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보되 세밀히 살펴야 한다.

by 황금지기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험한 산길에서 길을 잃지 않듯, 투자에서도 거대한 흐름을 먼저 읽어내야 소중한 자산을 쉽게 잃지 않는다. 시장의 우호적인 파동 속에 있을 때는 다소 감정에 휘둘리거나 원칙이 미흡해도 수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거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흐름이 정체되는 보합권에 진입하거나 큰 추세가 꺾이는 순간에 발생한다. 흐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과거의 요행에 취해있으면, 투자자는 순식간에 손실의 올무에 묶여 냉철한 '분석가'에서 처절하게 구걸하는 절실한 ‘기도자'로 전락하고 만다. 시장에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개를 들어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흐름의 발원지를 끊임없이 가늠해야 한다.


흐름의 한가운데 매몰되면 인간의 시야는 일희일비하게 만드는 가격 변동에 가로막혀, 이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지 통찰할 힘을 잃게 된다. 자꾸만 감정의 개입으로 좁아지는 시야를 경계하고, 의식적으로 시선을 높여 시대와 시장의 거대한 맥락을 짚어내야 한다. 선택의 연속인 투자의 세계에서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는 결국 ‘방향’과 ‘속도’다. 투자의 방향이란 곧 시장의 큰 흐름을 읽어내고 그 흐름이 무르익을 때까지 고요히 인내하는 ‘기다림’이며, 투자의 속도란 그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 혹은 잘못된 흐름에서 탈출하기 위해 손실을 잘라내는 ‘대응’이다.


방향은 기다림으로 완성되고, 속도는 결단으로 완성된다. 성실한 투자자가 기도로 연명하는 하수가 되는 이유는 방향을 오판해서가 아니라, 방향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 '대응의 속도'를 늦췄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먼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온몸에 들어간 긴장의 힘을 빼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유연해져야 한다. 성급한 조급증을 버리고 비대한 욕망을 내려놓아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를 수 있다. 삶의 총량과 행운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법이니, 잠시 얻었다고 크게 기뻐할 것도, 잠시 잃었다고 깊게 슬퍼할 것도 없다. 좋고 나쁨이라는 분별을 떠나 오직 운명에 자신을 내맡기며 흘러가 보자.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원칙의 밧줄을 부여잡되, 그 배가 닿을 목적지는 흐름에 맡기고 그저 어디로 흘러가는지 고요히 지켜보자. 흐르는 물은 썩지 않으며, 흐르는 과정에서 매 순간 새로워질 것이다.


살아온 생의 길이가 남은 생의 길보다 길어졌다는 자각은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흘러가야 할 이유가 된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생의 동력이 여전하다는 증거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지루했던 ‘꾸준함’은 어느덧 ‘만족감’과 만나게 된다. 마음이 만족을 알면 꾸준함에는 동력이 더해진다. 작은 시냇물이 큰 강을 만나고, 강물이 마침내 광활한 바다를 만나듯, 그저 행하는 ‘Just do it’으로 나아가라. 끈기가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은 ‘나를 이겨냈다’라는 지극한 만족감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불행을 치유하는 처방은 바로 이 끈기가 주는 행복이다.


미래를 완성하는 방법은 오늘이라는 강물을 정직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오늘 행함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켜켜이 누적하는 것보다 성공에 가까이 가는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솟구쳐 올라 거대한 산이 되어버린 잡념들,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불안의 생각들을 거듭해서 딛고 나아가는 ‘그냥 하는 마음’이야말로 지혜의 정점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통로다.




