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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만사 불여튼튼이다.

by 황금지기

투자자에게 있어 돈의 무게는 편향과 편견을 극복한 무게와 같기에 마음을 추스르고 재차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만 있다면, 여여(如如)할 수만 있다면 만사 불여튼튼이다. 투자에서 일관성은 원칙의 반복, 그 반복이 유일한 일관성이며 세운 원칙에 대한 실천만이 심리를 바로 세우는 유일함이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를 가르는 건 원칙의 반복 여부다. 투자자에게 있어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은 ‘기다려줌’이다.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건 시장의 불변의 법칙이다.




혼마 무네히사는 「사케다전법」에서 매수, 매도, 휴식을 삼법(三法)이라 하고 셋 중 기다리는 심법인 휴식 즉 관망을 가장 강조했으며 거래의 신의 이 심법이 바로 투자 심리다. 시세를 읽을 수 없는 애매한 구간이나 손실이든 이익이든 파장의 고점이나 저점인 마루나 골에서 빠져나오는 건 기본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재차 기회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만 있다면 만사 불여튼튼이다. 상승이나 하락의 삼공(三空)에서 시세의 기세에 현혹되어 따라가지 않고 관망하는 것, 삼산(三山)이나 삼천(三川)이 만들어지면서 시세가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그 심리, 휴식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손실이든 이익이든 재차 기다릴 수 있는 그 심리가 전체를 좌우하는 게 투자다. 시장에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쉽게 할 수는 없다. 전체를 관통하는, 아우르는 정답은 없고 다만 투자자 각자가 사색하면서, 골몰하면서 찾아가야만 하는 각자에게 맞는 해답만이 존재한다. 슬픈 사실은 그러한 해답만이 존재할 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정답을 찾는 삶을 동경하는 꿈길을 헤매다 돌아서고 만다는 것이다. 투자자는 선택하지 않아서 놓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커서 성급하고, 선택하지 않아서 생기는 즐거움(사지 않았는데 가격이 하락하는 다행스러움)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져서, 놓침에 대한 두려움이 피함에 대한 즐거움보다 훨씬 명확하고 오랫동안 기억되기에, 욕심으로 귀결될 성급함을 잘 다루지 못하기에 휴식을 잘 다루질 못한다.




우리의 정신적인 습관은 현상만 보고 상황을 판단한다. 때리는 아이를 보면 소리부터 지르듯 자극과 반응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흔히 ‘심리적 지름길’ (흑인은 폭력적이다. 여자는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 이슬람교는 과격하다. 보수는 부패한다. 진보는 무능하다. 등과 같은 어림짐작. 즉 ‘휴리스틱’)이라고 말하는 다양한 편향과 편견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이다.

<힘과 쉼>

우량주에 장기투자 ‘쭉’ 이것은 돈에 기대치를 잔뜩 부여하면서도 일상을 일상답게 살도록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전략이자 그나마 개인의 최선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최선일 뿐 또 다른 위험이 공존할 뿐이기에 치고빠짐을 탐하는 원칙들도 당연히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치고빠짐은 자기 심리의 극복이라는 인생에서의 숙제에 다가서는 치열한 노력이기에 당연한 실패들에, 잦은 실수들에 당황함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확률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인다면 작가가 얘기하는 편향과 편견에 휘둘리는 생의 쓸데없는 소비를 극복하는 것이기에 생의 가치에 긍정의 깃발을 더하는 긍정으로서의 투자 행위가 될 것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게 인지의 첫째이지 않겠는가! 타인과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안의 편향과 편견을 인정하고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게 최근 회자하는 메타 인지가 아니겠는가! 모든 돈에는 무게가 있고, 그 무게는 각자가 그 돈을 벌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다. 투자자에게 있어 돈의 무게는 결국 편향과 편견을 극복한 무게와 같다.




우리 황야의 이리는 감정에 있어 – 복합적인 존재가 다 그렇듯이 – 때론 이리로 때론 인간으로 살았지만,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에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예를 들어, 하리가 인간으로서 훌륭한 생각을 갖거나, 섬세하고 고상한 감정을 느끼거나, 이른바 <좋은 일>이란 걸 행할 때면, 이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그를 철저하게 조롱한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외로이 황야를 달리다가 때때로 피를 빨아먹거나 암컷을 뒤쫓는 따위에 불과한 한 마리 이리에게 이 고상한 척하는 연극이 도대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웃기는 짓이냐고 비웃어대는 것이다. 또한 이리 편에서 보자면 인간의 행위란 모두가 지독스러운 코미디이고, 기만이며, 어리석고 허무한 짓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이리로 느끼고 행동할 때도, 그러니까 그가 다른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모든 인간과 그들의 도덕과 관습에 대해 증오와 적대감을 느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런 때는 그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인간 부분이 이리를 관찰하고, 짐승, 야수라고 부르며, 그 소박하고 건강한 야생의 존재에게서 느끼는 모든 기쁨을 망쳐버리고, 넌더리 나게 했기 때문이다.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우리는 자신이 반복한 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탁월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어제와 오늘의 생각이, 아침과 저녁의 생각이 다르고, 특히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면 잠시 잠깐의 생각조차도 차이가 확연하고, 어떤 생각은 기억해 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방 사라지고, 어떤 건 잊으려 해도 뇌리를 끊임없이 맴도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자기 안에 있는 누군가가 한 명인지 숱할 게 많은지조차도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인간에게 있어 일관성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지만, 시장에서 요구하는 자질 중 으뜸은 일관성이다. 투자에서 일관성은 원칙의 반복, 그 반복이 유일한 일관성이다.




