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이란 단어를 풀어헤쳐 보면 아마도 불신과 확률 그리고 실패의 성질을 강하게 품고 있는 듯하다. 투자의 세계는 지그재그 곡선인 파동처럼, 불확실성이란 오르락내리락을 버텨내야만 하는 곡선이다. 침묵할 수 있는 자가 실천하게 되면 비로소 고독을 즐기면서 신독하게 되듯 생각대로 되어야만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손실을 감당하는 법을 더 배우고 익혀야 투자의 의미를 알게 된다. 투자 심리의 단호함이 바로 단 한 가지 핵심 습관,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 제대로 앎에서 길을 찾아간다면 삶은 보람차다.
언어 자체나 언변의 화려함보다는 상대방에게 열려 있는 태도가 소통의 정도를 결정하듯 기법으로 대표되는 도구보다는 시장에 마음이 열려 있기에 여유롭고, 시장을 덤벼서 이기려 들지 않기에 덤덤한 마음이 성공의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 대개 시장을 얕잡아 보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성공에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망상에 취한다. 누구나 직선을 꿈꾸지만, 투자의 세계는 지그재그 곡선인 파동처럼, 오르락내리락을 버텨내야만 하는 곡선이다. 성급함이 그린 직선은 자신만의 공상일 뿐이지만, 곡선은 버팀을 전제로 하기에 지극히 현실적이다. 직선의 성급한 마음에서는 파동의 곡선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직선은 우상향이 아닌 우하향으로 가팔라지게 된다. 누구나 욕심으로 성급한 것이고, 성급해서 욕심을 비울 수 없기에, 다수는 여전히 생존 본능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게 인간의 마음이기에 마음을 비운 만큼 돈이 채워지는 게 시장의 이치다. 마찬가지로 감정이, 생각이 개입하는 만큼 복잡해지는 게 확률의 세계다. 타고난 직선의 마음을 유연하게 구부러뜨리면서 곡선이 되어야 하지만, 지독한 본성은 빳빳하게 치켜든 고개를 좀처럼 숙이지도, 구부러지지도 못한 채 자꾸만 원칙만 부러뜨린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옵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시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평온을 비는 기도 – 라인홀트 니부어>
처음부터, 최대한 이른 시간에 원칙을 지켜야만 하는 건 크게 잃지 않는 습관을 쌓아가는 과정 즉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지기 위함이다. 대부분 투자자가 무너지는 건 돈을 지키는, 원칙을 지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등한시하면서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률을 다룰 때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외부의 (시장의) 흐름에 여유로워야 하고, 바꿀 수 있는 내부의 (마음의) 성급함과 욕심에 덤덤해야 한다. 확률에 취약한 뇌 구조로 태어나는 게 인간이기에 누구나 지극히 확률적인 시장에 발을 디디면 철부지 아이와 같기에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필수의 과정, 돈이 되지 않는 필연의 과정을 거쳐야 어쩌다가 어른이 아닌 제대로 된 어른이 된다. 시장에서는 노력과 성공이 등식이 아니지만, 숱한 우연과 이어지는 우연을 버텨낼 투자 심리가 본질이지만, 노력하는 만큼 자신을 알아가기에 시도의 가치는 충분하다. 투자자는 감각을 다듬는 체계적인 훈련과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인문학적 소양의 과정을 거쳐야만 우상향의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게 되며 습관이 된 원칙을 지키는 게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이르는 매매다.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른다는 의미는 실천한다는 것이다. 침묵할 수 있는 자가 실천하게 되면 비로소 고독을 즐기면서 신독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를 ‘무소유’에서 말하는 ‘소유’란 ‘내가 가진 걸 모두 버린다’라고 쉽게 오해한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는 내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규정하고 그것을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 저건 내가 탈 버스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떠나버린 버스를 내 마음대로 내가 탈 버스라고 규정해 버린 ‘소유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이미 지나간 버스에 대하여 어떤 가치론적 규정이나 의도 없이 그저 버스 시간표에 따라 떠나간 버스이고, 다음번 버스를 그냥 무심히 타는 것이 바로, ‘무소유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버스는 시간표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무소유’의 진정한 깨달음이다.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것이 ‘소유’이다.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온다. 그 이유는 ‘소유’의 시각은 내 시선일 뿐, 객관적 세계의 ‘실상(實相)’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뜻과 생각을 고집하여 관철하려 하는 것은 집착이요, 집착은 고통을 낳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내 생각의 틀 안에 모든 현상을 가두는 ‘소유적인 삶’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 집착에서 벗어나 ‘실상(實相)’을 아는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최진석>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온몸에 힘을 주고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오히려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 긴장한 채 버둥거릴수록 물을 먹고 수면 아래로 더 가라앉기 마련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온몸에 힘을 빼고 몸의 부력을 이용해 스스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중략) 옛날에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얘기가 있다. “어른 별거 아니다. 애들 큰 게 어른이지.” 그러니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자. 힘주는 법도 힘 빼는 법도 더 배우고 익혀서 행복해지자. 아니, 최소한 불행해지진 말자. 이번 생은 망했다고, 쉬이 내려놓지는 말자.
