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를 알아차려야만 배움이 짙어진다.

by 황금지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은 진리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 즉 기본에 숨어 있음을 시사한다. 거듭해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빛이 강할수록 그 바로 아래의 어둠을 간과하기 쉽기 때문이다. 고개를 깊이 숙여야만 등잔 밑이 자세히 보이듯, 투자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겸손이다. 투자자의 등잔 밑은 깊이 침잠해야만 겨우 보이는 곳, 작은 시세의 흔들림에 눈을 감고 소음의 바다에서 귀를 막아야만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은 기묘하여, 행하기 불편한 원칙을 고수하면 결국 인생이 좋아지고 당장 편안한 뇌동에 몸을 맡기면 결국 삶이 나빠짐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본능은 늘 나쁜 것들의 이끌림에 속절없이 동하곤 한다. 밖으로 내뱉는 말도, 아는 척하는 오만도, 근거 없는 확신도 아직 너무나 많다. 결국 덜어내고 빼야 할 마음의 군더더기일 뿐이다. 나쁜 유혹에 쉽게 이끌리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지에 있으며, 무지는 곧 영혼의 결핍이다. 이 결핍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배움은 시작된다.


무지를 알아차릴수록 배움의 밀도는 짙어진다. 거칠었던 마음에도 비로소 푸른 녹음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내면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군더더기를 걷어낸 자의 마음은 어느덧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안식처, 즉 ‘케렌시아 숲’이 된다.




“그런 애착과 상관없이 언젠가 밀물이 들어와 공든 모래성을 휩쓴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따라서 그 모래성 놀이를 한껏 즐기되, 결코, 집착하지 말며, 때가 되면 바닷물에 휩쓸리도록 두는 게 삶을 사는 지혜다.”

<페마 초트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때가 되면 바닷물에 휩쓸리도록 두는 태도야말로 거듭되는 오고 감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게 하는 힘이다. 지금의 누적이 곧 매번의 결과이며, 지금 변하지 않는 자에게 다른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만이 습관을 재편할 유일한 기회이자,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핵심이다. 저자의 조언처럼, 지레짐작으로 시장을 해석하거나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희망의 소설’을 멈추고 오직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대하는 그 마음은 현재의 냉혹한 사실을 외면하게 만들면서 지금, 이 순간을 앗아간다. 특히 손실 상태에서 품는 근거 없는 희망보다 투자자에게 나쁜 마음은 없다. 진정한 절제란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원칙을 가로막는 ‘끈질긴 희망’을 단호히 놓아버리는 것이다. 인생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지는 순간은 오직 자신의 세계가 끝나는 ‘죽음’뿐이다. 그 외에 마주하는 모든 흔들림과 무너짐은, 사실 당신의 영혼이 더 눈부시게 빛나는 ‘윤슬’이 되기를 바라는 운명의 자상한 배려다.


현상은 그저 현상일 뿐이다. 투자에서의 지혜는 현상에 대해 옳고 그름이라는 견해를 덧씌우지 않는 것이다.



“상황이란 그보다 더 변화무쌍하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장난스럽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게 다 애매모호하다. 모든 게 늘 움직이고 변화한다. 또한 상황에 연결된 사람의 수만큼 경우의 수도 많고, 관점도 다양하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을 찾는 행위는 안전과 편안함을 느끼려는 우리 스스로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페마 초트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며,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서늘한 진실만이 유일하게 확실할 뿐이다. 필연의 죽음 앞에서 산산이 무너지는 것이 인생의 정해진 궤도다. 움켜쥐려 했던 모든 성취와 욕망은 시간이 흐르면 기억의 파편으로 부서져 흩어질 것이다. 둘러싼 만물은 찰나도 멈추지 않고 변하며, 눈 깜짝할 사이 죽음에 당도할 유한한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 허무의 바다 위에서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명확하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영혼을 살찌워 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진이다.


무너짐은 더 단단한 영혼으로 거듭나기 위한 우주의 섭리다. 봄이 꽃을 떨구고 여름이 결실을 내어주며 가을의 잎들이 대지로 돌아가 겨울을 견디듯, 쥐고 있는 것들을 때가 되면 기꺼이 내어줄 줄 알아야 한다.




투자의 동기는 당연히 돈을 향한 욕망이다. 하지만 욕심을 부릴수록 부는 멀리 달아난다. 욕심에 시야가 흐려지면, 인간은 노예가 되어 결코 돈을 온전히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는 욕심과 만족의 아슬아슬한 경계 어디쯤에서 비로소 쌓이기 시작하며, 그 모호한 '어디쯤'을 발견해 내는 것이 투자자 각자가 매진해야 할 노력의 본질이다. 투자라는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내면의 욕망은 때로 터무니없고 흉측하여 놀라게 하지만, 그 실체를 직시해야만 욕심의 능선을 내려와 단단한 현실의 경계로 하강하게 된다.


