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배웠습니다”, “놓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낮추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개를 낮추어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제대로 된 배움이 스며든다. 고개를 드는 오만함은 마음을 닫게 하며, 닫힌 마음으로 얻은 얕은 지식은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전장에서 득보다 해가 될 뿐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절실하지만, 사람들은 내면의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중얼거림에 반응하느라 정작 자신을 직시하지 못한다.
경험이 얕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이 가장 훌륭한 태도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경험하는 시간만큼 진짜 자기 것이 된다.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여 얻어지는 이 배움은 거스를 수 없는 신의 섭리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아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자만하고 떠벌린다. 이러한 감정의 소음은 정작 중요한 시장의 신호를 가리고 눈을 멀게 한다.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는 무지는 바로 이 소란함에서 비롯된다.
경험이 깊어지면 말을 아끼고 침묵한다. 언어의 한계와 경험의 무게를 아는 자는 섣불리 떠벌리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서로 시너지를 내지 못하며 그저 시끄러운 불협화음만 더해질 뿐이다. 자기를 낮추어 경험의 시간을 견뎌낸 사람만이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진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진짜 실력은 말의 한계를 알고 침묵한다. 지식은 제 무지를 모르기에 소란스럽다. 아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자만의 소음을 걷어내고, 고개 숙여 경험을 채워가야 본질을 꿰뚫는 통찰의 황금을 손에 쥔다.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지식은 짐이 될 뿐이다.
마음과 인생은 참으로 미묘하다. 마음먹기가 시간이라는 복리를 타고 거대한 격차로 벌어지는 것이 인생의 이치다. 그러나 인간은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을 빼앗긴다. 결국에 좋은 것은 저항이 거세고, 나쁜 것은 유혹이 너무나 짙다. 험난한 산을 오르기보다 중턱 계곡에 돗자리를 펴기가 쉽듯, 원칙을 고수하는 것보다 생각대로 내뱉는 매매가 훨씬 수월하다.
당장 눈앞에 달콤하게 끌리는 것 중에는 나쁜 것이 많고, 참아내기 고통스러운 것들은 대개 결국에 좋은 것으로 귀결된다. 투자의 본질인 기다림도, 몸을 비우는 단식도 결국은 요동치는 마음을 참아내는 일이다. 사색은 어렵지만 멍때리기는 쉽다. 이처럼 좋은 것은 어렵고 나쁜 것은 쉽기에, 그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일은 결코 '아무나'의 몫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부의 총량이 제한적인 이유 또한 부가 그 고통을 통과한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에 종속된다. 오늘 행하는 것들이 모여 결국 '결국'이 된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사색의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술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것은 마음먹을 필요조차 없이 쉽다. 나쁜 것들은 요란하게 우리를 부르며 저절로 이어지지만, 좋은 것들은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금세 나태의 늪에 빠지기 일쑤다. 어려운 쪽을 선택하는 매일의 투쟁만이 진정한 부와 성취로 인도한다.
결국에 좋은 것은 마음의 저항을 뚫어야 얻어진다. 나쁜 것은 마음먹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진다. 미래는 현재의 종속변수이기에 오늘 선택한 어려움이 곧 다가올 미래의 크기를 결정한다.
”우리가 온갖 약점을 끌어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앞만 보고 계속하여 매진할 때 우리는 비록 이리저리 흔들리며 힘겹게 바람을 뚫고 나갈지라도, 돛과 노의 힘을 빌려 나가는 사람들보다도 더 성공적으로 더 멀리 나아왔다는 걸 발견하곤 하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거나 앞설 때 느끼는 진솔한 감정 아니겠나.“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삶의 에너지는 유한하기에 술로 시간을, 담배로 건강을 과소비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타인을 평가하거나 자신을 비교하는 행위는 영혼의 총량을 갉아먹는 일이다. 꿈속의 당부처럼, 우리는 호불호를 떠나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외부를 재단하고 비교하기보다는 늘 최악을 염려하며 현상을 겸허히 경험할 때, 인생은 내면으로 깊어진다. 진정한 이타심이란 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선한 의지이며, 이 마음이 전제될 때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
세상을 향한 좋은 마음은 현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그 맑은 기운은 다시 좋은 것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거나 누군가를 이기려 하기보다, 주어진 오늘에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실천이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멀리 데려다준다.
