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수록 탁해지고 바라볼수록 맑아진다.

by 황금지기


데이트레이딩 관점에서는 특히 '변한다'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전날부터 이어져 온 흐름 속에서 파동을 그려낼 때, 그 변화를 온전히 인지하고 수용하는 진정한 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흐름 속에서 파동을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유리한 방향으로 행위를 제한함으로써 눈앞의 기회를 탐하기보다 닥쳐올 위험을 줄이기 위함이다. 변화를 인정해야만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변화의 실체를 보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각의, 생각을 위한, 생각에 의한’ 투기 행위를 투자라고 착각하며 자신을 망가뜨린다.


투자자에게 있어 흐름의 변화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변하며, 갈 것은 반드시 가고 올 것은 반드시 온다는 통찰이 깊어질수록—깊은 물이 고요하듯—내면의 감정이 내지르는 메아리와 아우성 같은 소음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변화하는 흐름을 따라 마음도 덩달아 고요해지는 것이다. 깊은 물이 잔잔한 것처럼 통찰이 깊어질수록 편안해진다. 예측하려고 애쓸수록 마음은 탁해지지만, 있는 그대로 현상을 바라볼수록 마음은 맑아지기 때문이다.


현상은 예측할수록 탁해지고, 바라볼수록 맑아진다. 변화에 순응하려는 의지가 인생을 바꾼다. 시장의 변화를 이기려 들지 말고, 변화하는 물결 위에 마음을 띄워 보내는 것이 시작이다.




시장은 도무지 방향을 예단하기 힘든 정글과 같다. 방향성을 잃은 박스 구간에서는 굶주린 호랑이를 마주하고, 드넓게 펼쳐진 초원 같은 추세 구간에서도 사나운 사자를 만날 수 있다. 더욱이 심리가 감정에 엉켜버린 늪지대 같은 뇌동 상태에 빠지면, 소리 없이 다가오는 악어에게 물리기 십상이다. 언제 어디서든 해로운 것들에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곳이 시장이기에, 투자자는 위험의 실체를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통제함으로써 위험의 크기를 줄여가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관이 주인 행세를 하며 고개를 드는 것은, 바로 그 통제의 노력을 멈춘 게으름 때문이다.


투자자가 마주하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외부의 변수가 아니다. 그것은 매일 공들여 다듬어 가는 객관적 시선에 안개처럼 끼어드는 ‘감정의 때’다. 시장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는 이 위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단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공의 길을 눈앞에 두고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 채, 정답과 정확히 평행선을 그리며 겉도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장은 위험하다’라는 그 불편한 진실을 자꾸만,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위험을 망각하는 순간, 이미 늪지대에 발을 딛은 것과 다름없다.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자신이 항상 사냥당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원칙의 박자에 맞추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확률을 다루는 투자자에게 아쉬움과 미련은 필연이다. 이 감정들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짧게 끊어내며 빨리 잊어버리는 심리적 기술은, 마치 여유로움이라는 이름의 도자기를 빚는 장인의 섬세한 손길과도 같다. 시간이 흐르면 매매의 기법이나 방법은 누구나 비슷해지겠지만, 심리적 여유로움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극복하기 어려울 만큼 벌어진다. 선인들이 투자를 결국 '심리 게임'이라 단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관을 내려놓고 고요한 마음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것을 ‘관조(觀照)’라 하고, 그 관조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을 알아가는 것을 ‘사색(思索)’이라 한다. 관조할 줄 안다는 것은 번잡한 생각을 놓아버릴 줄 안다는 뜻이며, 사색할 줄 안다는 것은 내면에서 정제하여 지혜로 만들고, 다짐과 맹세를 실천함으로써 그 지혜를 단단하게 압축할 줄 안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정제되고 압축되어 태어나는 지혜가 바로 ‘덤덤함’이다. 시장의 파동은 결코 순순히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오락가락 흔들고, 붙였다 떨어뜨리며, 지루하게 등락하는 것이 파동의 본성이다. 이 느리고 거친 흐름 속에서 심리적 여유를 갖추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원칙의 선명함은 결코 마주할 수 없다.


여유로움은 지혜를 압축하는 장인의 손길이다, 기법은 머리로 배우지만, 여유로움은 영혼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덤덤함은 숱한 사색을 거쳐 정제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기꺼이 길을 잃겠다는 선언인지도 모른다. 나를 아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 내면 깊숙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껍질을 벗겨내고 또 벗겨내다 보면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진정한 존재가 있다. 그 '또 다른 나'와의 마주함이 곧 변화의 시작이다. 지식을 쌓는 목적은 시장의 흐름을 읽기 위함이지만, 그 흐름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쌓인 지식만큼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생각이 줄어드는 만큼 흐름은 선명해지기에, 결국 지식을 쌓는 최종적인 목적은 외부가 아닌 자신을 알아가는 것으로 귀결된다. 시장의 법칙을 제아무리 꿰뚫고 있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흐름은 체화되지 못한 채 투자자의 인생을 겉돌 뿐이다.


