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을 챙겨도 더 큰 시세를 놓쳐 후회하고, 챙기지 못하면 수익을 놓쳐 아쉬워한다. 냉정히 말해 투자자의 시간은 늘 후회이거나 아쉬움, 그 둘 중 하나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단지 확률로만 존재하는 현상에 온전히 맞추어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그 길은 가치가 있으며, 그렇게 여기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다.
매매의 여정은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는 조바심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책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당연한 과정에서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서 자신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현상만을 직시하며, 깨짐을 통해 비로소 깨침을 얻는 것,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익어가는 것이다.
후회와 아쉬움은 시장과 호흡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음 파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다. 다만 어제의 후회를 오늘의 깨침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당신은 파동의 리듬 위에 올라탄 것이다.
냉정하고 대범해지겠노라. 굳게 다짐하고 믿어보지만, 막상 똑같은 시장과 맞닥뜨리면 그 차갑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뜨겁게 타올랐던 사랑의 감정이 어느 순간 열병처럼 솟구쳤다가, 또 다른 감정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인간의 본성처럼 말이다. 마치 행위 전과 후의 감정이 다르듯, 일순간 이성을 잃고 자욱한 안개 속에 갇혀 버리는 상황을 반복한다.
이것은 어쩌면 약도 없는 지독한 상사병과 같다. 파동의 흐름 안에 원하는 모든 성공과 행복이 들어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으며 미친 듯이 갈망하지만, 막상 그 기회와 마주하면 잠시 설렜을 뿐, 이내 지독히도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인 양 어제와 비슷한 행태를 되풀이한다.
감정은 냉정한 시선을 마비시킨다. 감정이 고개를 쳐들면 그토록 선명했던 냉정한 시선과 현상에 대한 믿음이 결정적인 순간에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럴 수도 있다’라는 확률에 자꾸만 희망을 걸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투자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사냥꾼들의 발밑에서 도요새가 끊임없이 날아올랐기 때문에, 레빈도 얼마든지 실수를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총을 쏘면 쏠수록, 레빈은 베슬로프스키 앞에서 더욱더 수치심을 느낄 뿐이었다. 베슬로프스키는 새들이 사정거리에 들든 말든 유쾌하게 마구 쏘아 대기만 할 뿐,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 레빈은 급하게 서둘렀고 자제력을 잃은 채 점점 더 흥분했다. 급기야 그는 사냥감을 맞추리라는 기대도 거의 없이 총만 쏘아 대는 상태에 이르렀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도요새가 늪지 위로 날아오를 때마다 총을 쏘기만 하면 잡을 것 같은 성급함, 그 충동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깨닫는다. 아무리 총알을 허비해도 허공만 가를 뿐이며, 사냥개가 다시 사냥감을 발견할 때까지 고요히 기다려야 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순간의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대부분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희일비가 숙명인 인간의 본성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파동을 만났으니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돈이라는 숫자가 눈앞에서 이익과 손실을 오가며 심장을 쥐락펴락하는데,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성급함은 자제력을 잃게 하고 돈을 허비하게 한다. 사치와 환락의 유혹을 이길 인간이 드물듯, 탐욕의 여신이 나신을 드러내며 유혹하는 이 현장에서 절제를 지켜낼 인간 또한 극히 드물다. 애초에 지는 싸움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투자자가 자신의 생을 걸고 열정을 바쳐야 할 진짜 대상은 시시각각 무너지는 자신의 ‘투자 심리’여야만 한다.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흐르는 세월을 ‘변덕쟁이’라 부르고, 실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뿌리를 내린 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그루 나무처럼, 자기 죽음이 곧 세상의 종말일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 속에 갇힌 존재가 바로 우리다. 아무리 냉정이란 옷으로 치장하려 해도, 숨어 있는 열정의 불씨는 작은 바람에도 언제든 되살아나 우리를 휩싸이게 한다.
감정의 불씨는 완전히 끌 수 없다. 그 불씨는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숨 쉴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뿐이다. 결국 생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것은 마침표를 찍는 일이 아니다. 요동치는 감정과 타협하며 중간중간 쉼표를 찍어가는 것이다.
투자는 감정과 더불어 가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열정에 휩싸여 뇌동 매매를 했다면 잠시 쉼표를 찍고 숨을 고르면 된다. 마침표를 찍으려 서두르지 마라. 믿음과 노력이 이끄는 대로 그저 하루하루 잘 익어가는 것이 목표다.
투자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틀에 박힌 정답은 없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것을 두고 억지로 맞추려 집착하기에, 작은 흐름과 수익에 연연하며 소중한 시간만 낭비한다. 투자는 인간이 감당하기에 실로 너무나 어렵고 심오하다. 냉정히 말해, 기법에서 취할 수 있는 실익은 많아야 고작 20%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장은 선명할 때보다 흐려져 있을 때가 더 많고, 쉬울 때보다 어려울 때가 훨씬 더 많다. 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쉽고 선명한 구간이 나타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수 있는가, 대응 이후 다시 겸허하게 기다림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기술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심법의 문제다. 심법의 토양이 되는 육체의 건강, 긍정적인 태도, 그리고 편안한 심리만이 누적 수익과 자신감이라는 진짜 정답을 빚어낸다.
