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극복하는 크기만큼 성장한다.

by 황금지기


누구나 쉽게 꿈꿀 수 있고 아무나 진입할 수 있기에, 투자의 본질이 ‘지독한 어려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다만 다수가 이 상식을 무시할 뿐이며, 머리로 이해하는 ‘정서적 가능’과 몸으로 실천하는 ‘실제적 극복’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지 무지할 뿐이다. 이론적 가능성이 실제 심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격차는 아무리 궁리하고 상상해도 그 너머보다 클 수밖에 없다. 시장의 부가 극복해 낸 소수에게 독점되는 이유는 바로 이 심연을 건넌 자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꿈꾸는 정서적 가능성에만 머문다. 좀처럼 실천이라는 감정의 극복에 이르지 못한 채,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헛된 희망과 무기력한 다짐에 의지하다 결국 그 희망의 타성에 젖어버리고 만다. 실전에서의 극복은 사력을 다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은 치열한 전쟁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내일이면 당연히 나아질 것이라는 정서적 올가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치열함이란 곧 고통스러운 반복과 거듭되는 실패를 의미한다. 이 과정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전에는 내일이나 희망 같은 막연한 기대는 그저 오늘과 같은 내일을 반복시킬 뿐이다.


희망이라는 고문을 끝내는 길은 치열한 오늘을 사는 것이다. 원칙을 부러뜨리는 행위가 밤하늘의 별처럼 시장 흐름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한, 부분을 지켰다가 전체가 무너지는 결코 가능성 없는 동그라미 안을 맴도는 희망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삶이 던지는 도전 요청을 뿌리칠 때, 인생은 말라붙어 버린다. 이루지 못한 꿈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긴다. 일상이 비루하고 힘들 때면 짜증과 화가 치밀기도 할 테다. 캠벨은 말한다. (닥쳐온 모험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길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된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을 때의 절절함이 있어야 한다.”

<안광복, 도서관 옆 철학 카페>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일상의 정직함과 달리, 투자는 너무나도 비선형적이며 창조적인 영역이다. 아무리 애써도 성과는 안개 속에 묻히기 십상이며, 정답 없는 확률 위에서 수익의 누적을 쌓아가는 고도의 감성노동을 반복해야 한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감정을 극복하며 원칙에 마음을 단단히 고정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손익의 등락을 떠나 원칙을 지켜가는 그 '긍정적인 과정'을 묵묵히 행하다 보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단단한 무언가가 내면에서 솟아 나온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이 아픈 첫 구절은, 결국 투자자가 자신을 뚫고 나와야 하는 운명임을 증명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그것은 또한 더 높은 부의 영토로 날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인 산통이다.




“성숙한 사람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삶과 세상에 대한 의무감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칭찬과 비난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다. 누가 나서서 추켜세우거나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인격을 갈고닦게 된다는 뜻이다.”

<안광복, 도서관 옆 철학 카페>


투자의 세계에서 외부 변수는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무작위의 영역이다. 정답이 없는 시장에서 외부의 움직임에만 매달리는 것은 결국 기도와 요행 같은 소극적인 수단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과 같다. 이러한 소극적 수단에 얽매일수록 정작 통제해야 할 유일한 변수인 ‘내부의 심리’에 대한 통제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다수는 뇌동과 추격의 굴레에 갇히지만, 소수의 성공한 투자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내부 변수를 다스리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투자자는 내부 변수의 통제를 통해 운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지속해서 조성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이 곧 실력이기에 투자는 결국 철저한 심리 게임이다. 투자자가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마음을 절제하는 것이며, 선택하고 집중한다는 것은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여유로움과 덤덤함이다. 이 모든 통제의 시작은 원칙을 지키는 행위를 그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감사한 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원칙이 당장 얼마만큼의 수익을 가져다줄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원칙을 지키며 다져진 감각이 훗날 그 그릇의 크기를 결정할 것이다. 내부 변수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 투자자는 철이 들고, 주관의 안개에 가려지지 않는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에 두게 된다.


내부 변수에 대한 의무감이 계좌를 지탱하는 토대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누구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의 공평한 관찰자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누구일까? 자기 자신을 부족하고 허점이 많다고 인정할 줄 아는 자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곱씹는다. 그래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들은 고통을 자신에게 뭔가 그릇된 점이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로 여긴다. 이들에게 아픔은 성장통일 뿐이다.

<안광복, 도서관 옆 철학 카페>


투기와 투자를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확률을 알고 ‘때’를 기다리느냐의 여부다. 확률을 몰라도 투기이며, 알아도 기다리지 못한다면 그 역시 투기다. 결국 투자와 투기의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에 대한 이해에 있다. 가격에 집중하면 투기에 가깝고, 시간에 집중하면 투자에 가깝다. 현재의 가격에 시선이 머물면 투기꾼의 길을 걷는 것이요, 거대한 흐름의 시간에 시선을 두면 투자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성장은 언제나 시간과 동행한다. 금리 인하라는 확률 높을 때를 기다리는 마음, 파동의 각도가 우상향일 때 더 갈 것 같은 유혹을 뿌리치고 원칙의 자리를 기다리는 마음이 곧 투자의 마음이다. 태만하여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누구나 언제든 투기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 성급함에 흔들리고 욕심으로 안개가 자욱한 마음에는 뇌동과 추격이라는 악이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 투자자는 시간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선한 성장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다.