인간이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며, 그 실현을 갈구하면서도 또 겁내는 하나의 먼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가는 도정은 언제나 무서운 고통과 무아경 속에서 그저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길을 가는 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에게는 오늘은 단두대가 내일은 기념비가 마련될 것이다.

<황야의 이리>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 돈을 다루는, 다루어서 부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고자 하는 투자는 초심자가 쉬이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우리의 보잘것없는 백치의 언어처럼 그렇게 쉽지도 않은 진짜 먼 가능성이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머릿속 생각과 실전에서 그 생각의 보잘것없음, 부질없음의 괴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경고하는 곳이 시장이다. 투자는 시간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뛰어야 하는 꾸준함을 전제로 하는 게임이다. 기분이 좋거나 맞았을 때는 기쁨의 질주나 전력 질주하고 쉬거나 자기 리듬에 따라 뜀과 쉼을 언제든지 반복할 수 있지만 ‘투자라는 게임’의 요체는 버티면서 포기하지 않고 지속한다는 것이다. 다수가 무너지는 건 기분에 압도당할 때 즉 아닐 때 분노의 질주를 너무나 자주 한다는 것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 봐야 천천히 길게 보고 꾸준히 달릴 수 있지만) 손실이 커지거나 횡보 흐름에서 시장에 조롱당하거나, 끝장을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면 증거금의 두께를 증가하면서, 개수를 늘리면서 빠른 만회 즉 불타오르는 충동에 대한 충실로 질주하는 길이만큼, 그러한 날들의 횟수만큼 처음에는 반성하지만, 죄의식의 깊이는 점점 얇아지면서 나쁜 반복을 일삼게 된다. 손실 회피 편향의 극복 문제 즉 아닐 때 행한 행위들의 누적으로 단두대는 기념비가 된다.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러 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음악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바하와 하이든의 전곡을 외고 있고, 그것에 대해 아주 뛰어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트럼펫을 잡고 경쾌한 쉬미곡을 불어대면, 이 쉬미곡이 훌륭하건 보잘것없건 상관없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다리를 움직이고 피를 관류하는 거지요.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신은 틀림없이 모든 것을 제대로 처리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 연주자들은 우리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임무와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을 연주해야 하고, 그것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연주해야 하는 겁니다.」

<황야의 이리>




“절약하는 마음 밭에 희망이 찾아온다. 절약과 희망은 연인 사이다.”

<윈스턴 처칠>

투자에 있어 절약하는 마음은 곧 자신을 절제하는 마음을 의미하기에 뇌동이나 추격으로 과소비하지 않는다면 투자 성과의 훨씬 희망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소비 욕구를 이겨내고 투자자가 마디를 취한다는 건 파동을 그린다는 것이고, 파동을 그린다는 건 파동은 등락한다는 관점에 힘을 보태고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가는 일이다. 파동이 마디를 만드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듯 돈도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번식하면서 일가를 이룰 시간이 필요함이 자연의 이치이기에 시간을 이해한다는 건 ‘기다려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돈을 모으는 건 시작에 불과하고 돈이 스스로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마치 농부가 고랑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온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돈도 씨앗을 뿌린 밭을 대하듯 그렇게 대해야 한다. 돈을 제대로 키워서 재배하겠다는 마음으로 투자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사에 있어 농부의 마음이 그 으뜸이듯 투자는 투자자의 심리가 그 으뜸이다. 재배한다는 건 경험한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으로 정제되지 않은 지식은 대개 말의 치장을 위한 것이고, 경험에 대한 인식 부족은 천박한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기만 하는 자가 돈을 끌어당길 수는 없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경험으로 깊이를 더하지 않은 앎은 어설프기 마련이고, 스스로 자만을 표현함에 지나지 않는다. 자만으로 치장한 어설픔을 돈은 금방 눈치챘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글을 쓰는 이가 실천하지 않으면 좀처럼 깊이가 더해지지 않는 것처럼, 인생사 대부분의 일도 경험하지 않으면 쓸모없음에, 어울리지 않는 치장에 많이 치우치게 된다. 투자자에겐 세운 원칙에 대한 실천만이 심리를 바로 세우는 유일함이다.