욕심의 사상누각에서 내려와 몸을 낮출수록, 기초는 견고해진다. 기초는 흔들리는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다. 이 토대가 튼튼해야만 방황의 숲을 헤맬지라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그 끈질긴 집착들이 결국 투자를 망가뜨리고, 돈은 감정의 소음에 시달리다 소리 없이 곁을 떠난다. 욕심을 덜어내어 마음이 가벼워지는 만큼 인생은 더 높이 비상할 수 있으며, 현상을 빨리 직시할수록 투자가 지혜로 깊어질 소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된다.


투자의 깊이는 결국 복리, 즉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과라는 신기루보다 과정이라는 실재를 만끽하는 것이다. 단 한 줌의 시간도 돌이킬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별처럼 까마득한 인류의 무리 중 먼지보다 작은 존재인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은 최선의 과정 그 자체를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결코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며, 나쁜 습관에 익숙해질수록 그 골은 더욱 깊어진다. 외로움이 깊어져 고독의 경계로 나아가려 해도, 고갯길마다 앞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자꾸만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 봄날을 더욱 속절없이 빠르게 본다. 그럼에도 지금 긋고 있는 선을 온전하게 이어가는 노력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그 선을 잇는 오늘 하루가 찬란하게 빛나야만 생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도 백지뿐이던 마음에서 어느 순간 적기 벅찰 만큼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듯, 투자의 수익 또한 임계점을 넘긴 정성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법이다.


매 순간 정성을 다하는 자만이 때를 더 자주, 더 깊게 만나게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끊임없이 메모하면서 애써야 한다. 머릿속의 얕은 지식이 사색의 과정을 거치고 경험의 층위 위에 퇴적암처럼 쌓일 때, 그것은 고목의 나이테처럼 단단한 지혜로 승화된다. 시장의 시작과 끝, 진입과 청산이라는 모든 행위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나, 그 마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이 지혜로 정제된 만큼의 현명함이다.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한 채 행하는 모든 투자 기술은 결국 공허한 공염불에 불과하다.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는 보상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 인간에게는 마땅히 쏟은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주지만, 정성이 부족한 무책임한 기대나 막연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의무를 저버리는 나쁜 것이다.




한 사람의 겉모습은 바다 위로 살짝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 그 수면 아래 숨겨진 거대하고 복잡한 몸체는 결코 타인이 다 알 수 없다.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말아야 하며, 만나는 이마다 각기 다른 결을 지닌 고유한 나무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이 공감이라면, 자신의 심연 속 무의식의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진정한 마음공부다. 시장이 주는 어떠한 패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그릇을 빚기 위해 매일 자신의 심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


깃발을 흔들어 대는 바람은 결코 통제할 수 없지만, 그 바람에 의해 깃발이 어느 방향으로 나부끼는지는 응시할 수 있다. 투자자의 마음이 먼저 흔들리지 않는다면, 시장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 현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만은 선택할 수 있다. 마음이 제멋대로 희망이나 비관을 섞어 해석하지 않을 때, 현상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유연하게 따라가게 된다. 모든 일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연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현상일 뿐이다. 지금 여기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상한 물결임을 깨달을 때, 집착으로 어두침침했던 마음에도 지혜의 볕이 들기 시작한다.


감정의 반응에 무게를 두지 마라. 그저 흘러가게 두라. 세상사가 그저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질 뿐이라는 진리에 다가설수록, 투자자는 감정의 파동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수 있는 강인한 평온을 얻는다.




투자의 여정에서 거듭 실수하고 손실의 늪에 빠지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실수가 두려워 발걸음을 멈추는 자는 결코 미로를 벗어날 수 없으나, 실수를 배움의 이정표로 삼는 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진실의 문턱에 도달한다. 투자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무리 다잡아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평상심이라는 닻을 내릴 수 있는 ‘심리의 복원력’이다. 손실의 발생은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의 영역이지만, 그 손실을 대하는 나의 심리를 통제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영역이며,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존을 약속하는 지속가능성의 비밀이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돈을 다루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적나라한 본성이 바로 그러하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소중한 자산을 잃어가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자기 민낯을 경험하게 되며, 그 실체를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것이 보편적인 사람의 마음이다. 계좌가 쪼그라드는 원인은 성급하게 달려드는 조급함과 자신의 실력이라는 그릇 너머를 탐하는 비대한 욕심에 있다. 이 비루하고도 보편적인 본능의 유혹을 이겨낸 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힘을 소유하게 된다. 돈은 무너질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예민한 생명체와 같다. 죽어 가는 나무를 새들이 먼저 알고 떠나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감정의 숲에는 돈이 결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마음먹기도 미룰수록 무뎌진다. 미루는 쪽에 습관이 배기 때문이다. 미루는 행위는 현재를 죽이는 일이지만, ‘그냥 하는 것’은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다. 마음이 바위처럼 단단하지 않고서야 어찌 감정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묵묵히 행할 수 있겠는가.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온다. 그 흐름이 아무리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지라도, 지나고 나면 빠르게만 기억될 뿐이다. 지금 마주한 지독한 고통과 지겨운 권태 역시 결국에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터널이 아무리 길고 어두워도 나아가는 자에게 그것은 통과해야 할 ‘터널’일 뿐이지만, 발걸음을 멈춘 자에게 그곳은 영원한 어둠이 되고 만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한다. 멈춰 세우려는 수많은 장애물 속에서도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야 터널 끝의 빛을 만나게 된다. 견뎌내는 시간은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킨다.