내면으로 침잠할 때 통찰은 깊어진다. 타인을 평가하는 소란을 잠재우고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좋은 마음은 좋은 미래를 끌어당기는 가장 강력한 자석이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반신(半神)이라 칭송받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존재인데 정작 가장 요긴하게 힘이 필요한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쏟아부을 힘이 없지 않은가? 기쁨에 겨워 날뛸 때든, 슬픔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할 때이든, 인간은 무한함에 잠겨 스스로를 잃어버리길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들조차도 완전히 그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고, 다시금 무디고 냉정한 의식의 편으로 돌려보내지지 않던가?“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렇듯 감정에 휘둘리며 소중한 인생과 행복을 낭비하곤 한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은 감정이 앞서지 못하도록 행동을 먼저 앞세우는 것뿐이다. 행동하면 감정이 따라온다는 믿음은 오직 반복되는 실천을 통해서만 단단해진다. 행동하지 않으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으며,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은 투자자와 모든 인간이 마주하는 최대의 적이다. 투자에서 얻는 수익은 결국 '마음 챙김'의 정당한 대가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마음 사용 설명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 설명서조차 읽지 않은 채, 제멋대로 꿰맞춰진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뇌동매매의 늪에 빠진다.
뇌동하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독서와 글쓰기 같은 인문학적 소양은 바로 그 자기 이해의 시작점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각자의 길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길을 찾기 어려울 뿐이다. 인문학적 지식을 도구 삼아 끊임없이 자문하며 최선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동이 감정을 이끈다.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은 인생을 낭비하게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설명서를 정독하고 실천하는 자는 요동치는 감정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길을 기어이 찾아낸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자신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자 현명함의 본질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바라보는 나’와 마주하기 위함이요, 투자하는 행위는 ‘실천하는 나’와 마주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보기 위한 과정이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이 절실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그 기복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사유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깊이 쓰기 위해 읽고, 제대로 읽기 위해 다시 쓴다. 그 과정에서 투자 심리를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원칙을 지키려 애쓰는 것은 곧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 원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자신을 돕고자 내리는 ‘자신에게로의 칙령’이다. 투자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은 결국에 좋은 것 중 으뜸이며, 욕망에 휘둘리는 감정의 개입은 결국에 나쁜 것 중 으뜸이다.
인간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탐욕과 두려움을 중얼거리는 존재다. 그 감정의 다그침이 너무나 요란하고 번잡하기에, 어쩌면 신조차 그 소음을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원칙을 저버린 채 뇌동매매하며 올리는 기도는 그 형식만 경건할 뿐, 그 속내엔 타인의 손실을 발판 삼아 나만은 살겠다는 지독한 이기심이 가득 차 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시장의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에 결코 순응할 수 없다.
자신에게 내린 칙령을 받들어라. 그 순종함 속에 당신의 대자유가 있다. 부질없는 기도가 아닌 엄격한 원칙을 앞세운다면 시장의 소음을 뚫고 고요한 본질의 바다에 가 닿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감정 뒤에 숨어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 한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는 행위는 현상을 흐리게 만들며, 감정의 성벽이 견고해질수록 진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이런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숙이란 나이가 들수록 커지는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책임지지 못한 선택의 합이 곧 실패이며, 그런 의미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한 책임의 문제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원칙을 고수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한 걸음씩 묵묵히 걷다 보면 그것은 습관이 되고, 짐의 무게는 그대로일지라도 몸에 익숙해지며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이 인생의 이치다. 매매의 현장에서 감정이 앞서면 버튼을 누르는 손조차 주체할 수 없는 무력함을 경험하게 된다. 자꾸만 날뛰는 이 황폐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도구는 반복을 통해 일구어낸 비옥한 감각뿐이다.
원칙은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다. 인간에게는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이 있다. 단지 그 힘을 사용하는 법을 잊었거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뿐이다. 반복한다는 것은 잠들어 있는 그 힘을 깨워 사용하는 행위다.