투자의 세계에서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이며,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안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역설로 풀면, 안전하게 해야만 계속할 수 있고, 계속하는 행위 자체가 가장 정직하게 열심히 하는 길이며, 그 열심의 시간으로 ‘잘함’의 경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잘한다는 것은 단기적인 생산성을 담보하지만, 안전하게 한다는 것은 지속성을 담보한다. 지나치게 잘하려 애쓰면 마음은 조급함에 잠식되어 사고(뇌동매매)를 부르는 늪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지속하되 잘하지 못하면 지루함에 지쳐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결국 투자의 성패는 얼마나 많이 버느냐의 속도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의 ‘지속하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


하늘은 한 인간에게 전부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라, 타고난 똑똑함에는 대개 꾸준함이 부족하기 쉽다. 그러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은 생산성은 허망하게 무너지며 결코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일의 세계에서 ‘잘함’과 ‘열심’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며, 이 둘이 조화롭게 섞일 때 비로소 완전함에 가까워진다. 소수의 천재적인 똑똑함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꾸준한 지성이 모인 ‘집단지성’이 난제 앞에서 더 높은 정답의 확률을 내놓듯, 타고난 재능이 없는 대부분은 비포장도로를 굽이 도는 것 같은 ‘열심’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확 뚫린 고속도로 같은 ‘잘함’의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똑똑함은 유전의 선물일지 모르나, 그 똑똑함에 꾸준함이 더해져 깊이를 가질 때 인간은 특별해진다.


잘하게 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잘하게 되었을 때 자만하지 않는 것이다. 투자를 잘하기 위해서는 투자하는 마음이 산 중턱의 거친 풍파를 견뎌낸 바위처럼 단단해야 한다. 도로를 내고 광산을 캐기 위해 몸의 절반이 잘려 나가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은 수익 앞에서 자만하지 않고 손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 만물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질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모였다가, 또다시 흩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다. 진정한 치유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걸 놓아버리고, 내면에 넉넉한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슬픔이든, 고통이든, 기쁨이든 그게 무엇이든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페마 초트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무너질 것은 기꺼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마음의 뿌리를 내릴 때 진짜 삶을 알아차리게 된다. 투자 또한 끊임없이 시장의 현상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릴 뿐이다. 여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면을 가득 채운 불편한 감정들을 덜어내는 ‘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건강의 비결이 보약의 더하기가 아닌 독소의 빼기에 있듯, 마음의 여유 또한 생각을 덜어내는 지혜에서 비롯된다. 덜어낼수록 몸이 가벼워지듯, 욕망과 집착을 덜어낼수록 마음은 흔들림의 박자를 탈 수 있는 유연함을 얻는다.


투자의 세계에서 치명적인 힘은 불필요한 감정의 개입이다. 마음에 과도한 힘이 들어갈수록 진화의 과정에서 남겨진 서툰 생존본능, 즉 뇌 속의 애물단지인 ‘클루지’에 의존하게 된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여유가 사라질수록 우리 안의 원시인은 이성의 왕좌를 찬탈하고 ‘감정의 추장’이 되어 파멸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매매의 결과는 투자자 자신 탓이며, 내면의 원시인을 다스리지 못한 책임이다.


생각을 빼고, 힘을 빼라. 거듭해서 진화했지만, 여전히 우리 뇌 속에 공존하는 그 원시적인 본능이야말로 투자자가 평생에 걸쳐 고쳐가야 할 대상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암초 사이로 자신만의 ‘등대’를 세우는 일이다. 시장이라는 망망대해의 복잡계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빛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마음이다. 지수라는 흐름을 등대 삼아 크게 바라볼 때 파동의 흔들림에서 자유로워진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황금을 캐는 일이며, 그 심리 상태가 바로 투자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황금이다. 시장의 정답이 외부의 기법이 아닌 각자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이유는, 원칙을 수호하는 행위가 곧 주관의 편향을 극복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객관의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확률의 속성은 냉정하다. 복잡한 계산이 더해질수록 본질은 흐려지고, 욕심의 조건이 더해질수록 승률은 낮아진다. 단순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면, 시장의 나머지 소음들은 별것 아닌 일로 변한다. 모진 풍파를 견뎌낸 노송의 몸통처럼 투자자의 심리가 단단해졌다면, 그는 이미 목표한 바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공부의 본질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세상을 편견 없이 응시하는 힘을 기르는 데 있다. 본능에 휘둘리는 뇌동매매가 과거의 후회에 묶인 과거지향적이라면, 원칙을 사수하는 행위는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발을 내딛는 미래지향적이다.


