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는 나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이다.

by 황금지기


“글을 쓴다는 건 좋은 것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수많은 부정적인 것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중략) 세상에 타고난 좋은 작가는 별로 없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고쳐 쓸 뿐이다. 그래서 좋은 작가 중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매일 고쳐 쓰면서 자신의 일상에 존재하는 보기 싫은 부분도 함께 고치기 때문이다.”

<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투자 심리를 위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 또한 투자를 잘하기 위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수많은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투자는 인간의 본성과 대척점에 있는 행위이기에 태생적인 투자자는 드물다. 성공한 투자자는 훌륭한 작가가 그러하듯,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진입하고, 자르고, 챙기고, 갈아타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신 안에 박힌 잘못된 습관들을 끊임없이 고쳐나간다. 투자에서 잘못된 습관의 대부분은 결국 자신의 감정, 즉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잘못된 습관들을 깎아내고 고쳐가는 과정 자체가 곧 성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투자를 잘하고자 하는 그 처절한 노력은, 결국 나라는 감옥을 벗어나 이타심으로 향하는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투자는 나라는 존재를 정성껏 고쳐 쓰는 문장이다. 좋은 투자는 좋은 문장처럼, 숱한 복기와 검증이라는 고쳐 쓰기 끝에 탄생한다. 고쳐 쓴 문장이 삶을 바꾸듯, 고쳐진 매매 습관은 운명을 바꿀 것이다.




해외선물 시장에서 특정 분봉을 기준으로 파동을 그리기로 했다면, 무엇보다 현재의 주가가 모든 정보를 이미 담고 있다는 관점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각 없이 파동 그 자체를 그려낼 수 있다. 시장은 비합리적인 참여자들의 감정이 충돌하는 장이기에 관성(Momentum)이 존재하며, 전날의 흐름을 이는 유리한 방향을 본다는 것은 곧 확률적 사고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확실해 보여도 연속해서 맞거나 틀릴 수 있는 것이 확률의 본질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추격을 삼가고 역매매를 경계해야 한다. 아깝더라도 보내주어야 할 자리가 많지만, 마음이 특정 지점에 ‘꽂히는’ 순간 ‘보내는 미학’을 잃어버린다.


‘꽂힘’은 끝장과 맥을 같이 한다. 예측은 이 집착과 궤를 같이하며, 마음에 꽂혀 있는 시간만큼 계좌는 우하향하게 된다. 따라서 생각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심리가 투자의 성패를 좌우한다. 인간은 대개 말을 잘하기 위해 지식을 탐하지만, 정작 지혜의 순도는 말수가 적어질수록 높아지는 법이다. 인생을 바꾸는 것은 한 권 분량의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내면에서 정제된 ‘단 한 줄의 지혜’다.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기 위해 침묵하며 내면으로 침잠할 때, 원칙은 선명한 지혜가 되어 우리를 지킨다.


꽂힘은 파멸의 전조다, 한 지점에 마음이 '꽂혀', 흘러가야 할 파동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은 채우고자 하는 욕심이다. 지식은 밖에서 채우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에서 덜어내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한다는 건 모른다는 증거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말 중 하나가 ‘안다’라는 표현이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걸 실천하기 위해 몰입하느냐 말할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입으로만 아는 사람이 거만하게 안다고 말하며 정작 실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 정확하게 안다고 착각한다.”

<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시장에서 조금만 매매해 보면 쉽게 깨닫게 된다. 어설픈 지식은 매매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하며, 차라리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게 약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영원을 사는 현재의 나’뿐이다. 정신은 입 밖으로 내뱉을수록, 미래를 예측할수록 탁해지지만, 몸소 행하고 시장에 대응할수록 맑아지는 법이다. 매일의 독서가 글의 깊이를 더하듯, 그 글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이야기가 탄생하고 타인의 공감을 얻게 된다. 쓰기 위해 읽고, 쓰고 난 뒤 실천하는 자만이 울림이 있는 삶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 “의심은 해 본 사람만 발견할 수 있는 실천의 부스러기다”라는 말처럼, 직접 몸으로 부딪치기 전에는 결코 그 실체를 볼 수 없다.


입이 아는 것은 교만이 되고, 몸이 아는 것은 실력이 된다. 안다는 착각을 씻어내고 실천의 맑음을 채워라, 쏟아지는 지식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과정에서 생겨난 귀한 의심의 부스러기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전체 주식 계좌 중 진정한 부의 향기가 나는 계좌는 단 1% 남짓이라고 한다. 날것의 감정을 극복하고, 자신이 세운 원칙을 소신 있게 밀어붙이며 투자하는 이가 과연 1%나 될까? 사람을 대할 때 각자를 서로 다른 나무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하듯, 스스로 변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바꿔 쓰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인간이 본성을 딛고 변화할 확률 또한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희박한 확률에 기대를 걸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투자자 중 1%만이 본성을 극복하고 성공의 궤적을 그린다는 사실은 투자가 왜 소수의 길인지를 증명한다.


