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극복해야 오늘이 찬란하다.

by 황금지기


집중의 한가운데서 순간순간 스치는 생각들을 씹어먹는 재미, 그것은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이다. 살을 에듯 차가운 겨울바람은 겨울을 더욱 춥게 느끼게 했지만, 바람이 잠잠해진 겨울의 한가운데서 문득 봄을 만났다. 오늘 하루도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잘 익어가자고 다짐해 본다. 마음이 평온하니 차가운 시장조차 마치 따스한 봄날 같다.


시장의 파동 또한 이와 같다. 억지로 이기려 들지 않고 보이는 현상대로 만끽하며 그 변화 자체를 즐기면 그뿐이다. ‘보람을 캐러 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파동은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그저 등락을 거듭할 뿐이다.


미래를 극복하지 않으면 오늘은 결코 찬란할 수 없다. 인간의 나쁜 버릇은 행복을 자꾸만 미래로 미루는 것이다. “다음에는, 내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오늘을 오늘로 살지 못한다.




“나는 물에다 배를 대고 있는 갈매기의 상쾌한 기분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옳거니, 바로 저것이지. 절대의 율동을 찾아 절대의 신뢰를 따르는 것이야.”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시장의 파도를 타지 못하는 이유는 손실을 과감히 자르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손실이라는 무거워지는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결코 시세의 리듬을 탈 방법이 없다. 아무리 완벽한 지점에서 진입했더라도, 그 이후 쉼 없이 그려지는 파동의 변화에 끝까지 순응해야 한다.


‘진입하고, 자르고, 챙기고, 갈아타는’ 이 일련의 과정을 물 흐르듯 반복하기 전에는 시장에 그 어떤 절대적 신뢰도 보낼 수 없다. 거친 바다 위에서도 안심하고 배를 대는 갈매기의 그 절대적인 신뢰처럼, 우리 또한 치열한 반복 훈련을 통해 파동 속에서 ‘절대의 율동’을 찾아내야 한다. 원칙으로 정한 선을 믿으며, 지려지는 파동의 물결에 온몸을 온전히 맡길 때 시장이라는 바다 위에서 갈매기가 될 수 있다.


손실을 자르는 것은 다음 리듬으로 갈아타기 위한 가벼운 날갯짓이다. 절대의 신뢰는 맹목적인 기도가 아니라, 원칙의 반복이 빚어낸 확신에서 온다.




“머리라는 게 장애물 달리기에 놓인 장애물밖에 안 돼요. 시장에서는 다들 제 다리가 꼬여서 넘어가거든요. 진입만 하면 다들 화가가 되더라고요. 어릴 적엔 그림도 못 그렸으면서 말이죠.” 오직 지지와 저항이라는 현상만을 믿고자 노력한다. 지금 그렇게 보이니까, 보이는 대로 대응해 보는 것뿐이다. 이곳 시장에서 제일 믿지 못할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선 상관없을지 몰라도, 매매에서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보는 것은 가장 나쁜 버릇이다. 가령 꼬마 아이가 창밖을 보고 “비가 와요!”라고 말하면, 밖에는 정말 비가 내리고 있다. 아이는 그 비를 보고 왜 내리는지 궁리하지 않고 그저 비를 즐긴다.


그런데 참 우습다. 눈앞에 비가 쏟아지는데도 현상은 보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엉뚱한 그림을 그린다. “제기랄, 비가 오네. 근데 곧 그칠 거야.”라고 혼자 지껄이며 제멋대로 판단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해석의 덫에 걸려 제 발에 넘어지는 것이다. 어쩌다 어른이 된 것이다.


머리가 만든 시나리오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장애물이다. 시장은 분석하는 곳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반응하는 놀이터여야 한다. 지지가 보이면 지지를 믿고, 저항이 보이면 저항에 순응하라.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것을 배워야지요. 그리고 현상은 변하니까, 어떻게 변하는지도 배워야지요. 근데 그다음부터는 마음을 다스리는 게 전부라고 봐야지요.” 아침에는 "오늘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며 몸을 추스르지만, 해가 지면 어느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게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이토록 통제하기 힘든 자신을 매일 마주하게 하는 곳, 그래서 시장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스승이다.


확률의 영역인 시장에서 지식의 양은 고수와 하수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아니다. 시세를 따라다니며 뇌동매매로 마음의 물결을 내버려 두는 자가 하수라면, 치고빠지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 결과와 상관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가 상수다. 지식을 넘어, 그 순응의 시간 속에 인생의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상수다.


결과가 어떠했든,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시장은 우리에게 ‘안다’라는 오만을 내려놓고 ‘흐른다’라는 순리를 따르는 법을 가르친다. 강물은 굽이칠지언정 결코 뒤로 흐르지 않듯,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길 때 바다에 닿는 상수의 길로 따를 것이다.




“복기와 반복이라네, 슬퍼 마시게. 과정 안에서 깨침이라네, 슬퍼 마시게.” 매일 마음속에 쌓이는 생각과 욕심의 먼지를 쉴 새 없이 털어내며, 오직 눈앞의 현상만을 직각(直角)으로 세워본다. 그렇게 정진하다 보면, 탐욕이 비집고 들어오던 틈새가 아주 조금씩 메워질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버텨내다 보면, 어느 날부터인가 무심한 파동이 차갑게 툭 던지는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는가, 여보시게. 정신 차리게. 맹렬한 반복을 통해 절대적인 율동을 찾아내고, 그 절대적인 믿음 위에 몸을 온전히 맡기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네.” 시장은 자신을 정복하려 드는 오만한 자에게 결코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현상을 직각으로 마주할 때, 시장은 절대적인 율동을 허락한다. 슬픔은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 집중해야 할 것은 실수에 대한 복기와 그것을 새기는 반복이다. 지나간 손실에 마음을 뺏겨 슬퍼하기보다, 왜 그 자리에서 원칙이 무너졌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 버리는 거요.‘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결국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투자의 결과를 결정한다. 위험 없는 수익은 존재하지 않으며, 손실 없는 성공 또한 없다. 손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신의 태도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다음 성공을 위한 값진 씨앗이 되기도 하고, 파멸의 뇌동으로 이끄는 악마가 되기도 한다. 투자는 반복으로 세운 원칙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며, 그 결과에 겸허히 고개를 숙일 수 있을 때 성공을 향한 첫발을 떼는 것이다.