<힘과 쉼 – 백영옥>
투자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투자자는 손실이 나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본전이라고 찾으려 어물전의 물고기처럼 (남아있는 힘이란 힘은, 돈이란 돈은 다 쓰면서) 바둥거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둥거리면서 힘이 들어갈수록 뇌동이나 추격의 늪은 가팔라지고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 뿐이다. 원칙을 잊은 채 버둥거릴수록 손실은 더 커지거나 미래는 희망의 달로 비칠 뿐이기에 심리는 점점 더 바닥 가까운 곳에서 더 암울하게 헤매게 될 뿐이다. (물론 어렵고도 어렵고 이게 거의 전부지만) 이때 투자자의 최선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낮지만 본전 이상의 여지가 충분할 수도 있지만, 손실을 잘라 버린 채 시간이 주는 인간의 평등 즉 망각을 이용해 마음의 여유로움을 되찾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생각대로 되어야만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반복하면서 손실을 감당하는 법을 더 배우고 익혀야 투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손실을 짧게 잘라야 불행과의 평행선이 멀찌감치 직선으로 유지됨을 알아야만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곳이 시장이다.
“우리는 습관 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다…, 습관 전문가들에 의하면 성공은 좋은 습관의 연쇄 반응이다. 가령 출근 전, 매일 한 시간씩 공원을 뛰는 ‘핵심 습관(keystone habit)’이 있다면 앞뒤 전후로 그것을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연쇄적 다른 습관이 자석처럼 달라붙는다…, 탁월함보다 꾸준함이다. 시작보다 지속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황을 전환하는 정신적 습관이 있다. 지겨움을 편안함으로, 반복을 익숙함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가령 외국어를 잘하기 위한 핵심은 반복이다. 운동도 그렇다. 이런 반복은 엄청난 고통과 지겨움을 유발한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으면 그것은 익숙함으로 변환한다.
<힘과 쉼>
타고난 천성을 바꾸는 건 불가능이란 가능성을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는 힘든 일이지만 하나의 습관이 만들어지는 데 약 66일이 걸린다고 하니 습관을 바꾸는 건 그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현재 그 사람의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투자에서 좋은 습관을 만들지 못한 자는 끝날 때까지 미련 덩어리일 뿐이다. 반복해서 원칙을 지킨다는 게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는 의미이고, 무의식적인 영역으로 넘어가 의식적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명확한 기준이 되어 지키게 되는 습관의 단계가 되면 그의 행위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서의 매매다. 고원에서의 매매는 흡사 갓 발견되었고 많은 이가 알고는 있지만 아무나 캘 수 없는 다이아몬드를 캐는 것과도 같다. 돈이 되지 않는 구간을 견뎌낸 자가 닿은 고원에서의 일상은 보람을 캐는 과정이다. 먼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투자 일생 전체를 좌우하게 될 핵심 습관은 손실 상태처럼 흥분되거나 화가 나는 상황에서 진화론적 편향은 쉽게 감정을 재단하게 되므로 red zone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듯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시장에서의 오랜 경험상 지극히 현명하다. 원칙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이렇게 매매하겠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것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손실 상태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짧게 자르겠다는, 재차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투자 심리의 단호함이 바로 전체를 바꾸는 단 한 가지 핵심 습관이다.
