뿐이다.
투자를 시작하는 순간, ‘나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된다. 스스로와 공감하며 정한 원칙을 지키며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지만, 매매가 거듭될수록 투자가 버겁다는 고백을 떨치지 못한다. 투자가 버겁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복잡한 확률의 세계 속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잔뜩 뒤엉켜 있기에, 매번 도망치듯 생각에 의존해 매매를 거듭한다. 해결해야 할 인생의 숙제를 다음으로 미루고 외면할수록 그 크기는 더해만 가는데, 정면으로 파고들어야 함을 머리로 알면서도 시장 앞에 서면 매번 다음을 기약하며 무너지고 만다.
“다음에는 다를 거야”라는 비겁한 합리화가 반복되다 보니, 원칙을 어긴 것에 대한 정당한 질책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버린다. 그런 식으로 시장에서 나이만 먹어갈 뿐, 내면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다. 대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대어 살지만, 실상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장이 열리면 어제의 나쁜 습관을 기계처럼 반복할 뿐 정작 매매는 기계적이 되지 못한다. 생각이 길을 찾으려 애쓸수록,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한쪽 구석에서 무릎에 양손을 궤고 머리를 숙인 채 침묵한다. 인생은 자주 바뀐다기에 미래에 의지해 좋은 날을 기다려 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속도는 잔인하게 빨라질 뿐이다. 제자리에 머물기는 쉬워도, 바꾸기는 어렵고도 어렵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자에게 시장은 영원한 미궁일 뿐이다. ‘다음’이라는 미궁 속에서 늙어가는 것은 투자자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형벌이다.
투자에서 집착이란 이미 이격이 발생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점이 되어서야 “진입할 자리였는데”라며 아쉬움과 후회를 쏟아 내는 것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현상에 미련을 두니 더 갈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추격하게 되고, 그 운 좋은 성공은 원칙을 부러뜨리며, 실패는 감정을 엉망으로 엉키게 만든다. 이것이 집착의 독성이다. 파동은 그저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지나간 파동은 미련 없이 보내고, 다가오는 파동을 원칙의 자리에서 덤덤하게 올라타는 것이 진정한 투자자의 태도다. 그러나 집착과 욕심은 인간이 쉽게 다스릴 수 없는 지극히 본능적인 감정이다.
현상을 내 생각의 틀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오만이며 욕심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 성숙함이 필요하지만, 집착을 부추기는 욕심은 언제나 시험에 들게 한다. 보물은 화려한 기법이 아니라 원칙을 지켜가는 지루한 과정 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확률의 세계에서 진실은 항상 극단적인 비관과 장밋빛 희망 그 중간쯤에 머물기 마련이다. 그 중간의 결과에 만족할 줄 알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집착은 합리성을 가장 먼저 갉아먹는다. 투자자에게 합리성이란, 적당한 지점에서 수익을 확정 짓는 챙김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보물은 지루한 원칙의 반복 속에 숨겨져 있으며, 집착을 버린 자만이 그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카지노에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목격한다. 매매가 잦아질수록, 아무리 운수 좋은 날이라 해도 결과는 결국 본전에 수렴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의 반복조차 확률의 지배를 받기에, 이익이 나더라도 횟수를 거듭하면 결국 본전에 가까워지는 것이 시장의 이치다. 하물며 원칙이 아닌 생각으로 매매하는 횟수가 늘어난다면 그 끝은 보지 않아도 뻔한 불행이다. 설령 운 좋게 이익이 날지라도, 그 이익을 더 키우고 싶은 욕심이 커질수록 결과는 결국 투자자의 미천한 실력에 수렴할 뿐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동물적 본질을 거스르는 일이며, 그렇기에 투자는 어렵고도 고독한 길이다. 시장에 깊이 머물수록 어마어마하고 무서운 진짜 자신을 만난다. 아무리 다짐해도 결국 원칙을 부러뜨리고야 마는, 도저히 다루기 힘든 버거운 존재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원칙은 복잡할수록 부러지기 마련이며, 공부란 그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깎아내는 과정이다. "돈과 심리가 동일선상에 놓이기만 하면 제일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너, 그런 너에게 실망하고 질책하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나." 펄떡이며 살아있는 감정들이 아우성치는 사이,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말 없는 원칙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온 마음이 가격의 움직임과 혼연일체가 되어 비극의 결말을 본 뒤에야 정신을 차리는, 원칙을 세우고 또 부러뜨리는 가련한 존재다.
