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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는 감정의 무게를 견뎌내는 행위다.

by 황금지기

생각한다는 자체가 불안을, 불편함을 곳곳에 던져놓는 것과 흡사하다. 자꾸만 뭔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복잡해지는 것이다. 단지 익숙한 감정을 내려놓으면 감정의 무게를 견딜 여지가 커지면서 변하게 된다. 확률적 사고로 위험을 통제하는 자제력의 크기가 각자의 실력이다. 투자자는 나날이 감정을 쟁취하면서, 자기감정의 장애물을 정한 원칙으로 건너가면서 성장해야 한다. 손익을 떠나 원칙을 지켜가는 긍정적인 과정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솟아 나오고, 감정을 통제해야 철이 들게 되고 공평한 관찰자를 두게 된다.




선택과 집중이어도 아쉬움과 미련은 필연이어야 하지만, 후회는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일상이어야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가 대단히 어려운 게 투자의, 인간의 본질이다. 자본시장에서는 손실이어서 힘들 때 사람의 진가는 드러나고 그때의 처신이 그 사람의 진짜다. 시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돈으로 비대하면서도 비열하기에 기도와 한방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노예근성일 뿐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에서 작게 사그라들고 크게 피면서 내리는 뿌리만큼 울창해지라 하는데 그 내면의 아우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리 반복하면서 깊이 들어가라 외침이 잦아들지 않기에 손에 쥔 삽의 게으름을, 의지의 기웃거림을, 자꾸만 흩어지는 시간을 방관할 수는 없다. 대부분 인간의 꿈은 창대하여도 인간은 미약할 뿐인 것을, 시작만 창대할 뿐인 것을, 미약함을 담아 키울 그릇조차 소중함을 모르는 것을, 마음만 창대하여 적은 시련조차도 되돌림의 표지판으로 남기는 것을, 옳지 않은 현상에 정의를 논해도 오롯이 참기 힘들 정도로 가벼운 입뿐인 것을, 제아무리 똑똑해도 우연의 도움 없이는 그저 그럴 뿐인 것을, 아무리 다짐으로 원칙이라 부르짖어도 놓친 수익은 아깝고 당한 손실은 그 이상으로 아픈 것을 깊이 알아가면서 외면하지도, 방관하지도 않고 길을 찾아간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중력의 무게를 견디며 산다고 하듯이 투자자는 시장에 발을 디딜 때부터 감정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한다. 감정을 견디고 극복하는 나빴을 때나 몹시 나빴을 때의 행동에 따라 좋을 때 운의 작동 여부와 크기가 마음의 여유로움과 비례해서 결정되는 곳이 시장이다.




그렇지만 예술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술은 결코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단히 많은 대가를 요구했고, 희생을 요구했다. (중략) 예술은 얼핏 보면 정신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 도구와 목재, 흙, 물감, 금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넓은 세상을 만끽하는 자유, 위험을 즐기는 짜릿한 쾌감, 안빈낙도의 자부심을 모두 바쳤다. 그러고도 그는 숨을 죽이고 화를 삭이며 자꾸만 새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려지는 파동의 어떠한 율동을 따라 원칙을 세우고 위험에 대한 내면이 따를 만큼의 체계적 정의, 실제로 가능하다는 자기 확신, 정의된 위험보다 기대수익이 크다는 자기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지속해서 파동을 그려갈 수 있게 된다. 성취를 위해서는 복기와 반복과 같은 체계적인 훈련이나 ‘또 다른 나’로 변화의 발걸음을 떼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은 필연이다. 파동을 제대로 그려가기 위해서는 주관을 제물로 바쳐서 객관적 시선을 얻어내는 과정 또한 필연이다. 정서적으로는 당연했지만, 기다리지 못하는 건 여전히 본성에 충실하면서 기도하겠다는 마음의 승리를 의미하는 분명한 증거이고, 정서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만일의 위험을 대비하여 대응하지 못하는 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인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대수의 법칙으로 증명하기 위해,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마음을 다스리며 실천하는 현재형이 바로 대응하고 있는 자신이다. 대응했다는 건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기다렸다는 건 대응할 수 있다는 전제가 된다. 그렇게 기다릴 수 있고 대응할 수 있음이 흐르는 물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정한 것들 안에서의 반복이 들숨과 날숨이어야 깨지면서 깨우치게 된다. 깨우치면서 깨어나게 되고, 깨어나면서 마침내 깨닫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익숙한 기존의 것들을 내려놓아야 낯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면서, 커지고 그렇게 변하게 된다.




