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은 노예의 길이다.

by 황금지기


밤하늘의 달이 그 크기만 매일 달리할 뿐 늘 제자리를 지키며 반복되듯, 우리의 삶이라는 시계도 그와 같다. 삶은 때로 우연한 일들로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며, 그 우연의 일치들이 모여 운명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가 겪는 환희와 공포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기복일 뿐이다. 투자의 세계 또한 이 거대한 자연의 섭리처럼 늘 반복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그 축제를 즐길 자격이 있느냐는 점이다.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아주 가까운 곳, 즉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순리에 순응하며 따랐던 그 마을에 정착할 자격 말이다. 바둑에서 선수를 빼앗기면 꼬이고 힘들어지듯, 투자자 역시 시장의 뒤를 따라다녀서는 결코 반복의 축제를 즐길 수 없다.


원칙은 주인의 길이고, 추격은 노예의 길이다. 시장이 붙이는 결정적인 자리에서 원칙으로 선수를 쳐서 시세를 젖혀야 한다. 최소한 탐욕에 눈멀어 뒤늦게 따라가는 어리석음만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이 순간의 환희도, 전율도, 가슴을 저미는 슬픔과 시련조차도 결국 몇 장의 불멸의 이미지만을 남긴 채 망각의 강으로 흘러갈 뿐이다. 인생이란 이토록이나 가볍다. 이리도 가벼운 생에 성급함과 초조함, 그리고 서두름이라는 깃털 같은 가벼움마저 더해졌으니, 투자의 결과가 낙제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라는 필연적 가벼움에 원칙이라는 진중함을 더하지 못한 채 끝을 향해 가기에는, 살아감이 너무도 허무하지 않은가! 언제나 본능의 가벼움에 이끌려 갈대처럼 방황하던 삶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원리원칙과 반복이라는 묵직한 무게추를 달고 단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그 길을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흔들리는 생의 중심을 잡는 것은 오직 스스로 부여한 규율뿐이다.


원칙은 투자자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유일한 닻이다. 기분에 휩쓸리는 것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 흩어질 뿐이다. 지루한 반복과 엄격한 원칙이라는 무거움을 선택할 때, 투자는 예술이 된다.




어느 투자 고수의 말에 깊이 동의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딱 3분만 대화해 보면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라는 말. 숱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공건물의 출입문, 찬 공기가 여전히 매서운 날에 통과하는 이들을 관찰해 보라. 자신이 지나온 문을 다시 돌아보며 닫아주는 사람과, 앞만 보고 매정하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 짧은 찰나의 행위 속에는 그 사람의 이타심과 이기심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서도 발끝으로 간신히 문을 밀어 닫는 한 여인의 배려심은 의도된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빚은 몸에 밴 습관이다. 투자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시장의 파동을 배려하는 마음, 원칙이라는 문을 매 순간 정중히 여닫는 그 성실함은 이타심과 궤를 같이하는 습관의 문제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자가 시장에서도 승자가 된다. 이기심에 눈먼 이는 이익에 눈이 멀어 뒤를 돌아보지 못하지만, 이타심이 몸에 밴 투자자는 시장의 흐름을 살피며 자신의 원칙을 고요히 지켜간다.




낯선 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면 우리는 부자연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다. 대화는 겉돌게 되고, 문장 사이사이는 어색한 침묵으로 자주 막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가 더해지고 ‘자주’라는 시간이 쌓이면, 긴장은 어느새 편안함으로 바뀌고 말도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매매 역시 이처럼 시장과 익숙해지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시간 속의 자주’는 인간을 필연적으로 익숙함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세월의 강물이 무심하게 흐르는 동안 우리 손안에 움켜쥐었던 모래알 같은 귀한 시간은 조금씩 빠져나가겠지만, 그 사라짐을 대가로 얻은 ‘자주’의 경험은 무언가를 온전히 이루기 위한 신성한 비용이다. 투자의 성취는 시장과 대면하는 일상이 지루함이 아닌 편안함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익숙함은 시간의 누적이 주는 선물이다. 시간이 새겨놓은 '자주'의 흔적을 믿어라. 낯선 외국어가 아닌 친숙한 모국어로 들릴 때까지, 시장과 더 자주 대면해야 한다.




한 사람의 단점이나 찰나의 말실수에 집착하지 않고, 여백을 두고 전체를 보고자 노력하는 이에게서는 자연스레 현자의 기품이 묻어난다. 투자 또한 이와 결을 같이 한다. 눈앞의 일시적인 손실을 실패가 아닌 ‘필요한 여백’으로 인정하고, 시장의 거대한 흐름을 고요히 관조할 수 있을 때, 투자자의 영혼에는 비로소 상수의 향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시장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겸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시장에서 버텨내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다. 시장의 순리에 순응하다 보면 베인 상처—그것이 손절이든 일시적 손실이든—는 금세 아물어 심장에 단단한 굳은살을 보탤 것이다. 그러니 결코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상처는 다음 진입점의 확률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당신이 디디고 설 땅이 더욱 견고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손실은 진입점의 확률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알리는 신호다. 투자의 과정에서 겪는 숱한 시련들은 삶의 필연인 타인의 비웃음이나 자신의 내면적 약점을 견뎌낼 단단한 내면의 근육을 키워준다. 여백이 있어야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듯, 적절한 손실의 자리가 있어야 수익의 선명함이 돋보이는 법이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의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시장 참여자들이 쏟아 내는 에너지의 총합은 결국 파동이라는 형태로 번역된다. 도화지 같은 차트 위에서 시장이 그리는 이 파동이야말로 주목해야 할 유일한 실체다. 앞고점과 앞저점을 이정표 삼아 파동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현란한 기법을 들이대도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점과 선이 파동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원칙으로 정한 그 선의 몸짓 안에서 ‘터지기 전의 생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안나의 미소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였듯, 파동이 응축되어 폭발하기 직전의 그 팽팽한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파동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단순히 가격의 숫자를 쫓는 자는 파동이 숨기고 있는 그 ‘날갯짓’을 보지 못한다. 파동의 궤적 안에서 그 생기를 목격해야 시장과 호흡하며 생기발랄한 매매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