성공을 향한 여정은 반복이라는 고통 속에 영글기 시작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의연함으로 여물어 간다. 시장이 꾸짖듯 말한다.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오랫동안 머릿속 저울로 현상을 해석하려 들었으니 그 꼴이지. 그 저울을 내려놓지 않는 한 평생 여물기는 틀렸네.”


생각이라는 머릿속 저울을 부숴버려라! 더 이상 따지며 현상과 싸우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 현상의 리듬에 따라 기쁘게 춤춰야 한다. 주관의 저울이 사라진 자리에 객관이 파동을 그려갈 때, 투자 행위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그 변화에 맞추는 일은 지독히도 불편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바뀐 상황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결국 가장 편안한 상태로 가는 길이다. 현상이 변할 때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싣는 것, 그것이 ’절대 율동’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절대적인 신뢰를 따라야 방황하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고, 진지한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된다.


진정으로 편안한 매매와 삶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시장이 흘러가는 현상에 당신을 온전히 맞추어야 한다. 거스르는 흐름에 화를 내거나 감정에 휘둘릴 필요는 전혀 없다. 사람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하듯, 시장의 현상 또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대응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현상에 저항하면 마음은 지옥 같은 불바다가 되지만, 현상을 존중하고 흐름에 순응하면 마음은 언제든 고요한 바다가 될 수 있다. 불바다와 고요한 바다 사이를 오가는 것은 시장의 등락이 아니라 그것에 반응하는 당신의 마음 때문이다.




성공의 씨앗은 인문학적 소양이 깊게 일군 ‘이타(利他)’의 토양 위에서 비로소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인문학의 깊은 울림을 모른 채 살아오며 확신하듯 지껄였던 편협한 신념들, 그리고 성공을 꿈꾸었던 그 초라하고 오만했던 과거들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직면했을 때, 차마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숫자의 나열에만 집착했던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통찰과 세상을 향한 이타심이라는 최소한의 무장도 없이, 거친 시장에 무방비로 뛰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만용이었던가! 그 근원적인 무지가 결국 끝없는 뇌동과 추격의 늪으로 밀어 넣었음을 뼈아프게 알아차렸다.


깨달음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다. 파동은 언제나 변할 것이고, 한바탕 스쳐 지나가면 그저 그것으로 그뿐이다. 태양과 달이 교차하며 자리를 바꾸듯, 시간은 그저 묵묵히 흐를 뿐이다. 시장의 현상 또한 다르지 않다. 상승과 하락이 자리를 바꾸고, 탐욕과 공포가 교차할 뿐이다. 우리는 그저 흐르는 강물을 보듯 현상을 관조하며 스쳐 지나가게 두면 그뿐이다.




무언가에 꽂히는 순간 현상은 왜곡된다. 딴생각에 잠기면 파동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이기에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그 집착을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제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파동도 결국 확률적 우위로만 존재할 뿐이기에, 그 결과가 어떠하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만이 성공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투자는 자신과의 심리 게임이다.


내면을 뒤흔드는 아쉬움과 후회를 이겨내고, 파동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 전에는 성공이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소리치는 게 들린다. “자네, 그놈의 머릿속 저울은 언제쯤 부서뜨릴 건가? 아무리 봐도 여물려면 한참 남았소!”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설렘과 동시에, 손실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움에 짓누른다.


운문 속의 희망을 극복해 나가면서, 산문의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복기는 아름다운 운문이지만, 실전은 치열한 산문이다. 절대적 율동을 꿈꾸는 것이 운문이라면, 절대적 신뢰로 발을 내딛는 것은 산문이다. 이 운문과 산문 사이의 끝없는 갈등이야말로 삶의 요체이자 투자의 본질이다. 이기와 탐욕으로 똘똘 뭉쳐 매번 똑같은 집착을 반복하는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약 150년 전 톨스토이가 묘사한 인간의 심리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내면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임에도 인간의 본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나약한 개인이 투자에 뛰어든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파동의 흐름을 크게 조망하기 전에는, 그 파동이 내 안에 온전히 그려지기 전에는 성공이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본성으로 원칙을 지켜갈 방법은 무엇인가? 원칙이라는 이름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나 지킬 수 있는 단순함으로 예외라는 여지를 줄어야 한다. 또한 그 원칙은 철저히 스스로 검증해 낸 것이어야만 한다. 운문의 세계에서나 존재할 법한 ‘불분명하고 희망으로 치장된 열정의 조각’ 같은 원칙은 실전에서 무용하다. 원칙은 명확해야 하며, 맹렬한 반복을 통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산문의 세계에서 꿋꿋이 존재할 수 있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희망으로 치장된 원칙은 실전에서 내팽개쳐진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냉정히 인정했다. 오늘의 굳은 다짐과 결심조차 실전이라는 산문(散文)의 세계로 넘어가면, 언제든 내팽개쳐질 수 있으며 순식간에 열정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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