확률은 불확실성을 의미하고, 불확실성은 불안의 원인이 되고 불안은 감정적 불편함을 지속해서 자극한다. 자극받아 꿈틀거리는 불신들로 원칙에 대한 믿음에 구멍이 나기 마련이기에 모든 투자자에게 뇌동이나 추격의 여지는 항상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성공한 투자자는 이 보편적 심리의 메커니즘에 균열을 내는 자다.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만의 확신의 불꽃을 피워낸 자다. 불안이 초래하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거나, 불편함에 여유로움을 더하면서 편안함으로 바꾼다거나, 자꾸만 움트는 불신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원칙이란 나무를 키워내는 자다. 불확실성이란 단어를 풀어헤쳐 보면 아마도 불신과 확률 그리고 실패의 성질을 강하게 품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성질들로 인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을 맞닥뜨리면 대개는 늘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게 된다. 투자에 감정이 더해지면 투기가 되고, 감정만 빼면 그 자체로 투자가 된다. 감정이 빠지면 온전히 현상만 남게 되고 현상을 현상대로 마주할 수 있다면 현상 그건 확실성이니까 말이다. 투자자에게 있어 감정의 반대말은 이성이 아니라 현상이라 여기면 편하다. 감정은 주관적 태도이고, 객관적 태도를 가져야만 현상이 또렷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투자는 내면을 다스리는 일이기에 특히 재능보다는 지속해서 노력하는 끈기가 성공을 결정짓는다.
깨달음을 얻는 고승조차 24시간 평온한 상태로 있는 게 아니다. 그 순간의 짜증과 화를 의식적으로 알아채고, 잠재우기 위해 호흡하고, 다시 평정을 찾는 반복의 반복일 뿐이다. 청소하지 않으면 먼지는 쌓인다. 마음도 그렇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걱정과 불안, 슬픔, 분노는 먼지처럼 쌓인다.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결국 균형이란 멈춘 상태가 아니라 맞춰지는 과정이며 우리가 걷는 길, 우리가 등에 멘 짐 무게에 따라 매 순간, 매 시기 바뀌는 건 아닐까. 워라밸 역시 그렇다. 몸이 부서지라 열정적으로 일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쉼을 보상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다. 끝없는 성장이란 형용모순이다. 쉼 없이는 성장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속 가능한 성장이다.
<힘과 쉼>
모든 투자자가 꿈꾸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은 매수와 매도 그리고 휴식을 전제로 한다. 똑똑하게 시장이 가는 방향을 맞추려는 건 인간이 말과 달리기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쉼’ 즉 ‘기다림’을 자신에게 이해시키면서 시간을 믿고 꾸준하게 가야 한다. 매번 맞추고 싶은 열정이 빚은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뿐이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조차도 생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에 투자자는 똑똑함에 대한 의존을 내려놓고 그저 꾸준하게 ‘가는 말에 올라타는 것’ 어떻게 하면 가는 말에, 고래의 등에 살포시 올라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시장이 가는 방향이 아니라, 가는 말을 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진짜 사유다.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나 서서히 주먹을 풀며 죽는 게 인간의 삶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조금씩 가벼워진다’라고 말하는 백영옥 작가는 「힘과 쉼」 10부에 일에서 능숙한 프로가 되는 길을 진솔하게 설명한다.