가격은 당신을 현혹하지만, 시간은 당신을 완성한다.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남 탓을 멈출 때, 뇌동이라는 악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잔뜩 먹구름이 끼어도 낮의 밝음이 우세하고,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달이 밝으면 길을 찾아갈 수 있듯이 희망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쬐어도 스스로 감정의 커튼을 쳐 닫아버리면 어둠이 지배하고,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밤이라는 핑계로 길 찾기를 포기하면 절망 또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린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생이 다할 때까지 이어지는 이 기 싸움이 곧 인생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마음을 먹느냐는 작은 차이가 투자자 인생 전체의 성패를 결정한다.


투자자의 성장은 오직 ‘자기 극복’의 크기만큼만 이루어진다.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실력이라 불러도 충분하겠지만, 투자는 결코 운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진정한 실력이란 남들과 다른 자제력에 있다. 이 자제력은 운이 작동하도록 이끌어가는 힘이며, 상황이 나빠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버티며 원칙을 거듭하게 하고, 그 거듭됨이 마침내 수익의 누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거대한 강의 발원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작은 손실이나 이익에 연연하는 본성을 타고났기에, 이 본성을 극복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투자의 전부이기에, 대부분은 이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다 찬 바람이 부는 시장의 끝자락에서 상처 입고 떠나가게 된다.


자제력은 운을 흐르게 하는 수익의 발원지다, 운은 자제력이라는 수로를 따라 흐른다. 눈앞의 작은 손실에 매몰되어 스스로 감정의 커튼을 굳게 닫으면 수로도 닫힌다.




치솟는 감정에 휘둘릴수록 내 영혼은 더욱 약해지고 불안해질 뿐이다.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감정을 다독이며 무엇이 정의롭고 올바른 대처인지를 생각할 때, 나의 영혼은 어느덧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처럼 굳건해질 것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부당한 대접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견뎌냈느냐이다.”

<안광복, 도서관 옆 철학 카페>


짐승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인간은 감정을 다스리며 사리를 따질 줄 안다. 복받치는 감정대로 휘둘린다면 짐승과 뭐 다를 게 있겠는가. 세네카는 간곡하게 충고한다. “화가 나지 않으면 용감해지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야만 활기차게 움직이며, 두려움이 없이는 잠잠해질 줄 모른다면, 마음은 진정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이리저리 나뒹굴 수밖에 없다.”


두 번 긍정하는 자는 결코 불행해질 수 없으며, 그의 영혼은 거목처럼 우뚝 선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원칙에 집중하겠다’라는 첫 번째 긍정과, ‘그 과정에서 마주할 온갖 시련과 힘겨움까지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라는 두 번째 긍정이 만날 때, 투자자는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치솟는 감정은 이성을 부식시키지만, 그 감정을 관조하며 내딛는 이성적인 한 걸음은 성취로 인도한다.


감정이 흔들림을 멈추는 순간, 시장은 당신의 영토가 된다. 부당한 손실 앞에서도 원칙적 대응을 택하는 처신의 무게가 실력을 결정하며, 화와 욕망에 기대어 움직이는 자는 결코 시장의 안정을 누릴 수 없다.




각도가 너무 가파르지도 않고,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않으며, 모호하게 걸치지도 않아야 아름다운 그곳처럼, 오래 보아서 예쁜 시장 또한 그러하다. 감각의 핵심인 '직관'은 오직 실전이라는 양분을 먹고 성장한다. 이 직관을 갈고닦기 위해 잃지 않고 시장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 그것만으로도 투자의 목적은 충분하다. 실전의 시간을 견디며 세공되는 직관은 말 그대로 시장에서 '직접 관찰'하며 오래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재능이다.


“역사는 기어가지 않는다, 비약한다”라는 말처럼, 시장의 파동 또한 따라잡지 못하도록 비약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스스로 수익을 자르지 않고 시장의 흐름에 온전히 맡겨야 하며, 강한 파동이 비약하려다 멈칫거릴 때는 미련 없이 나와주어야 한다. 이 판단은 반복된 경험을 통해 감각을 더해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시장이 유독 어려운 이유는 짧은 시간의 강한 ‘꼬리 파동’이 전체의 성패를 좌우하고 평균 진폭을 채우기 때문이다. 쌓인 경험으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순간을 버티게 해 주고, 얽힌 실타래를 단순하게 풀어주는 힘, 그것이 바로 직관이라는 투자자의 재능이다.