흐름에 온몸을 맡기기 위해서는 무아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잊기 위해서는 깊은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시장에서의 무아란, 내가 누구인지를 처절하게 앎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망각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주관적인 ‘나’는 사라지고 오롯이 시장의 ‘흐름’만 남게 되는 경지다. 투자자의 여정은 성급함과 욕심을 넘어 생각을 내려놓는 과정이며, 나를 알아감으로써 내려놓고, 내려놓음으로써 더 깊이 나를 알아가는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교차로다. 투자자로서 자신의 추악하고 나약한 진실을 마주하는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올바른 투자자로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마주하고 설득하는 그 모든 과정을 ‘투자 심리’라 부른다.


나를 잃어야 흐름이 보인다, 지식은 채우기 위해 배우지만, 지혜는 비우기 위해 빚어지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은 나를 잊기 위함이며, 나를 잊는 것은 시장의 흐름에 온전히 올라타기 위함이다.




데이트레이딩 투자자는 매일 갈림길에 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택의 질이 아니라, ‘하고자 했던 것을 지금 당장 실천하고 있느냐’는 단순한 사실이다. 성공하는 자는 원칙이 습관으로 굳어질 때까지 초반에 압도적인 행동의 양을 늘리는 데 집중한다. 자신과의 타협 없이 실천에 실천을 포개는 과정에서 행동은 복리가 되어 돌아온다. 반면 실패하는 자는 좀처럼 행동을 쌓아 올리지 못한다. 부러진 목표를 수정하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하다 마음엔 부정과 나태만 가득해지고, 행동은 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마치 뻔한 결말이 예정된 막장 드라마처럼 뻔한 결말 안에서 맴돌 뿐이다.


자본 시장은 상당 부분 운의 영향을 받지만, 게임의 본질은 명확하다. 기대수익보다 위험이 크다면(원칙의 자리가 아니라면) 기꺼이 보내주어 대비하고, 만일의 사태에 직면했을 땐 손실을 짧게 잘라 대응하는 것. 이 당연한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자에게는 운마저 유리하게 작용하며 그를 성공의 궤도로 인도한다. 시장의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원리도 결국 이 ‘실천의 격차’에서 기인한다. 작은 것을 아껴 부를 이루든, 가장 중요한 것을 레버리지하여 도약하든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파동이 그러하듯 투자는 확률의 명제이며,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각자가 내린 선택을 얼마나 끈기 있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정답이 완성된다.


실천은 복리로 쌓여 운명이 된다, 운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실천하는 자의 곁으로 깃든다. 실천은 쌓이면 무너지지 않는 성벽처럼 견고한 습관이 된다.




산다는 것이 고독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듯, 투자한다는 것은 원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먹기에 따라 삼라만상을 달리 보이게 하고, 생각은 수시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이 다독일 수 있듯이, 절망의 계곡에 빠진 투자자를 구해낼 수 있는 존재 또한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지식은 가르칠 수 있으나 그 본질은 전할 수 없는 법이다. 그 지식을 마음에 새길 사람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사람도 결국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나를 지키고 보호해 주는 방패는 오직 나 자신이다. 투자자 스스로 내면을 향해 침잠하는 고독의 시간이 없다면 성장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시장의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있기에, 내면을 향한 사투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인생, 공부, 투자, 운동 그 어느 것도 혼자 고독하게 훈련하는 시간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실을 볼 수 없다. 넘어짐과 혼란, 정체의 늪에서 흔들리면서도 끝내 고독하게 자신을 알아가는 내면의 극복 없이는 성취 또한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결국 산다는 것과 투자한다는 것은, 고독 속에서 무언가에 익숙해지며 끝내 진정한 자신에게로 걸어가는 긴 여정이다.


투자는 고독하게 자신에게로 걸어가는 여정이다,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가장 단단한 원칙이 빚어진다. 소란스러운 시장의 소음을 뒤로하고, 고독하게 자신과 마주하며 원칙에 익숙해지는 그 쓸쓸하지만 위대한 걸음이 투자자의 미래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데 있다”라고 했다. 완벽함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완벽해지려는 시도는 신이 되겠다는 오만이거나 무모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넘어져도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실수를 '사소한 범위' 내로 한정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다면 더 이상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실수를 삶의 당연한 조각으로 받아들일 때 마음엔 깊은 여유가 깃든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내공을 쌓은 인간은 실수를 통로 삼아 배우고 성장한다. 성장은 실수를 통과하는 과정이며, 반복적인 매매는 그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는 행위다.