“천만에, 자네는 금방 이해하게 될 거야. 자, 들어보게. 사상가는 세계의 본질을 논리로 인식하고 표현하려 하지. 사상가는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의 도구인 논리가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마치 지혜로운 예술가가 자기의 붓이나 조각칼로 천사나 성인의 빛나는 본질을 결코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든 예술가든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그런 시도를 하지. 양쪽 다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일세.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씀으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을 행하는 셈이지. 그래서 전에 자네한테 틈만 나면 말하지 않았던가. 사상가나 금욕주의자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고, 본연의 자아를 되찾고 자아를 실현하도록 애쓰라고 말일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자꾸만 뭔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니까 제자리에 갇힌 채로 분명해졌다가도 어느새 흐려지는 불분명한 시간을 소비만 하게 된다. 선명하게 보이는 건 저점을 기다려서 매수하라는 것이고, 단순하게 들리는 건 손실이면 짧게 자르고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선인들의 선례는 두어 줄의 핵심을 제시하고 그저 그 단순함을 ‘실천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며 거듭해서 강조하지만, 그 단순함에 강가에 이르는 자도 적을뿐더러 실천하는 자는 극히 드물기에 대부분 투자자는 시장에서 이방인이다. 투자의 비법에 관해 누군가 물어오면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당신 안에 있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듯 비법은 이미 마음 안에 있기에 투자를 8할의 심리 게임이라 한다. 그렇다면 비법은 애쓰는 마음을 다듬어가는 인문학적 소양이기에 독서이고, 책 속에 사람의 마음이 있다. 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흐름을 보여주기에 읽고 판단하다 보면 세워지는 원칙도 더 이상 부러지지 않고 단단해지게 된다.