직관은 시장과 함께 호흡한 치열한 시간의 퇴적물이다. 직관은 현장에서 세공되며, 시장을 떠나지 않고 그 결을 응시한 만큼만 그 빛을 발한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보면 세상을 좁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보이는 대로 보아야 비로소 넓고 사실적인 진실을 마주할 수 있기에, 인간의 마음은 제대로 보기 위해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은 제 마음대로 고집을 부리는 아집에 휩싸이는 일이다. 아집에 갇혀서는 넓은 세상의 큰 흐름도, 사물의 본질도 결코 볼 수 없다. 투자자가 흐름을 흐름 그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에 그 어떤 편견이나 정해짐도 없이, 마치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객관적 시선으로 시장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음에 정해짐이 없어야 자세히 볼 수 있고, 자세히 볼 수 있어야 크게 볼 수 있다. 결국 크게 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 정해짐이 없는 마음을 ‘무심(無心)’이라 하고, 자신을 잊은 마음을 ‘무아(無我)’라 정의한다면, 흐름을 왜곡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가 바로 무심과 무아다. 원칙으로 정한 선의 경계에 섰을 때 찾아오는 당연한 불안은 오직 반복되는 실천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시장에서 꿈을 꾸는 한 이 불안은 필연이다. 불안에 정면으로 맞서며 우상향의 계단을 한 단씩 오르는 것은 투자자이자 인간의 숙명이다. 타고난 기존의 마음을 죽여야만 투자에 적합한 새로운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그 마음 위에서 흐름을 꿰뚫을 새로운 통찰이 피어난다.


정해짐이 없는 마음이 실체를 본다. 마음의 고집을 꺾어야 시장의 파동이 보인다.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라는 마음의 정해짐 때문에, 시장이 보내는 신호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불행은 되풀이된다.




“우리는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 거저 얻는 확신에서 벗어나 진중한 재검토로, 명확한 자기 이해로 옮겨 가려 – 애쓰는 정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적 은유는 종이 위에다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사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시장의 흐름을 안다면 길은 보이겠지만, 설령 길이 보인다고 해도 그 길은 여전히 흐릿할 뿐이다.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맞춰 세운 원칙의 길을 '실제로 걸을 때'에만 길은 점차 선명해진다. 글쓰기가 종이 위에 생각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애쓰는 행위라면, 투자는 시장이 그리는 파동 위에 불필요한 생각을 보태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애쓰는 행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제가 필요한 아이 시절을 거치듯, 시장이라는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통제가 필요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세상사에 익숙한 어른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방황은 시작된다. 시장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엄격히 통제해야 하는 ‘아이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직 스스로만 통제해야 하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절제가 무너지는 치명적 상황에 골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식과 행동 사이의 기나긴 모순에 갇힌 자아를 맞닥뜨리며, ‘원칙을 세우는 나’와 ‘감정에 휘둘리는 나’의 합이 진정한 자아임을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실천이 더해질수록 글이 깊어지듯, 실천이 누적될수록 원칙은 부러지지 않는 단단함을 갖추게 된다.


파동 위에 생각을 보태지 말라, 그렇게 보태지는 것들이 결국에는 복잡함이다. 투자는 무언가를 더하는 기술보다는 생각을 빼내는 예술에 더 가깝다.




“모범적인 회고록이 명확히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삶에서 곧장 건져낸 이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하는 ‘나’는 정확히 누구인가? 회고록 작가는 이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답이 아닌 깊이 있는 탐구로써…, 자신의 삶을 일정한 모양으로 빚은 글이 무관심한 독자들에게 가치 있는 작품으로 다가가려면 극적인 각색을 거치고…, 주변의 우연한 사건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들려주는 애매함에서 벗어나…, 자기의 충동을 정밀하게 밝혀내는 명료성으로 내적 방향을 트는 것이다.”

<비비안 고닉, 상황과 이야기>


투자의 세계에서도 자기 극복을 넘어선 철저한 자기 자제 없이는, 의지라는 불꽃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꺼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촛불은 당장 밝아 보일지 몰라도 그 지속성은 고작 촛대의 길이만큼이며, 원칙의 불꽃이 자주 꺼진다는 것은 끝없는 정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단계는 형광등처럼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빛을 내는 안정적인 감정의 상태다. 경험하지 못한 길이기에 낯설고 힘들며 마음대로 하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만, 실천이 반복되어 습관으로 굳어져야만 원칙은 형광등처럼 편안하고 밝은 빛이 되어 투자자를 인도한다.


실천이 뒷받침될 때 원칙의 뼈대가 완성되며, 올곧은 습관이 거듭될 때 그 뼈대에 비로소 살이 붙는다. 성장하고 나아지며 진정한 부자가 되는 길은 ‘앎’을 실천하여 ‘지혜’로 바꾸고,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과정에 있다. 이 경험이 쌓일수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명료해진다. 저자의 충고처럼, 우리는 우리 살가죽 안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면 답하는 그 ‘낯선 타인’인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만 한다.


원칙이 의지를 넘어 습관이 되어야 비로소 의지할 수 있다. 실천이라는 뼈대를 세우지 않은 원칙은 살가죽 아래 숨은 나약한 타인에게 휘둘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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