매매 횟수가 많다는 것은 이미 지고 있다는 증거다. 횟수는 욕심의 증거고 수익은 대개 그에 반비례한다, 내면의 야수가 내지르는 아우성에 귀를 내어주고 감정이 퍼덕거릴 때면 원칙은 침묵한다.
물론 시장은 정보를 완벽히 반영하지 못하며, 투자자의 편견과 오류는 시장의 효율성을 끊임없이 저해한다. 하지만 파동이라는 창을 통해 시장을 바라보기로 선택했다면, 두 가지 가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정보는 이미 가격에 반영되어 있어 추가 위험 부담 없이는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유진 파마의 「효율적 시장 가설」, 그리고 주가의 움직임은 술에 취한 사람의 걸음처럼 무작위적이어서 추세나 반전을 예측하려는 노력이 허사라는 「랜덤워크 가설」이 그것이다. 이 가설들을 인정할 때 예측하려는 마음은 죽고,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사색의 힘이 생겨난다.
참된 투자는 예측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다. 파동을 그릴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원을 망치는 잡초와도 같은 예측이다. 뉴스, 정보, 개인적 판단으로 개입하려는 자기 생각을 끊임없이 솎아내야만 파동의 본질이 보인다. 투자자가 된다는 것은 자꾸만 끼어드는 예측과 자꾸만 외면하게 되는 순응의 갈림길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현상에 순응하겠다’라는 보물 같은 의지를 캐내는 과정이다. 현상의, 현상을 위한, 현상에 의한 사고—그것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투자 심리다. 파동을 확률적 도구로 선택했다면 대수의 법칙과 반복의 힘을 믿어야 한다.
큰 수익은 순응의 소박함이 가져다준다. 저점이 높아지거나 고점이 낮아지는 유리한 자리에서 예측을 포기한 채 기계적으로 원칙을 반복해야 한다.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 반복을 통해 원칙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것뿐이다.
대부분 투자자는 멀리 보이는 산을 기법으로 넘으려 달려들지만, 정작 산 아래 길게 펼쳐진 감정의 골짜기는 너무나 깊고도 멀다. 눈앞에 놓인 골짜기를 한 걸음씩 또박또박 걸어가야 함에도, 대개의 시선은 멀찌감치 산 정상만을 향해 있기에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고 다치며 돌아서기 일쑤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발밑을 똑바로 직시하며 하루하루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성급함은 자꾸만 산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감정의 골짜기를 채 지나기도 전에 지쳐버리니, 멀리 보이던 산은 결국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되고 만다.
이 골짜기는 지나는 이의 마음이 성급할수록 험해지고, 욕심이 더해질수록 짙은 안개가 끼어 보이던 길조차 지워버리는 법이다. 이 자연스러운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한참을 간 것 같아도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 아래 골짜기의 형체가 비슷하듯, 시장에서 그려지는 파동들도 늘 비슷하다. 그 닮아있는 골짜기 몇 개를 천천히, 또박또박 지나다 보면 목까지 숨이 차올라 모든 유혹을 이겨내기 힘든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어가야만 한다. 그 고비만 넘기면 비슷한 길이 이어지며 오르기가 쉬워진다는 것을, 이미 그 길을 지나간 자들과 마음을 다잡고 건너가는 자들은 알고 있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의 정직한 합이다. 정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켜낸 한 걸음의 원칙 속에 이미 존재한다.
승부의 결과는 염경엽 감독의 계산과 반대로 흘렀고, 쓰라린 역전패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담담히 말했다. “나로서는 높은 확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야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다.” 이 한마디는 투자의 본질을 관통한다. 야구가 그러하듯 파동 역시 결코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냉혹한 사실을 깊이 이해할 때 투자자의 무게 중심은 예측에서 책임으로 옮겨가게 되며, 그 책임이 전제될 때만 게임을 지속할 자격을 얻게 된다.