① 더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몰입이 일어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역시 ‘능숙함’이라는 것이다. 달리기든 글쓰기든 춤이든 악기 연주든 능숙해질 만큼 반복하면 만족도가 상승한다. 숙련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해야 할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나아가 ‘잘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을 ‘통제할 수 있다’란 자신감과 충만한 행복감으로 이어진다. 능숙함이야말로 싫어하는 일이 좋아지는 비결이다. (중략) 무엇이든 능숙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못하는 걸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일을 점점 더 잘하게 될 때 전문가가 된다는 걸 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②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행착오를 통해 일하는 감각을 꾸준히 키워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우아한 백조의 정신 사나운 다리를 상상해 보라. 큰 부자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발도 비슷하다. 다양한 업계에서 성공한 선배들이 내게 해 준 가장 솔직한 조언은 ‘그 일을 정말 잘하고 싶다면 자신의 최대치에서 한 번 더 시도하라!’라는 말이었다. 고치고 고쳐서 도저히 더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고치는 게 프로라는 뜻이었다.
③ 물속에 있는 사람은 ‘물이란 무엇인가!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가!’를 묻지 않고 수영한다. 중요한 건 변화와 성장을 믿는 태도다. 다만 변화가 천천히 온다는 걸 알아야 한다. 변화란 소나기 쏟아지듯 한순간 젖는 게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을 몇 시간이고 헤맨 듯 서서히 젖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열정을 ‘서늘한 인내심’이라 부르는 이유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해 본 사람, 우리가 그들을 프로라고 부르는 이유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어제의 선택으로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 나의 선택으로 미래의 내가 있다는 상상이 나를 만든다는 백영옥 작가의 표현이 참 좋다. ‘작은 선택이지만 지금에 집중해 작고 소소한 행복을 자주 누리는 게 성공한 삶이 아닐까.’ 공감이 지나쳐 ‘좋아요’ 버튼을 몇십, 아니 몇백 누르고 싶어진다.
① 내 광선 검은 “과거는 변한다!”란 문장이었다. 내 마법의 주문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란 말이었고, 나의 반짝이는 루비 구두는 “그러니 미래를 바라보라”란 예언이었다. 과거는 변해, 그러니까 미래를 기억해, 지금을 살아내면서.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시 쓰면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갈 수 있다. 현재를 제대로 살 때, 과거는 틀림없이 바뀐다.
②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많은 것은 그 자신이 이미 수년 전에 이미 심어놓았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선물이다. 그리고 이 격려의 본질은 ‘그 많은 수고로웠던 시간’이다. 귀찮고 힘들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내가 나를 위해 해왔던 것 말이다. 나는 위로나 성장을 다시 정의하고 싶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꾸준히 했던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성장시킨다고, 실패마저도 그렇다.
③ 미래의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친구는 ‘지금의 나’라는 사실 말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다. 동시에 존재하는 메타버스 세계처럼 ‘나’는 세 갈래의 시간대 속에 연결돼 있다.
백영옥 작가는 「힘과 쉼」의 마지막 12부 성장에서 ‘과거는 변해, 미래를 기억해, 지금을 살아’라면서 우리를 격려하고 다그치면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필연의 실패를, 거듭되는 실수는 필연이라면 우리를 위로한다.
해외선물 데이트레이딩을 하면서 가장 변동성이 큰 미장을 하지 않고자 다짐에 또 다짐을 보태는 건 그 시간쯤이면 의지력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고, 잠이란 일상에 대한 보상으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비록 해외선물이 미국 시장에 많이 의지하지만, 아시아에 사는 사람이라면 돈보다 더 중요한 건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의지는 근육과 같아서 단련할수록 강해지지만, 노을이 지면 의지가 떨어지는 건, 나이에 정비례해서 떨어지는 건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지의 배터리를 잠으로 충분하게 충전하고 맞이하는 태양 아래서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체득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 제대로 앎에서 길을 찾아간다면 삶은 보람차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확률로만 설명되는 복잡계에서는 생각할수록 행동의 저해 요인이 되기 십상이다. 행동을 통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얻는 식으로 추구 즉 원칙을 지키는 행동으로, ‘또 다른 나’라는 ‘미래의 나’가 만들 생경하고 새로운 것에 기대함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