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의 길에서 아쉬움과 미련은 필연이며, 후회는 화장실을 가는 일처럼 일상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당연함을 몸소 받아들이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 투자의 본질이자 인간의 한계다. 자본이 흐르는 시장은 비대하면서도 비열하기에, 막연한 기도나 한 방에 기대를 거는 것은 노예근성일 뿐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 안에서 작게 사그라지고 크게 피어나며, 내리는 뿌리만큼 울창해지라는 내면의 아우성을 외면할 수 없다. 반복을 통해 더 깊이 들어가라는 그 외침이 잦아들지 않기에, 손에 쥔 삽의 게으름과 의지의 기웃거림, 흩어지는 시간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
대부분 인간은 꿈만 창대할 뿐 정작 제 미약함을 담아 키울 그릇의 소중함을 모른다. 마음만 앞서 작은 시련조차 포기의 표지판으로 남기고, 정의를 논하면서도 가벼운 입을 제어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똑똑해도 우연의 도움 없이는 보잘것없음을, 원칙을 부르짖어도 놓친 수익과 당한 손실 앞에 가슴이 저리는 나약함을 깊이 알아간다. 그럼에도 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찾아간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중력의 무게를 견디며 살 듯, 투자자는 시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감정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상황이 나빴을 때, 혹은 몹시 나빴을 때 보여주는 처신과 그로 인해 빚어진 마음의 여유로움이, 훗날 찾아올 운의 크기와 작동 여부를 결정하는 법이다.
감정의 중력을 견뎌낼 때 운의 조각들이 빚어진다. 나빴을 때의 처신이 진짜다, 감정의 중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용하지만, 그 무게를 견디며 멈추지 않는 자만이 울창한 숲을 거닐 자격을 얻게 된다.
투자는 불확실성이라는 검은 안개가 짙게 낀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이 극심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반복과 복기가 빚어낸 철석같은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시장이 뜻대로 흘러갈 때는 화사한 꽃길처럼 느껴지겠지만, 투자의 성패는 ‘맞았을 때’가 아니라 ‘틀렸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에서 결정된다. 틀린 순간 감정의 개입이 짙어질수록, 우리가 마주한 어둠은 더욱 깊은 칠흑이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유혹을 떨치고 원칙을 지켜낼 때, 원칙은 칠흑을 밝히는 횃불이 된다. 어둠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지만, 원칙에 의지해 어둠에 익숙해진 이에게 칠흑은 더 이상 두려운 어둠이 아니다. 불확실성은 만인에게 평등하나, 원칙을 등대 삼아 나름의 확실성을 확률 속에서 찾아낸 이에게 불확실성은 희석된다. 물론 단련된 자에게도 파동의 흔들림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칠흑 같은 긴장은 여전하다. 결국 투자자의 몫은 불확실성과 확실성 사이의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변화를 뜻하는 'Change'에서 'g'를 'c'로 바꾸면 'Chance(기회)'가 된다. 원칙을 믿고 반복하며 변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 반복 속에서 길을 찾을 확률을 높여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변화이자 투자의 본질이다.
투자는 칠흑 같은 불확실성을 원칙의 횃불로 비추며 나아가는 대응 예술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만이 파동의 숨겨진 맥락을 읽어낸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으나 원칙의 불꽃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예술은 얼핏 보면 정신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 도구와 목재, 흙, 물감, 금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넓은 세상을 만끽하는 자유, 위험을 즐기는 짜릿한 쾌감, 안빈낙도의 자부심을 모두 바쳤다. 그러고도 그는 숨을 죽이고 화를 삭이며 자꾸만 새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투자 또한 이와 같다. 시장이 그리는 파동의 율동을 따라 원칙을 세우고,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체계적 정의와 자기 확신, 그리고 위험보다 큰 기대수익을 믿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지속적인 매매가 가능해진다. 성취를 위해서는 복기와 반복이라는 체계적 훈련이 필요하며, ‘또 다른 나’로 거듭나기 위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견뎌야 한다. 파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주관을 제물로 바쳐 객관적 시선을 얻어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본성에 충실한 채 요행을 기도하겠다는 패배의 증거이며, 위험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위험을 방치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대수의 법칙을 증명하고 중대한 실수를 피하고자,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나태한 마음을 다스리며 실천하는 ‘현재형’만이 진정한 대응이다. 대응한다는 것은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기다린다는 것은 곧 대응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기다림과 대응이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러워질 때, 기존의 단단한 아집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깨지면서 깨우치게 되고, 깨우치면서 비로소 깨어나며, 깨어나면서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사 이치다.