감각은 쉼 없는 애씀에 대해 시간이 허락하는 고귀한 보상이다. 원칙을 지키려 재차 다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을 ‘습관’이라 하고, 매 순간 크게 애쓰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감각’이라 부른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흘린 땀방울의 총량을 ‘노력’이라 한다.


확률은 기계처럼 차갑고 정교하게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확률이 그리는 시장의 맥동은 예술가처럼 감각적으로 느껴야 한다.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투자자는 복잡계의 바다를 관조하는 고요한 등대지기가 될 것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억눌린 그림자는 반드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경고했다.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고 꽃잎은 달음질 끝에 흩날리며 떨어진다. 유한한 시간 앞에 고개를 떨구며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감출수록 음습해지게 부정할수록 왜곡되는 인간의 욕망은, 그 본질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이해해야만 다스릴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온다. 욕망의 토양은 결국 ‘마음먹기’에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끝내 뇌동매매의 유혹에 굴복하는 이유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허망한 확신과 탐욕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솟구치는 본능의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날뛰는 야생마를 다룰 수 있는 고삐를 쥐게 된다.


오솔길처럼 좁고 편협한 편견의 마음은 투자의 여정에서 결코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믿음을 저버리고 ‘바람난 남편’처럼 언제든 나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태로운 상태다. 자신의 마음조차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 채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투자인지 투기인지 모호한 안개 속에 머무는 시간은 이미 ‘바람난 마음’에 영혼을 판 것이며, 그 끝에는 로또라는 신기루 외엔 길이 남지 않게 된다.


자기가 변하면 비로소 자기가 사는 세계가 변한다. 변화는 사람을 설레게 하며, 설렘은 그 자체로 충만한 행복이다. 변한다는 무상의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지이며, 우리가 곧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존재임을 망각하는 것은 더 큰 무지다. 어제의 나쁜 습관들을 달고 살며, 한 줌의 시간 속에 얻은 얕은 지식을 절대적으로 믿는 오만이야말로 무지의 극치다.


현상은 변하기에 사람 또한 변해야 한다. 자신이 변한다는 것은 ‘바람난 마음’을 다시 불러 세워 내 편으로 만드는 길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심리가 바로 서지 않는다면, 그 어떤 화려한 기법도 결국 공염불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그 행위 자체에 있다. 계속 정진해야만 계속 정진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데에 있듯, 투자의 본질 또한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는 끝닿는 곳까지 가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결과가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쓰디쓰겠지만, 묵묵히 정진을 거듭하다 보면 마땅히 가야 할 진리의 땅에 가 닿게 될 것이다. 지금 행함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점들이 모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끊임없는 ‘선’이 된다. 이 선은 생의 어느 날,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몇 번의 원칙 준수는 단지 몇 개의 점일 뿐이며, 바람 앞에 등불처럼 미약하고 위태롭다. 그러나 그 점들을 지속하면 단단한 선이 되고, 그 선은 복리의 마법처럼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창대함으로 이어진다. 선이 선명해질수록 그것은 비로소 습관으로 안착한다. 점은 쉽게 지워지지만, 선은 파도를 막아내고 방파제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놓인 거대한 ‘테트라포드’가 된다. 색채로 세상을 볼 때 형상이 선명해지듯, 원칙의 선으로 시장의 파동을 그려낼 때 흐름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선들은 시장의 거센 흔들림으로부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아주는 강력한 방어막이다.


생의 가치는 ‘자신이 정한 어느 선을 몇 번이나 넘었는가?’에 의해 매겨진다. 안주하고 싶은 유혹, 포기하고 싶은 공포, 타협하고 싶은 욕망의 선을 거듭해서 넘어서야 한다.