투자는 단답형 OX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닌 것'을 가려내는 선구안과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절대적으로 틀에 박힌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짧은 손실과 긴 이익의 구조를 반복하는 그 순환의 기쁨, 그리고 기다림 끝에 마주하는 전율 속에서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미 증명된 사실은, 그 어떤 숭고한 결의나 단단한 다짐조차 요동치는 파동 앞에서는 망각의 영역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감정의 기복은 의지로 쉽게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게 유일하다. 본능에 저항하며 큰 흐름을 조망하려 애쓰는 것, 매매의 횟수를 줄이는 것, 그리고 짧은 손실을 내어주고 긴 이익을 취하는 원칙을 묵묵히 지켜가는 것이다.
세상과 부딪히고 현상을 맞닥뜨리며 사람을 대할 때마다 긍정적인 태도와 편안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라. 이것은 살아갈 권리에 대한 의무다. 걱정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4%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인간이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삶의 '미성의 영역'은 고작 1%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통제할 수 없는 99%의 거대한 흐름 앞에 겸손해지되, 바꿀 수 있는 그 작고 소중한 조각 하나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한다.
바꿀 수 있는 작은 조각이 원칙이다. 그것에 마음을 다할 때, 매일의 매매는 단순한 돈벌이를 넘어 보물을 캐는 과정이 된다. 오늘도 파동 속에서 원칙이라는 보물을 캐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찬란하게 빛내줄 것이다.
손으로 공을 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스윙’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 골프에서 물 흐르듯 유연한 스윙을 하려면 공을 멀리 보내겠다는 욕심을 비워야 한다. ‘공을 때리겠다’라는 목적에 사로잡히는 순간, 어깨에는 힘이 들어간다. 투자 또한 이와 같다. 방향을 맞추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흐름에 몸을 실어야 하며, 돈을 따겠다는 탐욕을 비우고 시세의 흐름에 돈을 맡겨야 한다. 가격이라는 숫자에 눈이 꽂히는 순간, 마음엔 욕심이 스며들고 눈은 흐름을 놓치게 마련이다.
어느 분야든 현상 그 자체에 무아로 집중할 때 비로소 성공의 문이 열린다. 골프에서 90타로 가기 위한 세 가지가 바로 ‘무욕(無慾)’, ‘무념(無念)’, ‘무력(無力)’이라 하지 않던가. 잘 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면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한 생각은 온몸을 경직시킨다. 복기는 생각하며 분석하는 시간이어야 하지만, 실전은 생각을 지우고 흐름에 온몸을 온전히 내던지는 시간이어야 한다.
욕심을 덜어내면 생각은 단순해진다, 생각이 가벼워지면 몸에서 힘이 빠지게 된다. 매매의 본질도 결국 이와 같지 않겠는가! 가격을 맞히려고 하니까 생각이 많아지고, 그 무게에 눌려 중요한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투자자는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본성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휘두르고 싶은 그 마음을 통제해야 한다. 원칙이라는 방패를 굳건히 세우고, 포위망 곳곳에서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대듯 튀어나오려고 하는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를 끈질기게 이겨내야 한다. 결국 투자는 무언가를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걸어가는 고독한 여정이다. 투자는 자신을 발견하고 완성해 가는 도구여야만 한다.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가꾸다 보면 그 대상은 비로소 사랑스러워진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길들인 그 시간이 바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투자를 소중하게 만든다. 「어린 왕자」에서 매일 오후 네 시에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세 시부터 설레던 마음처럼, 비록 한 달에 단 하루의 기회만 주어질지라도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날들을 기꺼이 설렘으로 채울 수 있는 투자를 하고 싶다. 한여름의 따가운 태양조차 아름답게 느끼게 해 줄, 존재만으로 가슴 뛰게 하는 그런 파동을 만나고 싶다.
파동과도 ‘길들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운명의 기적이 일어나, 그 파동이기에 보폭을 기꺼이 맞추며 인내할 수 있는, 그 존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투자를 꿈꾼다. 나를 온전히 존재하게 만드는 특별한 무언가, 시장의 파동이 나에게는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다.
“아무도 안 구해줘.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은 네 생각보다 훨씬 길어.”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 속 대사다. 시장은 결코 당신을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상승으로 갈 거야", "여기서 매수가 맞아"라고 외치며 맞고 틀렸는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투자의 본질은 대응할 수 있는 파동이 올 때까지 기다려 그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다.
주가는 맞추려 들수록 어긋나기 마련이다. 세상 그 누구도 시장을 완벽히 맞출 수 없기에, 우리는 오직 ‘어떻게 대응하느냐’라는 각오로 마주해야 한다.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이 올 때까지 자신을 꺾어 기다리는 법을 안다면 이미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세상사의 이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현상이 맞춰주길 바라지 말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어 가야 자신이 상하지 않는 법이다.
인생은 조바심보다 훨씬 길다. 또한 시장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반복으로 세운 당신만의 원칙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으므로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장에서의 우리의 선택도 이와 같다. 똑같은 상황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우리는 어떤 결정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결코 증명할 수 없다. 그저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는 것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만이 언제나 동등한 무게로 우리 곁에 머물 뿐이다.
쿤데라는 말했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보다 가벼운 것이다.” 시장에서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 또한, 알고 보면 이토록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 가벼움을 인정할 때 집착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선택과 책임의 무게는 같아야 한다. 그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내공만 있다면, 시장은 즐거운 놀이터가 될 것이다. 매번의 선택을 먼지처럼 가벼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진중한 평온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