투자는 주관적 자유를 제물로 바칠 때, 객관적 진실을 얻어내는 일이다. 익숙한 껍데기를 내려놓아야만 낯선 본질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고, 그렇게 커지고 변하게 된다. 익숙한 욕망을 내려놓고, 낯설지만 정직한 원칙의 숨결을 스스로 느낄 때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씀으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을 행하는 셈이지. 그래서 전에 자네한테 틈만 나면 말하지 않았던가. 사상가나 금욕주의자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고, 본연의 자아를 되찾고 자아를 실현하도록 애쓰라고 말일세.”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자꾸만 외부에서 대단한 비법을 찾으려 하기에 투자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기에, 제자리에 갇힌 채 분명함과 흐릿함 사이에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선명하게 보이는 길은 저점을 기다려 매수하는 것이며, 단순하게 들리는 비결은 손실일 때 짧게 자르고 깨끗이 잊는 것이다. 선인들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 두어 줄의 핵심으로 수렴되며, 그 단순함을 ‘실천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하지만 그 단순함의 강가에 도달하는 자도 적을뿐더러 실천하는 자는 극히 드물기에, 대부분 투자자는 시장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는다.
누군가 투자의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당신 자신’ 안에 있다고 답하면 된다. 비법은 이미 마음 안에 있기에 투자를 8할의 심리 게임이라 하는 것이다. 결국 비법이란 애쓰는 마음을 정교하게 다듬어 가는 인문학적 소양이며, 그 길은 독서로 이어진다. 책 속에 사람의 마음이 있고, 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흐름을 투영한다. 그렇게 판단하며 세워진 원칙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뿌리 내리게 된다.
투자의 비법은 당신 안에 이미 있다. 핵심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인문학적 소양으로 원칙을 더 선명하게 닦아내는 것이다.
젊은 날의 호기로 정의를 부르짖거나 대의를 내세우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요란하게 외치지 않아도, 드러내어 뽐내지 않아도, 그저 침묵 속에서 세상의 나아짐에 작게나마 공감하고 호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한 세상을 굴러가는 진정한 수레바퀴가 아니겠는가. 작은 것을 크게 포장하려 애쓰지 않고, 볼품없는 것을 화려하게 치장하려 들지 않으며, 오직 '행함'이라는 침묵의 용기로 삶의 끝을 향해 나아가길 조용히 소망한다. 그 정직한 노동으로 흐려져 가는 육신이 아주 가끔이라도 따스한 햇살 아래 평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원칙을 지키는 삶이 잔잔한 꽃길로 이어짐을 알면서도, 내 안의 끊임없는 일렁임에 그 길이 무수히 부서졌던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해안가를 때리는 파도처럼 무한한 세상을 잠시 스쳐 지나갈 인간은, 삶 전체를 뒤흔들 무언가를 소망하며 그렇게 살다가 가기를 꿈꾼다. 마음속 옹달샘 깊은 곳에서 반복되는 외침을 외면하는 생은, 특히나 그 진실을 알아버린 이가 응답하지 않는 생은 버거울 뿐이다. 욕심이 얼마나 욕심스러운지를 알아갈수록, 원칙으로 정한 원 안에서 무한히 반복하며 그 욕심의 조각들을 조금씩 떼어내는 실천의 삶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침묵하며 행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다. 위대한 변화는 목소리가 아니라 정직한 발소리에서 시작된다. 발자국이 곧 운명이 될 것이다.