희망하기보다 나아가라. 그래야 결국 피어난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마음의 눈이며, 그 눈을 믿고 묵묵히 전진할 때 생의 꽃망울은 터지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숙명은, 그 변화의 물결을 타고 스스로 변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등락을 거듭하는 파동 속에서도 기어이 피어나야 한다. 변화는 지루함을 이겨낸 ‘꾸준함’이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겨우겨우 버텨내는 나날들의 연속일지라도, 그 버팀의 끝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 인생의 신비다.


나아가면 변하고, 멈추면 어제와 똑같다. 보잘것없는 작은 씨앗 하나를 심고, 그것이 언젠가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될 것을 상상하며 인내하는 것—그것이 바로 꾸준함의 본질이다. 아주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소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마음먹기’는 일상을 찬란한 문화로 피워낼 것이다.




투자 심리의 근간은 원칙을 지키는 기술에 있으며, 그 기술의 요체는 바로 ‘생각 빼기(-)와 현상 더하기(+)’다. 인간이라는 생각하는 동물의 뇌 속에서 들끓는 주관적 해석을 빼내고, 시장이 그려내는 객관적 현상만을 더할 때 본질을 꿰뚫는 단순한 시선을 얻게 된다. 주관을 뺀다는 것은 돈을 얼음처럼 차갑게 다루겠다는 선언이며, 현상을 더한다는 것은 뇌동의 유혹을 물리치고 원칙의 궤도를 지키며 시장을 오래도록 응시하겠다는 열정이다.


인생의 어떤 분야든 근간이 되는 소중한 무언가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은 나날이 위대해진다. 누군가 어떤 일에 자신의 소중한 생을 투자했다는 것은, 그 시간을 견디며 끝까지 수호해 온 ‘단 한 가지’ 원칙이 있음을 의미한다. 전체를 좌우하는 그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투자에서는 바로 원칙을 지키는 기술이다. 투자의 시작이 단단한 원칙을 세우는 설계라면, 그 과정은 원칙을 실전에서 지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 끝에 얻게 되는 수익이라는 결과는, 사실 내면의 성장이라는 거대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부산물 정도로 여길 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돈보다도 소중한 것은 견뎌내며 빚어낸 ‘단단해진 자신’이다. 유한한 생을 살며 변해가는 무상의 세계에서, 어쩌면 자본의 증식보다 몇 배나 더 소중한 가치는 흔들림을 이겨낸 내면의 성장이 아니겠는가.




남을 탓하는 좁아터진 마음의 틈새로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불안의 연속—그럼에도 ‘그냥’ 나아가는 행함이 곧 지혜의 마음이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거친 파도가 잦아들고 고요한 호수 위에서 유유히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신과 만나게 된다. 투자자에게 인문학적 성찰의 지향점은 경험을 거쳐 지혜로 정제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내면의 자비로운 호수가 비로소 생 앞에 내놓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여유롭다는 것은 들끓는 감정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이며, 덤덤하다는 것은 시장의 그 어떤 현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자신을 깊이 알아가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을 용서하기 어렵고, 변화무쌍한 현상 앞에 나그네처럼 몸을 내맡기는 유연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듯, 자신의 나약함과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원칙의 깃발을 지킬 수도, 손실을 단호히 잘라낼 수도 없음을 시장은 모질게 가르쳐 준다. 자신을 알아가는 의무를 다한 자에게만 투자를 통해 부와 성장을 추구할 권리가 부여된다. 시장에서의 모든 선택은 반드시 준엄한 책임이 따른다. 자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자는 그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무너지고 만다.


“내 탓이다.” 이 한 문장으로 책임은 선명해진다. 여름철 돌아서면 자라나는 풀처럼 끈질기게 돋아나는 감정의 잡초들, 그 감정에 휘둘린 선택들조차 모두 나의 탓임을 의식적으로 되뇐다. ‘내 탓’임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깊은 편안함에 안착한다. 입가에는 자꾸만 고요한 미소가 번진다.

매거진의 이전글크게 보되 세밀히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