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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그래야만 하는 칙령이다.

by 황금지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에게 내리는 칙령이 원칙이며, 원칙을 반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이 지혜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야 비로소 행동은 자연스러워지고, 체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행동을 담보하게 된다. 아무리 다짐하고 다그치면서 다시 한번을 외쳐도 손실은 고통스럽고, 반복은 지루하기 마련이지만, 지혜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개 기대치가 높으면 부러지기 쉬운 법, 최고의 선택을 고민할수록 복잡해진다. 정제될수록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통찰은 깊어진다.




원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투자자에게 있어 우상향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이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자신과의 치열한 약속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내려야만 하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칙령이 원칙이다.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내어놓아야만 하는 왕조 시대 왕이 내렸던 칙령을 자신에게 내려야만 하고, 지켜야 하고, 도저히 못 하겠거든 떠남이 백번 옳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한두 번 시도해서 안 되면 참으로 다스리기 힘든 법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한다는 건 ‘never’를 넘어야 하기에 절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청춘도, 나이도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기에 자본주의의 생명줄과도 같은 돈을 위해 누구나 쉽게 쏠리게 되는 투자는 득보다는 해가 많다. 달러라는 기축통화로 인해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써의 투자는 부로 가는 필연이지만, 더 나빠질 확률이 훨씬 높고, 어렵고도 어렵기에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게 짧은 인생에서 더 값질 수 있다. 투자는 인간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내면으로 가는 극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인지적 편향을 극복해야만 하지만 편향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자 진화의 산물이기에 줄여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동안 이어졌던 고요함은 어느 순간 성냄으로 아우성이 되고, 믿었던 평상심은 탐욕에 끊임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투자자의 최선은 부정적 사건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고 특히 시장에서 손실을 보지 않을 것이라 믿어버리는 낙천적 편향과 버티면 시간이 높은 확률로 좋은 결과를 만들 거라는 낙관주의라는 두 가지 인간의 본성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투자에서 너무나도 자주 원칙을 부러뜨리는 건 희망에 의지하는 막연한 기대이고, 원칙이란 묘목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자꾸만 시들어버리는 것 또한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기대 때문이다. 사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은 원래부터 이기적이고, 이기적일수록 기대치가 높다. 기대치가 높을수록 부러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기심을 완벽히 극복한 이타심은 사랑하는 이에게 밤하늘의 별도 따주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기에 현명한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원칙과 조화로운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원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모른다는 걸 자신이 알아가는 과정 즉 인문학적 소양을 담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많은 파동에서 만들어지는 자리는 앞고점과 앞저점과의 거리가 협소한 박스 흐름 즉 매수도, 매도도 확률이 비슷한, 유리해도 그 차이가 크지 않은, 이것도 저것도 되는 애매한 자리가, 애매해서 어려운 자리가, 어려워서 심리가 복잡해지는 자리가, 복잡해서 원칙이 쉽게 부러지는 자리가 많다. 결국 단순함에 닿지 못해 어려운 것이고, 어려우니까 반복은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투자의 세계에서 불확실한 자리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상수라고 부르는 이유다. ‘맞을지 안 맞을지는’ 다시 한번 모르지만, 확연한 자리를 기다리는 게 상수이며, 대응이 전제되어 ‘맞추고, 틀리고는’ 의미가 없어진 심리 상태가 궁극적 도달점이 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복잡계에선 복잡하긴 매한가지인 지식의 더함이 아니라 지혜의 깊이를 더함이 옳다. 깊이를 더 한다는 건 자신의 심리와 조화로움을 찾고 지혜로 승화시키는 걸 의미한다. 지식이 지혜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야 비로소 행동은 자연스러워지게 된다.