투자가 어려운 것은 이 1%라는 좁은 문 때문이지만, 시야를 넓혀 5,000만 명 중의 1%, 즉 ‘50만 명 안에 들면 된다’라고 달리 보면 마음에 작은 여유가 생긴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만족하는 법’을 안다는 의미와 같다. 시장의 전체 흐름을 다 아우르려 욕심낼수록, 그리고 예측이 빗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수록 원칙을 지킬 공간은 좁아지기 마련이다. 확률을 다루는 세계에서 전체를 다 먹으려 들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의 오만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1%의 소수만이 부의 향기를 맡는다, 욕심이 커질수록 원칙이 숨 쉴 공간은 사라진다. 진정한 소수는 정해진 몫에 만족하며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손실은 짧게 자르며 이익은 길게 챙긴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투자의 세계에서 ‘당연한 것’은 언제나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기다림 끝에 진입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다음을 기다리는 무한한 반복. 그 반복의 궤적을 위해 스스로 그린 동그라미, 그 '원'이 바로 원칙이다. 원칙이라는 원 안에서 실천되지 않는 그 어떤 다짐이나 글들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겉으로는 게으름 때문인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칙 밖의 집착을 놓아버리지 못한 마음 탓이 더 크다.


글이 단단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불필요한 수식과 욕심이 많이 버려졌음을 의미한다. 마음도, 세운 원칙도 이처럼 버림으로써 단단해지는 법이다. 단단함이란 곧 단순함이다. 그리고 그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에서 오물들을 정제하고 버려야 한다. 원칙을 논함에 있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버려야 할 것은 ‘자기 생각’이다. 내 생각이 죽어야 원칙이라는 원은 찌그러지지 않고 온전한 원형을 유지하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원칙은 감정을 비워낸 자들의 단단한 동그라미다, ‘나’를 버려야 ‘원’ 안에 머문다. 생각이 덧붙여질수록, 원칙은 삐뚤어진다. 원칙이라는 원 안에 서 있으면서도, 원 밖의 풍경에 미련을 두느라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 항상 문제의 원인이다.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예민한 것으로 보이지만, 안목이 뛰어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원리가 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섬세하게 보인다.”

<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시장에서의 꽃길은 대중이 몰려가는 광장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고요한 뒤안길에 있다. 모두가 똑같이 바라보는 현재 가격이라는 현상 안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원칙을 지켜가는 절실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 치열한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도, 그리고 어떤 결과든 담담히 수용하는 심리를 위해서도 사색은 투자자에게 가장 절실한 도구다. 현재 가격의 가격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원칙은 감정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릴 뿐이다.


하지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려가는 파동 이면의 원리를 통찰하게 되면, 예민함은 섬세함으로 변한다. 섬세해진다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감각이 다져졌음을 의미하며, 비로소 한 분야의 장인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예민함은 감정의 파도이고 섬세함은 장인의 감각이다. 예민함은 휘둘리게 하지만, 섬세함은 다스리게 한다. 장인의 눈에는 가격의 변동이 예민함의 대상이 아니라, 질서 정연하게 흐르는 섬세한 원리로 비치게 된다.



시장의 등락 과정에서 최고점이 낮아진다는 것은 수요의 감퇴를, 최저점이 높아진다는 것은 수요의 증대를 의미하는 강력한 근거다. 이 지극히 기본적인 원리 위에서 확률 주사위를 조심스럽게 던지기 위해 파동을 그리는 일은 대단히 유용하다. 투자는 결국 유리한 확률을 고려하여 베팅하는 행위이며, 묵묵히 기다릴 줄만 알아도 돈을 벌기 쉬운 환경은 자연스레 조성된다. 금리 인하 시기에 주식 투자가 유리하듯, 앞고점과 앞저점의 흐름을 따라 주사위를 던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를 알면서도 제때 던지거나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확률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관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원칙으로 정한 길을 묵묵히 따라가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원칙을 세우고 지키며 자신만의 수를 찾아가는 그 치열한 과정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투자의 정수가 있다. 하지만 원칙의 선을 아무리 진하게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며 밑줄을 그어도, ‘생각’이라는 안경을 끼는 순간 원칙은 안개처럼 흐려지다 마음에서 지워지고 만다. 생각으로 자욱한 안개 속에서 헤매다 보면 선 위에 웅크리고 있는 원칙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자만심과 집착으로 물든 생각이 너무 짙어 그를 일으켜 세우기조차 버겁다. 한 번의 나태함이나 오만이 눈덩이 같은 손실로 돌아오는 냉혹한 시장에서, 인간의 뇌 구조와 본능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한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그러한 본성에 휘둘리고 있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효율적인 통찰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그려지는 선 위에는 원칙이 웅크리고 있다. 웅크린 원칙을 깨워라. 안개가 걷히면 길은 이미 그곳에 정직하게 나 있다. 원칙은 선 위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안개를 걷어낼 때 비로소 일어설 것이다.