안경알을 안팎으로 정성껏 닦아내야 세상이 맑게 보이듯, 시장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그 이해를 내면에서 소화하는 주관적 협치가 투자의 본질이다. 그러나 현실은 ‘1+1=1’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는 불협화음의 연속이다. 지식을 쌓는 것도, 쌓인 지식에 취해 우쭐거리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다. 경험하지 못한 올바른 길을 인식하는 것도, 감정의 네온사인이 유혹하는 비탈길에서 의지의 펜으로 그린 길을 고수하는 것도 투자자에겐 매 순간이 고통이다. 자본주의가 그리는 파동에 생을 건 투자자는 필연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올곧은 투자자가 고단하게 오른 그 길 곳곳에 남긴 표식들이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며, 마침내 선명한 우상향의 곡선을 완성한다.
집착할수록 시간은 그 집착의 굴레를 따라 흐를 뿐이지만, 놓아버릴수록 세상은 선명해진다. 사람도, 현상도, 삶 자체도 흘러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님을 나이 듦의 지혜가 일러줄 때 비로소 선인들의 희미한 미소를 이해하게 된다. '아닌 것'이 빨리 아니라고 인식되어야 삶에서 '아닌 것'들이 비워지기 시작한다. 변화의 정오쯤에서 시계추는 속삭인다. “당신이 정한 원칙을 분침과 시침 삼아 묵묵히 원을 그리며 반복하다 보면, 찰나 속에 깃든 영원을 알게 될 거예요.” 투자자에겐 오직 외길뿐이다. 위험과 기대수익 사이에서 ‘정함’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성장하는 것이 숙명이다. 원칙이 부러지면 성장하던 나무도 꺾이고, 맹세의 깃발만 바꿔 흔들다 주름만 깊게 팰 뿐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이기에, 남들과 다르지 않은 행위로는 남들이 꾸는 몽상에 머물 뿐이다.
당신이 그려가는 원칙의 원이 곧 영원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자는 타인과 달라야 한다. 그 다름이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꿈을 꾸는 것만큼 오히려 관절은 무뎌질 것이다.
“그는 마치 수줍어하는 여성에게 구애할 때처럼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작품에 매달렸으며, 마치 거대한 가물치와 씨름하는 낚시꾼처럼 사력을 다해 싸웠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오히려 뭔가를 깨우쳤으며, 그럴수록 그의 감각은 더 섬세해졌다.”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확률을 통제하는 것은 기다림이며, 위험을 통제하는 것은 대응이다. 수익을 향한 노력은 운이 작용할 확률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로 증명되어야 하고, 잃지 않겠다는 의지는 손실이 깊어지기 전 단호히 잘라버리는 대응으로 나타나야 한다. 기다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고, 손실이라는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그 이면의 원리를 깨치려 대응할 때 투자자의 감각은 깊이를 더하게 된다. 만약 기다림도 대응도 없는 매매가 반복된다면, 감각은 무뎌져 결국 시장의 소음 속에 매몰될 뿐이다.
확률적 사고를 바탕으로 위험을 통제하는 그 '자제력의 크기'가 곧 투자자의 실력이다. 각자가 빚어낸 자제력의 그릇만큼만 수익을 담을 수 있다. 자제력이 약한 이의 그릇은 밑이 빠진 것과 같아, 아무리 큰 기회가 찾아와도 담기는커녕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치명적인 손실은 대개 추세 앞에서 아집을 부리거나, 등락하는 파동의 마디마다 심리가 무너져 가격을 쫓아다닐 때 발생한다. 이는 지독한 욕심이 만들어 낸 아찔한 착각에 불과하다. 등락의 관점은 시장의 마디마디를 취하며 수익을 누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시장이 그려내는 파동의 미학과 예술을 이해하려는 장인의 시선이다.