과거의 궤적을 회상하면 모든 마음은 돌고 변하기에 한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못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이리 애써 표현함이 맞을 것 같다. 똑같은 파동은 존재하지 않기에 정답은 처음부터 없었고, 대응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답이었고, 기도는 미친 짓이었지 않았겠는가? 여여(如如)하다는 것은 좋다, 싫다 등의 분별이 없는 상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흔들리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상태를 말한다. 대상을 나의 감정을 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상태 즉 나를 포함한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니 다만 스스로 그러하게 살뿐이다. 산다는 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에 여여(如如)할 수만 있다면 삶의 값어치는 여의주처럼 여물어 갈 것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태의 마음,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자신을 극복한 자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인 카잔차키스의 마음이면 투자를 제대로 바라보기에 충분하다. 내가 싫거나 좋다고 느낄 뿐이지, 대상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감정이, 그의 마음이, 마음속의 무언가가 상황에서 싫기도 좋기도 할 뿐이다. 투자자는 파동의 경계에 서서 ‘수시로 변하면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인 욕심과 생각 그리고 독선과 오만’을 끊임없이 도끼질하면서 지금 알고 있는 감정 그 너머에 있는 무욕(無慾)과 무념(無念), 무력(無力)의 상태로 건너가야 한다. 파동 위에 서서 돈과 심리에 관한 쉼 없는 독백과 자기 성찰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중(無重)의 상태로 가서 자연스러움을,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삶의 진정한 자유를 자유하고자 한다. 투자라는 것에 소중함보다 더한 시간을 길게 아주 깊게 투자하는 이유다.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이러한 원칙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데는 힘겨운 노동과 오랜 시간의 고통이 뒤따랐다. 마음은 결코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경우 오히려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써야만,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떠오른 태양 빛이 어둠을 비추듯, 영감은 이런 순간에야 불현듯 떠오르는 법이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건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소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소설 <인생>에서 운명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거대한 힘에 그저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부하고, 새롭게 개척하고, 그러면서 운명의 길과 자기 삶의 길을 허허롭긴 해도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그 담담함의 미학을 그려낸 작가 위화는 소설의 서문에서 진정한 작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마치 투자자에게 자신의 마음속으로 걸어들어가라고, 거기서 발견한 원칙을 지키는 길을 찾으라고, ‘자신을 이해하면, 곧 시장을 이해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금 아주 좋은 일이 나중 화가 되기도, 몹시 나쁜 일이 복이 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그저 받아들이면서,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이듯이 좋건 나쁘건, 맞추건 틀리건 그저 받아들이면서 반복하는 게 투자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를 가르는 건 원칙의 반복 여부다.




투자자에게 있어 ‘지금의 나’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은 ‘기다려줌’이다. 기다림은 지킴을 의미하고, 지킴은 곧 버팀이다. 원칙을 지킴은 기다릴 수 있음과 동의어에 가깝다. ‘미래의 나’에게 원칙을 지키는 과정이란 선물을 끊임없이 주면서 ‘미래의 나’의 통찰을 믿어보는 게 투자자의 선순환 구조다. 지금쯤의 나이면 창의의 폭은 점차 급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기에 올바른 습관으로 경험을 쌓아 깊이를 더해가야 한다. 경험의 깊이를 생각할 나이에 다가설수록 원칙을 고수하라는, 그리하라는 내면의 아우성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다. ‘지금의 나’의 불편함이 ‘미래의 나’에게 편안함을 선물하는 것임을, ‘기다려줌’은 ‘미래의 나’는 물론 ‘과거의 나’까지 바꿀 것임을 알기에 말이다.




꿈꾸는 동안에는 시장에서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에서 해답을 찾아감이 현명하다.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건 변하지 않을 시장의 불변의 법칙이다. 기본이 되는 규칙이나 법칙을 의미하는 원칙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스스로 그린 원에서의 반복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그것이며 투자자의 영원회귀다. 세이렌의 고혹적인 노랫소리의 유혹을 떨치기 위해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몸을 묶었듯이, 자기 안의 감정에서 솟구쳐 나오려는 것들로부터 중심을 고정해 둘 관점이자 의지, 통찰이 바로 원칙이다. 솟구쳐 나오려고 하는 것들로부터 중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중심을 잃고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겠다는 안간힘으로 버티는 시간만큼 투자자는 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투자 아니 돈의 특성은 불확실성과 변동성 그리고 맞닥뜨리는 우연의 거듭과 감정의 기복이다. 그 안에서 스스로 규칙성을 부여하고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는 원칙을 지키는 기술이 (투자든, 사업이든, 장사든 무엇이든 자체를 관통해서 온전히 세운 것을 목숨처럼 지키는 기술) 돈의 다루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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