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의 지금은 지금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by 황금지기


지금 품는 생각과 행동, 감정과 선택은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간다. 지나간 수많은 ‘지금’이 응축되어 오늘의 결과를 맺었기에, 모든 현상을 ‘내 탓’으로 돌리면 삶의 매듭은 의외로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모든 원인을 뜻한다. 인(因)은 내면의 숲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심는 행동과 선택이라는 ‘씨앗’이며, 연(緣)은 그 씨앗이 싹트게 하는 햇빛과 공기, 온도와 같은 환경, 즉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생각과 감정이다. 간접적 원인인 지금의 생각이 직접적 원인인 행동을 결정하기에, 투자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심리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투자의 배움이 향하는 궁극의 지점은 지금의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스려 ‘좋은 연(緣)’을 만드는 데 있다. 원칙을 사수하는 기술은 곧 들끓는 마음을 잠재우는 기술이다. 지금 시간과 맺은 인연이 훗날의 결과를 결정한다. 결과는 원인을 닮기 마련이기에, 나중의 ‘지금’은 오늘 보낸 ‘지금’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요행이라는 로또가 아니고서야, 인생은 정직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합계다. 부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이 합하여져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라고 했다. 모든 현상은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시절 인연(時節因緣)이다. 투자자는 씨앗에 물을 주고 햇빛을 받는 인고의 시간을 버티며, 시절 인연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내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인과 연이 합하여지는 시간을 고요히 기다릴 줄 알면 인연이 다해 흩어지는 순간에도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도 성급한 건 아직 설익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서두르는 건 서툴기 때문이고, 자꾸만 초조한 건 초보티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찰나의 영감을 붙잡아 승화하는 것이라면, 투자는 불현듯 솟구치는 감정을 다스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작고 ‘우리’는 크며, 내 마음은 미세하나 눈앞의 ‘현상’은 거대한 전체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 개별 직원의 주인의식을 일깨워 전체의 힘을 모으듯, 투자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소한 주관의 틀을 깨고 거대한 현상을 관조해야 한다. 관조란 무엇인가. 그것은 들끓는 주관의 소란을 떠나 고요한 마음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객관의 시선이다. 우주의 섭리는 명확하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하나를 보내야 한다. 주관이 비워진 자리에 비로소 객관이 들어서고, 생각이 비워진 자리에 현상이 채워진다. 이처럼 덜 중요한 것을 비워 꼭 필요한 것으로 채우며 스스로 단단해지는 과정, 그것을 ‘성장’이라 부른다.


하나가 가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기어이 찾아온다. 세상 만물은 그렇게 가고 오며 끊임없이 변한다. 투자자의 진화 또한 이 변함의 법칙 위에 서 있다. 변하기 위해서는 관조해야 하고, 관조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현상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명심하라. 시장은 당신이 막연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지란지교(芝蘭之交)의 다정한 벗이 아니다. 시장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야 하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냉정한 대상이다. 수익을 안겨줄 때는 무한히 감사하되, 원칙을 어기게 하거나 손실의 올무를 던질 때는 그 어떤 감정적 아부나 미련 없이 가차 없이 내뱉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투자자는 현상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다. 시장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눈이 멀지도 말고, 시장이 주는 쓴맛에 괴로워하며 발걸음을 멈추지도 말아야 한다.




현상을 두루 살피는 사유가 넓은 도화지에 세상의 풍경을 그려가는 유채화라면, 그 이치를 깊이 따지는 사색은 화폭 속 자신이라는 형상 위에 색을 덧칠하며 깊이를 더해가는 산책과도 같다. 사유가 현상의 본질을 인식하는 전체집합의 사각형이라면, 사색은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파고드는 성찰의 원이다. 사유가 세상을 향한 넓은 창이라면, 사색은 자신을 향한 깊은 통로다. 우리는 일정한 패턴에 갇힌 단순한 ‘사고’를 넘어,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유와 자기 자신에게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는 사색을 병행함으로써 지혜의 토대를 완성한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생각의 편향에 치우쳐 비스듬히 기울어진 ‘생각하는 나’를 떨쳐내고, 현상을 응시하는 ‘바라보는 나’에게 다가섬으로써 영혼을 직각으로 똑바로 세우는 과정이다. 투자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며 사유하고, 그것을 내면의 지혜로 정제하기 위해 사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들판에 홀로 피는 꽃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피지 않는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그저 제때 피어나는 것 자체가 생의 목적이다.


투자는 리더의 전략적 혜안과 관리자의 전술적 훈련이 합일되어야 한다. 전략의 바탕이 되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시장의 거시적 흐름을 사유하고, 체계적인 훈련으로 단련된 전술을 통해 자신을 사색하며 관리해야 한다. 투자자는 홀로 가는 길 위의 군주이자 병사여야 한다.




