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없는 확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80%라는 높은 확률이더라도, 그것은 열 번의 주사위를 던지는 지속적인 반복이 전제될 때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두 번의 시도 끝에 멈춰버린다면, 확률적 우위란 한낱 공허한 궤변에 불과하다. 확률적 사고를 하는 이는 동일한 변수가 놓인 자리를 기다릴 줄 알며, 그 자리에서 동일한 잣대로 대응한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주사위를 무한히 반복해서 던질 수 있는가—이 진지한 반복의 힘이 진짜 실력이다.
이 주사위는 루비콘강에서 던져지는 거창한 역사의 주사위가 아니다. 영원회귀라는 그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며, 매 순간 반복해서 던져지는 각자의 주사위를 의미한다. A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이면에 교집합을 포함하는 B라는 여백을 두는 것, 그것이 바로 확률을 다루는 필수조건이다. 확률이 높은 자리에서만 주사위를 던지되,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그것이 바로 확률적 사고다.
확률은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강박을 버려라. A라는 예측에 B라는 대응의 여백을 섞을 때, 매매는 단단한 확률의 성채가 된다. 승리는 여백을 둔 작은 반복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매수와 매도가 혼재하는 파동 속에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파동'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그 파동이 그려지는 대로 대응하는 것이 투자의 전부다. 우리는 영원회귀와 카레닌의 원이 상징하는 그 반복의 '무거움'을,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가벼움'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투자는 철저한 확률의 세계이며, 반복해야 한다는 무거움과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하는 가벼움이 편안하게 공존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대부분 투자자가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인 감정의 기복이라는 가벼움을 원칙이라는 무거움으로 붙잡아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거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부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공존이라는 불멸의 이미지를 구축한 소수의 몫이 된다. 원칙이라는 함수가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면, 누적 수익이 서서히 쌓이다 어느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돈의 특성이다.
투자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문명의 충돌과도 같다. 소수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의 가벼움을 희망이나 미래라는 막연한 착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의 기복은 극복의 대상 그 이상이다. 지독하게 복기와 반복을 거듭하는 이유는 이 가벼움을 잠재우기 위함이다.
아침의 나와 저녁의 내가 다르고, 가만히 앉아 복기하는 나와 실전의 칼날 위에 선 내가 다르다. 포지션의 유무에 따라 눈은 흐려지고, 손실과 수익의 갈림길에서 마음은 너무나도 다르다. 투자의 성취란 이 지독한 ‘똥 밭’ 같은 실전에서 주관이 하나씩 해체되는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성냄과 탐욕이라는 껍질을 하나씩 벗어버리고, 그 비참한 바닥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복기와 실전의 결정적 차이는 돈과 심리, 그리고 시간에 있다. 복기라는 ‘운문의 세계’는 기다림의 고통이 생략되어 있지만, 실전이라는 ‘산문의 세계’는 마치 갈 것처럼 붙이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현상의 연속이다. 그 지저분한 산문에서는 파동이 완성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실전의 고통 속에서 주관은 해체된다. 카레닌처럼 매일 똑같은 원을 도는 지루한 꾸준함, 그러나 그 미련해 보이는 반복이 누적되어 발휘하는 힘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복기할 때의 평온함이 실전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은 실전이라는 산문의 세계가 원래 그렇게 인간을 흔들고 무너뜨리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케타를 생각할 때 내가 중학생 아이처럼 마음이 설레었다고 말했는데, 그 감정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유래했다기보다 내가 서툴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그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러 마르케타 자체보다도 훨씬 더 내 감각과 생각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란 쿤데라, 농담>
시장에서 겪었던 그 지독한 긴장과 설렘은 사실 파동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률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무아의 문 앞에서 서성였던 자의 비겁함이었다. 손에 익지 않은 연주자가 손가락의 움직임에 급급해 집중하지 못하듯, 파동이 심리에 온전히 녹아들지 않았기에 현상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 흐름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지독한 복기와 반복, 그리고 인문학적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대가는 참혹한 결과로 증명될 뿐이었다. 성급했던 것은 실력이 서툴렀기 때문이고, 초조했던 것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서둘렀던 것은 무지와 미숙함이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반복만이 확률적 사고를 낳고, 그 숙달된 반복만이 다시 흔들림 없는 반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심리가 단단해져야 대상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감정에 휘둘리는 초보자의 떨림을 버리고, 반복 수련을 통해 얻은 정교한 자신감만이 자유로운 연주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자신감은 숱한 복기가 만들어 낸 고요한 확신 안에 존재한다.
한 제국이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제국이 무너져야만 한다. 확률의 세계에서 우뚝 서고자 한다면, 주관이 꿈꾸어 온 ‘판타지의 세계’를 완전한 폐허로 만들어야 한다. 내 안의 낡은 신념과 아집이 무너진 자리에만 원칙의 깃발을 꽂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망각의 강으로 흐를 것이다. 그것들은 오직 불멸의 이미지가 될 극히 미약한 확률만을 남긴 채 사라져야 마땅하다. 이미 행한 것들을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소중한 현재의 일상을 스스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내일의 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가며 뼈저리게 배우게 된다.