나만 옳다는 오만과 편견은 시장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편견은 공정함을 잊고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며, 오만은 감사할 줄 모르는 거만한 생각이다. 이들은 감사함의 반대편에서 시장과 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만이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고, 현상을 직시하게 하며 타인의 진심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신이 옳아야만 한다는 강박이 곧 뇌동의 본질이다. 옳음에 집착하는 뇌동은 편견과 같아서, 선택지의 한쪽 세상만을 바라보게 해 결국 진짜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시장에서 오만의 쓸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지식은 마땅히 지혜로 향하는 통로이자 지적 연료가 되어야 함에도, 대개는 오만과 편견을 치장하는 지적 허영심에 그치고 만다. 허영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일 뿐이며, 지식을 말하기 좋아할수록 그 내실은 비어 가기 마련이다.
말을 아끼고 침묵하는 동안 진짜 기쁨을 만나게 된다. 지식을 겉치레로 내뱉는 대신 내면에서 정제하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지식은 단단한 내실이 된다. 내가 아는 지식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만 그 지식의 진정한 쓸모를 찾아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만이 아는 깊은 기쁨은 사람을 가장 고귀한 행복으로 인도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인간의 가치는 그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자신을 만들어 가는 실체는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며, 그 경험은 오직 몸의 정직한 ‘행함’에서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마음이 깨어 있지 않으면 인간의 몸은 찰나의 편안함에 취해 나태의 늪으로 침잠하기 마련이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서늘하게 직시하며 발을 내딛는 자는 현명함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에 들어선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을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기에, 그 부족함을 원망의 핑계로 삼느냐 혹은 성장의 마중물로 삼느냐가 그 사람의 남다름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된다
부족함을 아는 마음에서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함이 피어난다.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만족은 행복으로 인도한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깊이와 재미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무지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마음과 몸이 하나로 합쳐질 때, 몸은 마음이 갈망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생과 투자의 성패는 결국 운명에 순응하는 최선의 태도로 결정된다.
삶의 가치는 스스로 그어온 실천의 선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상황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보다, 주어진 운명에 최선이라는 선물을 바치는 행동이 삶의 궤적을 그려간다. 똑똑함은 유전의 영역일지 모르나, 꾸준함은 온전히 자신이 빚어내는 영역이다.
‘천장 3일, 바닥 100일’이라는 격언은 주식시장의 냉혹한 비대칭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환희의 꼭짓점은 찰나처럼 지나가지만, 하락과 횡보의 지루한 터널은 끝도 없이 길다. 아무도 모를 고점을 탐하며 달리는 파동을 추격하는 자는 결국 고립과 마음고생의 늪에 빠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투자자는 파동이 쉬어갈 때를 기다려 진입함으로써 확률적으로 편안함을 확보한다. 추격이 작은 동그라미에 매몰되어 숲속 오솔길을 헤매는 것이라면, 추종은 직사각형의 거대한 숲을 조망하며 나아갈 길을 가늠하는 여유다.
통계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 이상의 부자는 전체 인구의 0.9%에 불과하다. 이 1% 부자의 반열에 오르는 확률은 시장의 ‘천장 3일’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희귀하고 어렵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고점에서 대중과 함께 휩쓸려 다니는 태도로는 결코 이 확률의 벽을 넘을 수 없다. 결국 부의 성취는 천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바닥 100일’의 고독과 마음고생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달려 있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보여주는 태도가 곧 그 투자자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있어면 긴 바닥을 견딜 힘이 생긴다. 시장이 조급함이 잦아든 바닥의 시간에서 부자를 잉태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긴 시간을 묵묵히 버텨내는 인내야말로 평범한 99%와 비범한 1%를 가르는 기준이다.
선택과 확률의 바탕에는 늘 모호함이 깔려 있다. 인생도 투자도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기에, 이 불확실한 대상에 억지 확신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모호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현상에 순응하는 것이 현명함의 시작이다. 말을 아끼거나 원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지만, 결국 모호함이라는 전제 위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결정된다. 투자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모호한 본질에 마음을 온전히 동화시켜야 한다.
주가는 결코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호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찾아 헤매거나, 그것을 예측의 도구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 대신 현상 그 자체에 길을 물어야 하며, 시세가 그려 나가는 길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따라가야 한다. 생각에 갇혀 오솔길을 방황하기보다는, 숲 전체를 조망하며 나아갈 길을 가늠해야 한다. 시장에서는 내 고집과 마음을 내려놓은 그 빈자리에 돈이 채워진다고 믿는 것이 마음 편한 길이다.
투자는 마음먹기의 예술이다. 투자의 모든 길은 결국 심리로 통한다. 기법이나 분석보다 중요한 것은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