염 감독은 14년 동안 제자리걸음인 투수를 향해 외쳤다. “생각을 바꾸고 야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그렇게 끝날 확률이 높다.” 147km의 빠른 공이라는 훌륭한 자산을 가지고도 변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투자자 역시 마찬가지다. 어제의 실패를 답습하면서 내일의 수익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접근 방식을 송두리째 뜯어고쳐야만 내일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있다면 희망은 있다. 끈기란 곧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겠다는 변화의 의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끈질긴 변화의 노력 끝에, 마음에는 조만간 새로운 성장의 싹이 트게 될 것이다.
확률적 선택은 책임으로 완성된다, 생각을 뜯어고쳐야 내일의 싹이 튼다. 실력보다 책임감이 계좌를 지킨다. 야구가 생각대로 되지 않듯, 시장도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결과가 틀렸을 때 군말 없이 책임지는 태도가 생존을 결정할 뿐이다.
산책의 본질은 사색이다. 그리고 그 사색의 끝에서 종종 나를 잊는 무아의 상태를 만난다. 이 무아의 시간이 쌓이는 만큼 영혼은 살찌고 인간으로서 성장한다. 건강을 위한 산책의 본질이 사색이듯, 부자가 되기 위한 투자의 본질 또한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사색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흔들림 없이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고, 복리의 마법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네발짐승은 속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달리는 도중 체온을 조절하지 못해 오래 달릴 수는 없다. 네발짐승에게 속도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면, 자본주의를 항해하는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지구력이다.
인간에게는 맹수의 속도 대신 엉덩이의 힘이 있다. 엉덩이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이 꾸준히 먼 거리를 달릴 수 있게 해 주는 지구력에 있다. 인간이 이 끈질긴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왔듯이, 투자자 역시 똑똑함에 기댄 속도보다는 꾸준함에 의지한 끈기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속도는 성급함과 욕심에 맞닿아 있어 금방 감정을 과열시킨다. 투자는 일찍 도착하는 경주가 아니라, 끝까지 걷는 자만이 보물을 발견하는 산책이다.
복리는 엉덩이로 증명된다. 속도는 맹수의 생존법이고 끈기는 인간의 승리법이다, 똑똑한 머리는 진입 자리를 찾지만, 묵직한 엉덩이는 수익을 지켜낸다.
투자에 있어 진입이란 손실은 짧게 자르고 이익은 길게 챙기며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오르는 성실한 과정이다. 그러나 대개 성급함을 극복하는 훈련이 부족하거나 욕심의 무게에 짓눌려,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라는 요행을 꿈꾸며 기도에 매달리곤 한다. 성공한 투자자의 우상향 곡선은 매끄러운 직선이 아니라, 숱한 지그재그의 인내로 이루어져 있다. 큰 파동을 쪼개어 보면 그 속이 심리들이 부딪친 지그재그의 등락으로 가득 차 있듯이 말이다. 결국 모든 원칙의 본질은 ‘고점 매도와 저점 매수’, 그리고 ‘짧은 손절과 긴 익절’이라는 두 줄기의 맥락으로 수렴된다.
원칙을 지키면 지킬수록 마음은 역설적으로 자유로워지며, 그 자유로운 시간은 그려지는 파동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 말수가 줄어들수록 글이 깊어지듯, 뇌동과 추격이 줄어들수록 원칙의 깊이를 더해간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라는 투박한 말속에 투자의 진리가 있다. 자신의 오물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치우는 것, 그것이 바로 원칙을 지켜가는 일이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무분별한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책임이라는 의무를 다하는 행위이며, 나아가 시장의 질서를 존중하는 이타심으로 향하는 고결한 길이다.
책임지는 만큼 원칙의 뿌리는 깊어진다. 요행을 바라는 기도는 투자자를 나약하게 하지만, 책임을 다하는 행동은 자유롭게 한다. 결과에 정직하게 책임을 지는 순간, 흐릿했던 파동의 길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