"어떤 일이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거두는 게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추위와 더위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그것들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영원하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밀물과 썰물은 끊임없이 오가며, 낮과 밤은 계속 교차할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고,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것이 바로 세상 모든 만물에 깃든 본성이다."

<페마 초트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자신의 실제 모습을 투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자비다. 자신이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과 무지에서 자신을 구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들숨이 있으면 반드시 날숨이 있고, 채움이 있으면 비움이 있듯, 모든 현상의 ‘오고 감’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변화라는 거친 파도 위에서 등락할 수 있다. 무상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혹독한 겨울의 냉기를 온몸으로 견뎌낸 가지 끝에서만 찬란한 꽃망울이 터져 나오듯, 고통이란 성장을 위한 마땅한 대가다.


중얼거림이 사라지고 소음의 안개가 걷혀야만 내면의 진실을 응시할 수 있다. 진리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무상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매 순간 온전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상은 무상으로, 고통은 고통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상에 겸허히 내맡긴 채 오늘이라는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투자자의 삶이다.




파동은 매 순간 그 결을 달리하기에, 행하는 반복은 결코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지루한 답습이 아니다. 반복이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파동의 궤적을 통과하며, 그 속에 투영된 새로운 자신을 거듭해서 만나는 과정이다. 원칙이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바로 서면, 반복의 시간을 양분 삼아 원칙은 스스로 자라나며, 마침내 구속의 둥지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때까지 마치 어미 새가 새끼의 입에 먹이를 토해내듯, 자신의 인내와 에너지를 원칙에 쏟아부으며 버티는 것이다. 이 버팀의 시간이 견고한 습관을 형성할 때, 원칙은 경제적 자유를 향한 힘찬 날갯짓을 시작하며 가파른 우상향의 곡선을 그려낸다.


인생은 유한하고 시장의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궤도 밖으로 밀어내려 하기에,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소양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아우성을 냉정히 외면하는 ‘마음먹기’다. 진정으로 비범한 자는 ‘너무나 잘 알기에 기꺼이 하지 않는 자’다. 시장의 생리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제대로 이해한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이 비범한 절제야말로 원칙을 수호하는 열쇠다. 자연의 섭리에 선과 악이 없듯 시장의 파동에도 본래 좋고 나쁨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동은 그저 흐를 뿐이며, 오직 각자의 원칙에 따른 선택의 결과가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하며 우리 마음을 흔들 뿐이다.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유일한 척도는 ‘원칙의 준수 여부’여야 한다. 원칙을 지켰다면 비록 손실이 났을지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고, 원칙을 어겼다면 설령 큰 수익이 났을지라도 그것은 나쁜 것일 뿐이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경계했다. 배우기만 하고 경험하며 정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지혜가 아닌 죽은 지식에 불과하며 오히려 아는 것이 독이 되어 파멸의 길로 인도할 위험이 크다. 반대로 자만의 울타리 안에 갇혀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무지가 독이 되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배우고 사색하는 행위는 비유하자면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다리와 같다. 머리가 걷는다는 것은 지혜롭게 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투자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배우는 궁극의 목적은 ‘평상심’을 지속하기 위함이다. 진짜 실력은 원칙이 어긋나고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간의 흐름 속에 실수를 거듭하더라도 원칙을 지속하면 결과는 좋아지기 마련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거듭해도 좀처럼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결과보다는, 매번 마주하는 위기 앞에서의 반응을 관찰할 때 그 투자자의 수준을 가장 선명하게 엿볼 수 있다. 실수하고 흔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며, 전체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주관은 개입이고, 개입은 선택이며, 주관적 선택의 뒷면은 대개 짙은 후회와 아쉬움이다. 배우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자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주관이 강할수록 마음은 잔뜩 찌푸린 하늘처럼 어둡고 무거워진다. 돈은 아쉬움과 후회의 꼬리를 물게 하며,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아 결국 영혼을 엉키게 만드는 기묘한 속성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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