골드문트는 커다란 난관들에 부딪혔다. 난관은 생각보다 컸다. 그로 인해 걱정되긴 했지만, 그런 걱정조차 오히려 달콤할 정도였다. 그는 마치 수줍어하는 여성에게 구애할 때처럼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작품에 매달렸으며, 마치 거대한 가물치와 씨름하는 낚시꾼처럼 사력을 다해 싸웠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오히려 뭔가를 깨우쳤으며, 그럴수록 그의 감각은 더 섬세해졌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확률을 통제하는 게 기다림이고, 위험을 통제하는 게 대응이다. 수익을 위한 노력이 운이 작용할 확률이 높을 때까지의 기다림이고,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 손실이 커지기 전에 잘라버리는 대응이다. 기다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고, 손실이란 난관에 부딪히면 뭔가를 깨우치기 위해 대응하면서 투자자의 감각은 깊이를 더해가게 된다. 기다리고 대응하지 않는 매매가 거듭된다면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확률적 사고로 위험을 통제하는 그 자제력의 크기가 각자의 실력이다. 결국 자제력의 그릇만큼 수익을 담을 수 있고, 자제력이 약한 이의 밑빠진 그릇에는 담기는커녕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크게 잃을 때는 추세에서 고집을 부리는 경우와 등락하는 파동의 마디마디에서 심리가 무너져 따라다니는 경우다. 등락의 관점에서 이러한 매매는 지독한 욕심에 갇힌 아찔한 착각이다. 등락의 관점은 누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담은 것이다. 마디를 취함으로써 시장의 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여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들뿐일세. 그런데 자네는 내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공부할 때 싸우는 모습도, 기도실에서 싸우는 모습도 본 적이 없어. 자네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은 좋아. 자네는 그저 내가 자네보다 기분에 덜 좌우된다는 것만 보고서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자네 경우도 그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숱한 실패가 당연하게 반복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건 인생을 바꾸는 도전이 아닐 것이기에 투자로의 도전은 값진 것은 분명하다. 투자자는 어떤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는 사람인가?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운이 작동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 관리 보수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기계라면 설계하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면서 output을 생산해 내는 사람이다. 이렇듯 해야 할 일들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행동과는 언제나 엇박자인 건, 대부분 투자가 망가지는 건 조건은 계속해서 변하고, 상황도 그렇게 변하는 데 마음이 그 변화에 거의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과거에 익숙함에서 버티려 하기 때문이다. 가볍게 치고빠져야 하지만, 흔들리면 흔들린 만큼 무거워지기에 치고빠지기는커녕 스스로 세운 우상에 기도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자꾸만 전락하고 만다. 시장에서의 여유로움은 절대 쉽게 얻어지지 않기에, 성급함에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일 수밖에 얻기에 한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버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길은 세수하듯 나날이 감정을 쟁취해서 키워가는 여유로움뿐이니 실천해야 한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확률적인 것들 즉 운이 상당 부분 지배하는 것들을 다룸에 있어서는 생각을 많이 할수록 확률은 낮아지는 법이다. 확률의 세계에서는 높은 확률의 잣대를 세워서 그것을 믿고 그저 반복하는 게 왕도이기에 생각은 잦은 실수나 감정의 엉킴을 조장할 뿐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필요한 시험이나 좋은 직장에 합격하는, 뜻대로 노력하는 것만큼 결과가 명확한 것과는 달리 확률적이라는 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에, 뜻대로 되지 않는 영역에서는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생각한다는 자체가 불안을, 불편함을 곳곳에 던져놓는 것과 흡사하다. 실전 이전의 생각은 충분히 사색이라 칭찬받을 만하지만,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생각은 쓸모없는 게 쓸모 있음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파동은 확률적이기에 등락의 관점이든, 어떠한 관점이든 낚시가 그러하듯 되는 날이, 안 되는 날이, 운수 좋은 날이, 머피의 법칙에 딱 걸려 고생하는 날들이 교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확률적인 건 받아들이는 만큼 다룸이 수월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이다. 자신을 위한 운이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신의 위험을 통제해야 한다. 운이 작동하는 상태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안한 게 실력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위대한 깨친 명제 안에서 그럼에도 길을 찾을 수밖에, 불구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게, 평범함과는 달리 비범함이 아니고서는 거의 다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숱한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게, 심리라는 어려운 극복의 문제를 담은, 포개진 카드를 한 장씩 뒤집어가면서 버티는 게 투자를 지속한다는 진정한 의미 같다. 이처럼 너무나도 어렵기에 이겨낸 대가는 클 수밖에 없으므로,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자기 극복을 반복한다는 건 할 수만 있다면, 해낸다면 살아감에 너무나도 값진 선물이기에 과정에서의 고독만 극복할 수 있다면 뚜벅이처럼 걸어가 볼 만한 길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 본성에 이끌려 나이가 다져버린 습관이 각자의 인생에서 흘러갈 강물을 막아버린 걸림돌이 되고, 어느덧 댐이 되어버렸기에 흐르고 싶어 하는 열망은 스스로 의도치 않게 감정으로 막아버린 걸림돌을, 댐을 어찌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지금의 인생을 건너가고 싶은 자는 지금 행위들의 정중앙을 정확하게 관통해서 자기 통찰로 내면 깊이 들어가 자기감정의 장애물을 지나가야만 한다. 투자의 과정에서 자기감정의 장애물을 하나하나 정한 원칙으로 버티면서 건너가는 건 투자라는 행위가 투자자에게 주는 진정한 가치다.