삶이란 그저 오늘이라는 하루를 선물처럼 건네주는 고마운 것이지만, 이에 익숙해진 인간은 시장에서도 수익이 거저 오기를 바란다. 가장 편안하면서도 본능적인 수단인 기도를 통해 수익을 갈구한다. 그러나 삶에서조차 기도로 이룰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상기할 때, 시장에서 기적을 바라는 기도는 중독자의 가여운 몸짓에 불과하다.


시장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곳이다. 그저 살아오며 덕지덕지 붙은 주관과 욕망을 남김없이 비워낸 뒤에야, 수익은 '선물처럼 찾아온 오늘'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머문다. 무엇보다 '잃지 않아야 한다'라는 명제와 '곳간이 차 있어야 다음 수가 있다'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언제 꺼질지 모를 연약한 지반을 벗어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대지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간절한 기도는 원칙이 그만큼 불완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요행을 바라는 가벼운 마음을 비워라. 단단한 땅 위에 서서 맞이하는 오늘은 더 이상 불안한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이 가져다준 당연한 하루가 될 것이다.




멋있게 보이고 싶고,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열망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아갈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이제는 헛된 은유로 자신을 치장하지 말고, 오직 행동으로 자신을 도와야 함을 말이다. 사랑도, 미움도, 성냄도, 탐욕도 결국은 다 부질없는 감정의 파편일 뿐이다. 그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존재 자체에 감사해야 할 대상임을 조금씩 알아가듯, 말없이 흐르는 물처럼 살라는 그 삶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체득해 간다.


만약 생이 다할 때까지 이 소중한 깨달음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면, 그 삶이 비록 겉으로는 편안했을지언정 얼마나 무의미했겠는가! 이것은 단순한 매매의 기술을 넘어선 인간 본질의 문제다. 그러니 지나온 투자의 실패나 삶의 굴곡에 대해 어느 하나도 슬퍼하지 말라.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일 뿐이다.


투자도 이 세상사가 그러하듯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으며 흘러가는 것이다. 봄은 오고 있다.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앙상한 가지로 묵묵히 미소 짓고 있는 나무들과 함께 봄은 파동이 등락하듯 오고 있다. 까만 구름도 햇살을 그 안에 품고 있고, 따사로운 햇살 또한 하얀 구름 사이로 비쳐 내린다.




파동은 언제나 박스를 접으면서 나아간다. 시세 분출 이후 횡보나 조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파동(波動)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물결 파(波)에 움직일 동(動)이다. 즉, 시세는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는 의미다.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보면서 유리한 방향으로 대응하라”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고점과 앞저점을 기준으로 파동을 그려내고 그 지지와 저항의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훌륭한 투자자는 파동이라는 단순한 밑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매매할 수 있어야 한다. 확률을 다룰 때는 단순할수록 결과는 유리해지고, 원칙을 반복할 가능성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손실의 고통이 일정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의 자제력은 여지없이 폭발한다. 그 고통의 극점을 터치하는 손실이 잦아지면, 투자자는 이성을 잃고 다시 ‘판타지의 세계(뇌동)’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투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의 범주 안에서 흐름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응의 영역이다. ‘훅’하고 떨어지거나 ‘휙’하고 치솟는 예측 불허의 급변동 순간을 제외한다면, 시장의 흐름이 변할 때 그 결을 따라 묵묵히 보조를 맞추는 것이 투자 행위의 진정한 본질이다. 거창한 해석을 버리고 단순한 선의 몸짓에 온몸을 맡겨야 매매도 단순해질 수 있다.


단순함은 이성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시세는 곡선으로 흐른다. 손실을 짧게 잘라 감정의 폭발을 원천 봉쇄하고, 단순한 파동의 길목을 고요히 지켜야 한다.




인간은 성급한 동물이기에 기다리지 못하고, 희망을 품는 동물이기에 단칼로 끊어내지 못한다. 투자를 이 성급함과 막연한 미래를 극복해 나가는 ‘인생 수업’이라 여긴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먼저 생각이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으며, 존재 자체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깨달아야 한다. 자기감정의 엉키지만 않는다면 그 필연적 가벼움은 곧 자유로움이 된다. 투자자는 매일 그 시험대 위에 서 있는 존재다.


가령 하방이 유리한 파동에서 매도 포지션을 잡았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나, 상방이 유리할 때는 미련 없이 수익을 챙기고 나와야 한다. 챙기고 나서 다시 유리한 매도 영역으로 올라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 이 기다림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추세가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는 반등 시 저항받는 자리에서 ‘진입과 청산’을 반복하며 순응해야 한다. 상방이 유리한 파동에서는 언제든 지지를 받으며 치고 올라갈 수 있음을 인정하라. 그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말이다.


추세에 순응한다는 것은 고집을 추세에 던져버리는 일이다. 파동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지지나 저항의 마디마다 수익을 확정 짓는 유연함을 가져라. 다시 진입할 수 있는 자리까지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가벼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중함이다.

이전 16화확률은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