지식의 사전적 의미는 ‘학습하고 경험함으로써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관한 정보 및 사실의 수집’이다. 반면 지혜는 ‘삶을 판단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투자자에게 요구되는 끝없는 선택과 책임은 지혜의 영역이다. 시장에서 기법으로 대표되는 지식만으로는 투자자에게 진실로 필요한 단 한 가지 즉 원칙을 지키면서 버티고 나아가는 행동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는 심리로 접근해야 지혜가 되고 혜안이 얻게 되면서 밥을 먹는 것처럼, 그냥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자신과의 약속, 원칙을 지키는 단 한 가지가 투자자 일생을 좌우한다. 원칙을 지켜가는 굳은 심지가 아니고서는, 버티는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는 부의 징검다리를 건널 방법이 없다. 마음으로 정제되지 않은 지식은 소란스러움일 뿐이기에, (머릿속이 소란스러우니 원칙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지식을 담아도 빈 수레의 요란스러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이 심리와 체화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서 지혜로움에 닿아야 비로소 지혜가 행동을 담보하게 된다. 기법의 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식수준에서 눈으로 보아서는 기법과 하나가 (무아지경이) 될 수 없고, 정성을 담아야 마음으로 보는 지혜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마음으로 보아야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수가 타점을 찍어줘도 파동의 흔들림에 따라 심리의 흔들림이 제각각이기에 수익은 천차만별인 대응의 세계이기에 마음으로 보는 지혜의 크기와 수익은 정비례한다고 봐야 한다. 하나의 대상에 온 정성을 다해 길들기 전에는 지속해서 반복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기법의 쓸모도 이와 같다.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근육이 늘어가듯 마음의 한계를 넘어설 때 심리는 단단해지게 된다. 단단하지 않고서야 원칙을 부러뜨리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인간 행복의 적은 고통과 지루함이다.’

<쇼펜하우어>

이 명언은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면서, 지루함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인생에서 고통과 지루함은 피할 수 없는 동시에 성장의 양분이다. 고통은 강해지기 위한 필연이고, 지루함은 성장의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필연이다. 투자자에게 손실의 고통은 손실 회피 편향으로 인해 극복하기에 대단히 힘든 것이고,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지루함은 성급함과 탐욕이라는 인간 본성으로 인해 반복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다짐하고 다그치면서 다시 한번을 외쳐도 손실은 고통스럽고 반복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손실을 짧게 자르면서,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길은 ‘남들이 가지 않는 뒤안길 즉 꽃길’이다. ‘인생은 고통과 지루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손실을 자르는 고통과 자리를 기다리는 지루함은 투자자 인생의 숙명이다.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의 매매는 지겨움을 넘어서 너무나도 참아내기 힘든 기다림의 연속이다. 올바른 경험이 감각에 닿으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즐거움이 더해지고, 누적에 즐거움에 더해지고, 대응이 자연스러움이 더해지면서 그렇게 1%가 된다. 기다림에 익숙해질수록 대응도 깊어지게 된다. 대응의 깊이로 수익을 결정된다.그렇게 기다림이 쉬움에 닿아야 기다림은 평범한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지게 된다. ‘지금 당장 아무리 감정이 동해도, 돈이 급해도 (내가 세운 원칙이니까) 꾹 참아보자.’ 결국 이게 전체를 좌우한다. 대부분이 감정에 치우치면서 원칙을 숱하게 부러뜨리면서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 원칙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굳은 심지가 자기장을 만들고 그 자력이 점차 커지면서 누적이 되고, 돈이 편안하게 새끼를 치면서 부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가기에 결국 정답은 알고 있으되 행하지 못할 뿐이다.