확률이 지배하는 시장에서는 운과 실력의 경계가 모호하듯, 사소한 실수와 중대한 실수의 경계를 구분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운 좋은 실수가 실력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탁월한 실력이 운 나쁜 실수로 비치기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소양이 깊어진 자만이 그 사소함과 중대함의 경계를 스스로 분별해 낼 수 있다. 중대한 경계의 선을 넘지 않는 실수라면, 대응하는 투자자에겐 비탈길 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린 흔한 일상일 뿐이다. 사소함과 중대함의 차이를 알아갈수록 투자자는 대응의 영역에 들어선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험한 비탈길을 걷고 있었기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언제든 넘어질 수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넘어진 자리에서 훌훌 먼지를 털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비록 걸음은 빨랐으나, 작은 오르막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엔 여유로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실수는 성장의 보폭이다. 실수를 허용하는 범위가 자신의 그릇이다. 중대한 파멸로 가는 길목에 '손절'이라는 울타리를 튼튼히 치고 있다면, 그 울타리 안에서의 실수는 귀한 양분이 될 것이다.




지식을 수평으로 나열하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일지 모르나, 나열된 지식을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수직으로 깊게 파고들게 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투자가 유독 어려운 이유는 횡으로 나열된 기법이나 어설픈 앎이 실제 수익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익률 우상향이라는 나무의 뿌리가 되는 ‘종(縱)적인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천한 자신을 직시하고 알몸인 채로 시장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심리를 단단하게 단련해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성장하며 단단해지기 마련이지만, 그 단단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에게 성급함과 욕심은 생존본능이다. 심리적 불편함조차 견뎌내기 힘든 인간이 이 본능을 넘어서려면 본성을 끊임없이 거슬러야 하기에, 시장에서 버티는 일은 녹록지 않다. 주관이 앞선 뇌동과 추격은, 배에 이미 구멍이 난 줄도 모른 채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무모한 항해와 같다. 일상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초가삼간을 태우는 불장난을 시장 안에서는 너무나 자주 저지른다. 그렇게 무너진 다수는 밀물처럼 새로 몰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대체되면서 그저 군중 속의 군중으로 사라져갈 뿐이다.


본성을 거스르는 자만이 변동성의 불길에서 살아남는다. 본능은 성급함을 재촉하나 지혜는 멈춤을 가르치며, 이 불편한 본성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변동성의 화마를 피해 생존의 기회를 얻는다.




“내가 깨어 있다고 일컫는 사람이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가장 내면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열이나 충동 혹은 약점까지도 인식하고 처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투자는 단순히 숫자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을 놓아버리는 법을,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그리고 틀렸을 때 타오르는 욕망을 단호히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즉, 투자는 자신을 알아가는 고행이자 고도의 감성노동을 수행하는 직업이다. 자기 생각에 이끌리고 욕망에 가슴이 달아오르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정서다. 그렇기에 그 본능적인 생각과 욕망에 반하여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인가는 이미 상식의 영역이다.


그러나 투자자는 자신 안에서 솟구치고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그 비합리적인 생각과 욕망을 잠재우는 일에 바치는 시간만큼 현명해진다. 손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고, 작은 이익은 당장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것이 보통의 마음이다. 돈 앞에서 자꾸만 솟구치는 이 원초적인 본능들에 거역할 수 있을 때, 투자자는 깨어 있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


욕망에 반하는 만큼 반석 위에서 현명해진다. 본능의 메아리를 잠재우는 자가 깨어 있는 자다, 현명함은 솟구치는 욕망을 비우는 시간이 선사하는 선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확고한 것, 형체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게 마련이어서, 학문의 세계에서 정해놓은 기호들에 의지할 수 있기를 원하거든. 인간의 정신은 변해 가는 것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가능성보다는 현실성을 더 좋아하지. 오메가라는 활자가 뱀이나 새로 둔갑하는 것은 참지 못한단 말이야.”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수많은 투자자가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과,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시장의 확률’ 사이의 거대한 괴리 때문이다. 확실성을 갈구하기에 스스로 예측의 그림을 그리며 뇌동과 추격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비극이다. 그러니 과거의 후회나 아쉬움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인간이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라는 현재의 선택뿐이다.


투자는 본래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야만 길이 보이는 험난한 여정이다. 타인의 인정 따위는 뒤로하고, 원칙을 지키는 과정 그 자체에서 성취감을 찾으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지켜내면 그뿐이다. 실패했을지라도 자책과 후회는 짧게 끝내고, 소소한 위안거리를 찾아 달래며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이 세계를 알게 된 것은 단지 생의 과정에서 만난 우연이자 운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은 고정된 현실을 추구하기에 자꾸만 마음속에서 파동의 방향을 미리 정하려 들고, 그 ‘정함’이 주는 가짜 편안함에 취해 시장과의 괴리를 키워간다. 결국 모든 문제의 본질은 언제나 우리 각자의 마음, 즉 투자 심리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진실이다.


확실성에 집착할수록 원칙은 부러지기 쉽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면 마음은 유연해지고 일상은 평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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