난관은 감각을 섬세하게 만드는 연장이다, 난관은 가로막는 벽이 아니다. 손실이라는 난관 앞에서 깨우침을 얻는 대신 원망과 집착으로 스스로 벽을 쌓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여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들뿐일세.”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숱한 실패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길이라 할지라도, 인생을 바꾸는 도전이기에 투자는 분명 값지다. 투자자는 본질적으로 어떤 보수를 받는 사람인가. 숱한 실패의 파고 속에서도 기어이 운이 작동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보수하는 사람이다. 마치 정교한 기계를 설계하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관리자와도 같다. 이렇듯 해야 할 일은 명확하고 당연하지만, 우리의 행동이 매번 엇박자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장의 조건과 상황은 매번 변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그 변화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과거의 익숙함에서 버티려 하기 때문이다.
가볍게 치고 빠져야 할 자리에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진다. 기민한 대응 대신 스스로 세운 우상 앞에 기도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시장에서 목격되는 고요한 여유로움은 거저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성급함이 지배하는 시간 속에서 한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 얻어낸 투쟁의 산물이다. 갈 길은 명확하다. 자신의 감정을 맑게 씻어내고, 나날이 평온을 쟁취하여 여유로움을 키워가는 실천뿐이다.
여유로움은 나날이 쟁취하는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여유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태만이 아니라, 마음을 늦추지 않는 긴장에 익숙해진 결과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즉 운이 상당 부분 지배하는 확률적인 영역을 다룰 때는 생각을 많이 할수록 승률은 오히려 낮아지기 마련이다. 확률의 세계에서는 높은 확률의 잣대를 세워 그것을 믿고 그저 무심하게 반복하는 것이 왕도다. 일단 게임이 시작된 후에 덧붙여지는 생각은 잦은 실수를 유발하고 감정의 실타래를 엉키게 할 뿐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하거나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명확한 세상과 달리, 확률적인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이 영역에서는 생각이 생각을 낳으며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마음 곳곳에 불안과 불편함의 덫을 놓는 것과 흡사하다.
실전 이전의 생각은 충분히 사색이라 칭송받을 만하지만, 일단 전쟁터에 들어서면 생각은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음을 주장하는 궤변과 다를 바 없다. 파동은 본래 확률적이기에 등락의 관점이든 추세의 관점이든, 마치 낚시처럼 되는 날과 안 되는 날, 운수 좋은 날과 머피의 법칙에 걸려 고생하는 날들이 교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확률적인 것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만큼 다루기가 수월해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자신을 위한 운이 작동하게 하려면, 자신이 자신의 위험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 운이 작동할 수 있는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평온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투자자의 진짜 실력이다.
실전의 생각은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생각이 멈추는 곳에서 확률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확률의 세계에서 수용은 현명함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인간은 나르치스(로고스, 이성, 머리)와 골드문트(파토스, 감성, 가슴)라는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 로고스가 보편적인 법칙으로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을 인식하고 따르는 분별과 절제라면 파토스는 충동이나 정열을 의미하며 그때그때 주변 환경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이나 정서를 의미한다. 투자는 본질적으로 분별과 절제를 중시하는 나르치스의 영역이지만, 슬프게도 다수의 인간은 충동과 정열에 휘둘리는 골드문트의 기질을 타고났다. 이 진화론적·성격적 괴리가 투자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결국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에토스(Ethos)'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에토스란 단순히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상반된 방향으로 요동치는 인간의 가능성을 같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하나의 지향점으로 모아가는 인격이다. 투자의 성취는 로고스적 기질을 타고났거나, 에토스적 노력을 통해 후천적으로 로고스적으로 되었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감정과 직감에 치우친 골드문트의 영혼을 가졌음에도 시장에서 꿈을 현실로 바꾸고 싶다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는 자신의 불완전한 기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기 객관화'다. 둘째는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인정하되, 약점을 고치느라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 강점을 발굴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원칙에 자신의 강점이 반영되어야만 비로소 실천이 쉬워지고, 거친 풍랑 속에서도 그 원칙을 그나마 수월하게 지켜낼 수 있다.
강점을 강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나르치스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 골드문트만이 가진 섬세한 직관이라는 강점조차 놓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