오늘 당신은 얼마의 시간을 green zone에서 머물렀는가? 하루하루 이어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투자자 인생을 결정한다. 오늘 하루 진지하지 못하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게, 작은 실수 하나가 눈 덩어리가 되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게 투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식으로 장기나 스윙 투자한다면 수익 상태 자체로 충분하지만, 손실 상태라면 모든 시간을 red zone에 머물게 된다. 손실 상태는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이기에, 물타기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데이트레이딩 투자라면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진입 이후 바로 손실이더라도 정한 자리에서 자르면 대부분 시간을 green zone에서 머물게 된다. 경험으로 정제하지 못한 지식이기에, 내면이 너무나도 소란스럽기에 손실을 자르지 못한 채 여러 감정의 장작이 더해지는 것이다. 감정이 엉키면서 달아오른 red zone에서 마음속 장작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지혜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투자자에게 있어 지식에 깊이를 더해가는 사색은 당연한 과정이고, 사색의 깊이가 지혜에 닿아야 비로소 기다릴 줄, 단식할 줄 알게 된다.




투자는 현재할 수 있는 것 중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택을 고민하면 할수록 복잡해지게 된다. 차악을 반드시 포함해야만 하는 최선이 (시장에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재간이 없다) 투자에서의 대응이다. 인생사 선택지 모두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다 잘할 수도 없다. 투자에서도 다 좋을 수는 없으며, 나빴을 때의 행동이 반복 가능성을 결정한다. 투자자에게 있어 인문학은 나빴을 때의 심리적 대응능력이기에 파산하지 않고, 반복하기를 원하는, 운이 작용하는 영역까지 버티면서 실력을 향상하기를 원하는, 부의 징검다리를 건너기를 원하는 투자자의 인생 필수 교양과목이다. 성급함과 욕심을 끊임없이 정제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으로 단순하게 바라보는 날들이 거듭될수록 단단해지는 곳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성급하다는 건 무리한다는 것이고 무리하게 되면 보이던 것도 보이지 않게 되며, 욕심을 부린다는 건 힘이 들어간다는 것이고 힘이 들어가게 되면 여유로울 수가 없다. 세상사 이치가 그러하듯 무리하면서 힘이 들어가서야 어찌 반복할 수 있겠으며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행복이나 성과 = 결과 – 기대치」이기에 결국에는 무리하거나 힘이 들어간다는 건 기대치가 높다는 것이며, 높은 기대치는 행복이나 수익과 반비례한다는 게 선인들의 선례다. 대중이 가지 않는 외딴곳에서 사색하고 기다리면서 단식해야 내면에 다가가게 되지만, 자꾸만 감정에 이끌려 지식으로 소란스러운 선술집에서 대중과 어울리는 자신에게 놀라곤 한다.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다는 건 지식을 늘리기 위함이기보다는 원하는 것에 집중하여 깊이를 더하기 위함이다. 어설프게 아는 게 늘어날수록 무모함, 망설임도 늘어나게 되므로 오히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세수하듯 머릿속을 씻는 독서를 통한 소양이 쌓이면서 지식은 내면에서 정제되고 그 깊이가 깊어질수록 수면 위의 흔들림 아래 고요함으로 세상을, 사물을, 현상을, 파동을 바라보게 된다. 정제될수록 단순해지고, 단순해질수록 통찰은 깊어진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선악의 저편 – 니체>

투자자가 파동을 그릴 때 최대의 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하는 자신이다. 생각하는 자신이 적이기에 생각할수록 그려지던 파동에 안개가 드리우면서 흐려지게 된다.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 동시에 적이 알게 되므로 생각이 들어갈수록 생각은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시장이 그리는 파동에 생각을 개입하지 않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에 오랜 시간 시장에 머물더라도 대부분 투자자의 방은 ‘부러진 원칙’들이 방 구석구석에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다. 무지나 오랜 실패로 인한 흐려진 선구안으로 ‘미래의 나’에 희망을 걸게 되는 부질없음을 반복하는 투자자가 너무 많다. 세수하듯 나날이 마음을 청소하는 수고로움을 더하기 전에는 사람은 바뀌지 않음을 투자자는 너무 늦게 알게 된다. 시장에서는 원칙을 반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라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겼다. 지금 모습이 당신이고 대개 앞으로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보는 게 확률적 추론이고 사람의 긍정적 변화는 하루하루 달라진 행위들의 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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