“요즘은 매일이란 바다의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이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이미 놓쳐버린 보물들도 많지만, 다시 찾은 보물들도 많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말처럼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잎이 보이듯, 상실과 실패 뒤에야 찾아오는 일상의 사소한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행복은 이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없다. 잘하는 사람이 오래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하는 사람이 결국 잘하게 된다는 격언은 곧 ‘일상에서 보물을 캐는 마음’이 지속가능성의 근간임을 일깨워 준다.


인간의 지속 가능한 행복은 과정에서의 완전한 ‘몰입’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끊임없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갈망하며 갈증을 느끼게 하지만, 몰입은 그 갈증을 단숨에 해소할 수 있는 행복의 우물을 내 곁에 파는 일이다. 욕망이 결과라는 마침표에 집착한다면, 몰입은 쉼 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문장 그 자체에 대한 뜨거운 찬미다. 과정에서 스스로 기쁨을 길어 올려야 즐길 수 있고,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지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으며, 그 지속의 끝에서 목적했던 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가슴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열망에 온전히 침잠하는 몰입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자기 증명이자 ‘인생 최고의 브랜딩’이다.


인간은 자꾸만 어느 지점을 기대하지만, 행복은 걸어가는 지금, 이 지점에 있다. 좋은 일이면 운 탓, 감사하면 되고, 나쁜 일이면 내 탓, 받아들이면 된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행복은 무엇보다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문제를 미리 고민하며 마음을 괴롭히기보다, 차라리 심란할지언정 지나간 날들을 반추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편이 낫다는 주인공의 자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은 미래를 고민할수록 특정한 결과를 강렬하게 의도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사는 늘 의도와 현실 사이의 거대한 괴리를 만들어 내며, 그 틈바구니에서 슬픔과 분노가 잉태된다. 의도가 깊어질수록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며, 높아진 기대치는 현재의 만족을 갉아먹고 끝내 후회의 씨앗을 뿌린다.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은 자신을 옥죄던 기대치를 과감히 내려놓는 것에 있다. 기대를 내려놓는 순간, 안개에 가려졌던 ‘지금, 이 순간’이 비로소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의도를 내려놓을수록 운명의 강물에 기꺼이 순응하게 되고, 바라는 마음을 줄일수록 왜곡된 욕망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현상’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기대치가 작아질수록 행복은 이미 곁에 와 있는 다정한 손길로 느껴진다.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거대한 장애물은 ‘비교하는 마음’이라는 독한 기대치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인간은 평온함에 도달할 수 없다. 비교는 현재의 풍요를 결핍으로 둔갑시키는 마비 증상이다. 비교할수록 행복은 멀어지지만, 비교를 멈춘 자리에는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단단한 만족이 차오른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략)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는 게 별것 없지만 자꾸 별을 꿈꾸는 게 사람이 마음이다. 또한 하다 보면 따라오는 게 돈이지만 하기도 전에 꿈꾸는 게 투자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투자자에게도 이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평범한 투자자에게 원칙을 사수하는 일은 늘 ‘하지 않은 일’이자, ‘할 수 있었음에도 매번 외면했던 일’이다. 그러나 펄롱이 소녀를 구출하며 불확실한 미래로 발을 내딛듯, 우리 또한 욕망에 감금되어 착취당하던 ‘원칙’을 구출해 낼 때, 평생을 지고 살아야 했을 후회의 시간과 영구히 결별하게 된다.


불확실성은 인간의 마음속에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도 불확실성은 마음을 흔들고 만다. 미래를 확실성의 영역에 묶어두려는 시도는 늘 불확실성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모순을 낳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지 않으면 성장은 없으며 선택은 성장의 필연적인 관문이라는 점이다. 불안과 두려움은 정지 신호가 아니라, 나아가고 있다는 성장의 증거이자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그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다.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 살지 않는다면, 유한한 생의 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는 일은 삶의 대들보를 세우는 윤리적 결단이어야 한다. 펄롱이 소녀를 구출한 뒤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믿었던 그 순전한 진심 정도는 되어야 원칙은 투자자의 생을 지탱하는 단단한 기둥이 된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시장은 역설적으로 그 정보의 궤적을 배신한다. 이것이 ‘정보의 역습’이다.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인간은 오히려 더 쉽게 감정의 노예가 되며, 흘러 흘러 귀에 도달한 파편적인 정보에 기댈수록 마음은 뿌리 없는 부초처럼 흔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혼동한다. 특히 시장을 예측하려 들 때 이러한 혼돈은 극에 달한다. 누구나 클릭 한 번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자신이 진실로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는 투자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


지식을 지혜로 착각할 때 필연적으로 ‘예측의 참사’가 발생한다. 무지는 단지 지식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오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투자자에게 있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 내는 능력은, 수만 개의 수치를 아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자신의 무지를 인지할수록 인간은 감히 시장을 예측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만한 예측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만이 생존의 주권을 쥐게 된다. 인문학적 소양의 결핍은 자기 과신이라는 늪을 더욱 깊게 만든다. 소양이 부족할수록 자신의 인지 능력을 객관화하는 메타인지가 떨어지게 되고, 이는 결국 위험에 스스로 가속도를 붙이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지식의 출발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나는 모른다”라는 고백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척도다.