삶이 던지는 도전 요청을 뿌리칠 때, 인생은 말라붙어버린다. 이루지 못한 꿈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긴다. 일상이 비루하고 힘들 때면 짜증과 화가 치밀기도 할 테다. 캠벨은 말한다. (닥쳐온 모험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길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된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을 때의 절절함이 있어야 한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 – 안광복>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일상의 일들과는 달리 창조적인 일들은 그렇지 않고 아무리 애써도 성과는 묻히기 십상인 법인데 투자는 너무나도 비선형적이다. 정답이 없는 확률을 다루면서 우상향의 누적을 쌓아가는 감성노동의 반복 정도로 정의되는 게 투자이기에 감정을 극복하면서 반복하는 마음을 단단하게 고정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손익을 떠나 원칙을 지켜가는 긍정적인 과정에서 행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단단한 무언가가 솟아 나온다. 그 위대한 무언가를 찾아내면서 비상하게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데미안」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 머릿속을 온통 뒤덮고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공평한 관찰자가 마음에 자리 잡는다는 뜻 아닐까? 성숙한 사람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삶과 세상에 대한 의무감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칭찬과 비난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다. 누가 나서서 추켜세우거나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인격을 갈고닦게 된다는 뜻이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

외부 변수는 통제할 수 없지만, 내부 변수(심리)는 통제할 수 있다.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에 외부 변수는 무작위의 변수일 뿐이고, 통제 밖의 변수에 대응하는 수단은 기도와 응답 같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소극적 수단에 얽매일수록 내부 변수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하게 되면서 그저 그런 뇌동과 추격을 연속하는 다수가 된다. 소수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내부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다. 투자자는 내부 변수의 통제를 통해 운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지속해서 조성해 가는 사람이며, 자신을 절제하는 게 실력이므로 투자는 심리 게임이다. 투자자가 통제한다는 건 마음의 절제이고 선택과 집중한다는 건 마음의 여유로움과 덤덤함이다. 통제의 시작은 원칙을 그저 오는 오늘에 감사하는 것이라 여기며 지키는 것이다. 원칙이 수익을 담아내는 크기는 당장 가늠할 수는 없는 법, 지켜가는 시간에서 다져지는 감각이 그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부 변수를 통제할 수 있어야만 철이 들게 되고 주관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에 두게 된다.




자신을 돌아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스캇 펙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성경 구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누구일까? 자기 자신을 부족하고 허점이 많다고 인정할 줄 아는 자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곱씹는다. 그래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들은 고통을 자신에게 뭔가 그릇된 점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로 여긴다. 이들에게 아픔은 성장통일 뿐이다. (중략) 스캇 펙은 “악은 태만에서 생긴다.”라고 잘라 말한다. 매 순간 반성하며 마음을 닦는 자세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해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남 탓과 상황 탓을 하는 편이 훨씬 쉽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기를 게을리할 때, 악은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도서관 옆 철학 카페>

투기와 투자는 확률을 알고 때를 기다리는 여부로 구분하면 쉽다. 확률을 알지 못하면 투기이고, 알아도 기다리지 못하면 (실천하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투기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 돈이 조금씩 쌓여가는 시간 즉 시간의 필연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행위는 투자가 되고, 시간의 법칙을 무시한 채 성급함과 욕심이 앞서면 아무리 지식이 깊어도 투기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결국 투자와 투기의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의 이해다. 가격에 집중하면 투기에 가깝고, 시간에 집중하면 투자에 가깝다. 현재의 가격에 시선에 머물면 투기하는 것이고, 큰 흐름에 시선이 머물면 투자하는 것이다. 투자 행위가 지속해야 성장한다. 시간과 성장은 함께 묶여서 동행하는 단어다. 금리가 인상될 때보다 금리가 인하될 때 주식에 투자하는 게 수익 확률이 높아지므로 그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투자하는 마음이고, 파동을 그려가면서도 등락의 관점에서 각도가 우상향이면 매도의 확률이 높으므로 아무리 더 갈 것처럼 보여도 매수로 따라가지 않고 원칙으로 정한 자리를 기다리는 마음이 투자하는 마음이다. 태만하여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투기꾼이 될 수 있으며, 성급함에 흔들리거나 욕심으로 안개가 자욱한 마음에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 뇌동과 추격이란 악이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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