삶의 거대한 흐름은 대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하루하루 주어지는 흐름에 기꺼이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일상뿐이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망각의 강에 던져질 때, 찬란하게 빛나는 오늘이라는 보물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나처럼 노련한 민속 전문가는 앞으로 진행될 일들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미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래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계속 반복될 뿐이라고도 했다."
<밀란 쿤데라, 농담>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은 신통력이나 예지력이 아니라, 과거의 무수한 파동 속에서 검증된 ‘반복의 리듬’을 세포 하나하나에 체득시켰다는 뜻이다. 과정에서의 끊임없는 복기와 지독한 수련만이 실전에서 흔들림 없는 반복을 가능케 한다. 평정심은 돈이 되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원칙 하나로 버텨내며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시장의 주변을 맴돌며 방황했다. 원칙으로 정한 선이 보여주는 그 경이로운 몸짓을 마치 여체의 신비로움을 훔쳐보듯 갈구하며 바라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반복의 축제’에 섞이지 못하는 고독한 이방인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따르지 않는 괴리 속에서 그는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긴 방황의 끝에서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때가 되면 미래는 그저 약속된 율동에 따라 반복될 뿐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미래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이 진리를 체득할 때 성급함에서 벗어나 원칙의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미래를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신통력이 아니라, 반복의 리듬을 체득했다는 뜻이다. 미래가 이미 일어난 사건의 반복임을 믿을 때, 투자자는 성급함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그대는 자신이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 선택에 반하여, 생각과 욕망에 반하여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바로 거기에 그대의 길이 있는 것, 그곳이 바로 내가 그대를 부르는 곳, 그대가 나를 따라야 하는 곳, 그대의 주님이 지나가신 곳이니.” 루터는 이렇게 썼다.
<밀란 쿤데라, 농담>
수백 년 전 루터가 남긴 이 문장은 어쩌면 투자의 본질을 이토록 절묘하게 꿰뚫고 있는가. 나를 지배하려는 주관적인 생각과 탐욕스러운 욕망을 거슬러, 눈앞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 여백의 미학 안에 가야 할 유일한 길이 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보여주었듯, 인간은 그저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는 하찮은 존재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초점을 예측이 아닌 욕심의 극복에 맞추는 것이다. 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시장이 보여주는 몸짓에 나를 온전히 바쳐야 한다. 위대한 성현들의 통찰 앞에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이며, 욕심을 내려놓으면서 시장의 부름에 응답한다.
투자는 “나에게 일어나는 파동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의 문제다. 내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시장의 흐름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가장 강인한 자기 극복의 증거다.
시장이라는 녀석의 배가 부르기 전, 초기 진입점에서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일단 녀석의 배가 부르면 그 뒤뚱거리는 행보를 설거지하거나, 배부른 자의 태만에 조바심을 내며 따라다니다 결국 주저앉게 된다. 시세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녀석의 동그란 배가 꺼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부른 배의 여유는 시장이 선수를 쥐었음을 의미한다. 주도권을 빼앗긴 채 시장을 뒤쫓는 자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작은 돌에 생사가 오가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 보통은 배부른 자의 자비가 쉬울 것이라 착각하지만, 자기 배가 부르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차라리 하얗고 노란 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막 피어오르며 파동의 시작할 때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소수는 정확히 꿰뚫고 있다.
조바심은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바람이 불면 체감기온이 내려가듯, 나이가 들면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빨라진다. 세월이 야속해 조바심이라는 깃털 같은 가벼움을 더하게 되면, 삶은 더 가벼워지고 시간은 더 가혹하게 빠르게 느껴질 뿐이다.
손실을 확정 짓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투자자는 이 지독한 굴레 안에서 고통받는다. 내 것은 단 한 뼘도 내놓기 싫고, 남의 것은 한 치라도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인간의 이중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이다. 본능을 극복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일과 같기에, 평범한 노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난제다.
그대들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단지 우연의 일치로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고 잔인하게 드러나는 시장이라는 무대를 삶의 터전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본성 위에 탐욕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정작 손실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해지도록 인간을 설계한 신의 잘못이 더 크지 않겠는가? 본능에 충실했던 대가로 잃었다면, 그것은 지극히 인간답다는 증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손실을 거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럼에도 이 비정한 시장에서 살아남아 소수의 승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제는 그 본성의 쇠사슬을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손절의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인간 너머의 길은 시작된다.
곳간이 비게 되면, 투자자에게는 더 이상 방책이 남지 않는다. 심리는 갈대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선순환 구조를 그리던 원의 시곗바늘은 벼랑 끝에 위태롭게 걸리게 된다. 그때의 기다림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며, 대응한다는 것, 희망을 접고 내일을 기약하며 손실을 확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심리 상태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곳간은 곧 자신감과 긍정적인 심리의 원천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잃지 않아야 다음 수가 여유롭고, 곳간이 차 있어야 그나마 기다림의 미학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투자자는 항상 수익보다는 ‘잃지 않는 것’에 모든 방점을 찍어야 한다. 누적 수익이 쌓이기 시작하는 그 자그마한 곳간은, 훗날 거대한 강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기원인 ‘옹달샘’이 된다. 이 작은 옹달샘은 내면에 자신감과 긍정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영원한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곳간은 원칙을 지키는 요새다. 큰 수익에 눈멀어 곳간의 밑바닥을 드러내지 마라. 작은 수익이라도 차곡차곡 쌓여갈 때 심리는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여유로움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