삶의 흐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과 그 틈바구니에서 마음과 마음이 엮어내는 직조물이 바로 운명이다. 그 운명이 달콤하든 쓰디쓰든, 있는 그대로 순응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선량함’이라 부른다. 자신의 운명 앞에 선량한 사람은 타인에게 가혹할 수 없으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이타(利他)의 길로 수렴된다. 시장에서 예측 불가능한 ‘꼬리 사건’이 전체를 흔들 듯, 인생에서도 찰나의 감정이 삶의 궤적 전체를 결정짓기도 한다.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그것 또한 운명의 영역이나, 시간이 흐르고 정진이 거듭될수록 그 파동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위험한 건 투자하지 않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야 그 돈이 내 돈이 된다. 아끼면서 모은 돈은 땅이 굳듯 굳는다.” 연예계의 현자 전원주의 말처럼, 진짜 부는 한 계단 한 계단 땀 흘려 올라간 자에게만 허락된다. 아끼고 정성을 들여 모은 돈은 마치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품 안에서 단단히 굳는다. 투자에서 마주하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욕심과 성급함에 눈이 멀어 객관화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깊이 알아갈수록 시장에 대한 이해는 정비례하여 깊어지며, 깨달음의 비탈길을 묵묵히 오를 때 비로소 자본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증식하기 시작한다.


버팀 속에서 일궈낸 부는 고목의 나이테처럼 단단함을 갖는다. 우리는 무상한 세상에 던져진 돌멩이지만, 그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이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생각의 그물을 던져 무언가를 건져 올리면서 호흡하는 존재다. 솟구치는 생각을 인위적으로 막을 길은 없으나, 그 생각을 대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샘솟는 생각의 꼬리를 잡고 따라가는 것은 뇌동의 길이고, 그것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무심하게 두는 것은 순응의 길이다. 확률을 다루는 투자자는 생각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맞고 틀림이 교차하는 불확실한 게임에서 주관적 생각에 의존하는 것은 도박에 불과하지만, 일어나는 현상을 투명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투자의 시작이다.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생각이 개입될수록 마음은 혼란에 빠져 자충수를 거듭하게 된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욕심의 아지랑이는 더욱 짙게 피어오르고, 성급해진 마음은 서툰 판단을 낳아 결국 시장이라는 칼날에 혀를 찔리게 만든다. 지혜란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읽어내는 마음의 눈이며, 그 눈의 종착역은 바로 보이지 않는 내면을 응시하는 데 있다.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는 언제나 형상 너머에 있고, 진짜 중요한 본질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현상을 마주하는 당신의 마음이다.


마음공부란 솟아나는 생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계속해서 단련하는 과정이다.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고이지 않고 지나가야 비로소 뇌동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생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것을 흘러가도록 둘 수 있고, 생각을 비워낸 자리에만 시장의 현상이 온전히 깃들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지하며, 세상은 무상하게 변한다. 우리는 곧 죽음에 이를 존재임을 잊은 채 끝없는 욕심에 취하고, 변한다는 진리를 외면한 채 영원할 것처럼 집착한다. 이 비극적인 무지와 무상 사이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탈출구는 바로 무아다. 무아란 마음이 온통 한곳에 쏠려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몰입의 상태다. 목욕이 몸의 때를 밀고 독서가 머리의 때를 씻어내듯, 투자자가 시장의 방향을 예측하려는 오만을 버리고 현상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행위—그것이 바로 투자의 무아다.


현상에 내맡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철저히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의 첫 단추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무지에 대한 자각이다. 무지를 자각해야 비로소 사색의 문이 열리고, 무상을 인식해야 시절 인연을 기다리는 인내의 근육이 생기며, 생의 유한함을 알아채야 비로소 탐욕의 단식과 내려놓음이 가능해진다. 내면의 깊은 곳으로 침잠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는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삽이다. 인문학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마음을 직각으로 바로 세워주는, 머리로 하는 가장 치열한 근력 운동이기 때문이다.


원칙이라는 객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체인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워야 한다. 원칙 안에서 행해지는 매매의 반복은 투자자의 마음을 관통하며 단순한 지식을 ‘경험적 통찰’로 승화시킨다. 원칙을 사수할수록 통찰은 깊어지고, 그 깊이만큼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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