헤밍웨이는 한때 자신의 글쓰기를 빙산에 비유하면서 “보이는 것의 8분의 7은 물밑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8분의 1만 본 것이 아니라, 나머지 8분의 7까지도 보기 위해 분투한 세월이 그에게 글이라는 선물을 준 셈이다. 본 것은 경험으로 쌓였고, 경험은 그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고작 8분의 1인 ‘현재 가격의 움직임’이 아니라,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나머지 8분의 7을 보기 위해 보낸 사투의 대가가 바로 수익이다.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자격을 얻는다. 시장의 본질을 ‘제대로 본다’라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꿰뚫을 수 있는 영역이다. 마음으로 제대로 본다는 것은 8분의 7에 해당하는 ‘횡’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장의 흐름을 읽는 동시에, 그 흐름에 반응하는 자기 내면을 ‘종’으로, 즉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성찰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종횡무진 나아가다 보면 자유로워진다. 수익은 수면 위에서 낚아채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다. 10%도 채 되지 않는 가격의 잔파도에 일희일비하며, 정작 빙산의 본체와도 같은 거대한 추세와 심리를 놓쳐서는 나아갈 방법이 없다.




생각이 비대해지면 사람은 꽂힌 생각의 창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고, 그 편협함이 기준이 되는 순간 시야는 닫힌다. 잘해오다가도 한 번 꽂히게 되면 뇌동매매라는 약효는 한동안 멈추지 않는다. 자주 생각에 꽂히고, 원칙을 어기며, 마음이 흩어지는 삶을 반복하면서 변하지 않는 자신에게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로또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아무나 행동할 수는 없으며, 누구나 변하고자 하지만 아무나 변할 수는 없다. 그 고통스러운 변화를 뚫고 행동하는 ‘아무나’가 바로 1%의 소수다.


나쁜 습관을 줄이고 또 줄여서 지워낸 공간만큼 길이 열린다. 글을 쓴다는 것이 불필요한 말을 줄여 압축하는 행위이듯, 투자한다는 것 또한 사사로운 생각을 줄여 원칙으로 압축하는 행위다. 원칙의 동그라미 안에서 반복하며 본질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투자의 모습이다. 원칙의 원 밖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기웃거리는 자신, 원 안에서 유리한 바람이 같이 가자고 속삭여도 끝내 외면하고 마는 자신을 목격하는 것은 투자자의 숙명이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숙명이다. 씨름 선수가 모래판 밖으로 밀려나면 즉시 실격이듯, 투자자 역시 원칙의 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손익의 여부와 상관없이 자격을 잃은 상태다.


수익보다 중요한 것은 '원 안에 머물 자격'을 유지하는 일이다. 자격 없는 자에게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파동은 원칙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자리와 없는 자리가 교차하며 쉼 없이 등락할 뿐이다.




“이 안에 무언가 있다. 내가 천천히 하나하나 발견할 생각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면 어제와 다른 일상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것을 글로 쓰면 무게가 다른 글이 완성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무언가 하나를 바라보면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자다. 자신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다.

<김종원,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저자의 표현처럼 글쓰기가 설정된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지적인 도전이듯, 투자 역시 인간 본연의 본능적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멈추지 않는 도전이다. 변화를 인지하고 변하기 전까지 그저 떼 지어 다니는 군중 속에서 사슴처럼 투자할 뿐이다. 진정한 투자자는 무리에 편승하는 양 떼가 아니라, 고독을 즐기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가 되기 위해 생각을 넘어 기다리는 법을, 그리고 그 너머의 현상에 대응하는 법을 끊임없이 익혀가야 한다.


혁신이 거듭되는 자본주의와 필연적인 인플레이션 시대에 「투자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평생을 걸고 풀어야 할 숙제다. 접어 올린 사색들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력에 불을 지피는 뜨거운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한다. 시장의 무게를 결정하는 건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이다. 원칙의 무게 또한 그 시선의 무게를 닮아간다.


시선의 무게가 곧 원칙의 무게를 결정한다, 원칙이 종이 한 장처럼 가볍게 느껴져 매번 뇌동매매에 흔들린다면, 그것은 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만큼 가벼웠다는 명확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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