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 이게 무아지경이다.

by 황금지기


“이토록 끔찍한(동시에 동정적이기도 한) 경고를 들은 마음은 약점, 천박함, 나태 그리고 헛된 희망을 극복하고, 전력을 기울여 영원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매달리는 법이다. 이어서 선인들의 무서운 선례가 마음에 떠오르면, 자신은 길 잃은 영원, 자신의 사랑은 하찮은 쾌락과 고통과 헛소리로 낭비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러면 부끄러워하면서 혀를 깨무는 법이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많은 투자자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선인들의 뼈아픈 교훈을 뻔히 알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인간의 본성이라는 비겁한 핑계 뒤에 숨으려는 것인가, 혹은 다수의 실패를 보며 안도하는 천박한 위안 때문인가? 타인의 삶은 나의 세계와 섞일 수 없으며, 내가 무너지면 우주도 끝장나는 것이다. 끝내 실패하는 진짜 이유는,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짐승처럼 환희를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서 이 생명의 기적에 경탄했다.” 조르바가 온몸으로 웅변하듯, 지금 변하는 파동의 흐름 그 자체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진실이다. 근거 없는 희망에 기대어 지표를 해석하는 오만을 버리고, 오직 눈앞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다. 파동(波動)이란 시장의 물결(波) 위에서 심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動) 생생한 현장이다.


헛된 희망은 원칙의 적이다. 복잡한 좌뇌의 해석과 판단, 고집스러운 신념의 장벽 너머로 물이 흐르듯 무심하게 “그냥 해(Just do it)!”라고 외치며 진입하고 청산하는 것—그것이 투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미학,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다.




절대의 율동을 찾아 절대 신뢰도 배를 대고 앉은 갈매기의 그 상쾌한 기분을 아는가. 흐름과 하나 된 상수에게 파동은 더 이상 심리를 흔드는 위협이 아니라, 마땅히 일어나야 할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흐름을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곳, 태생적인 인간의 가벼움을 처절하게 극복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브론스키가 첫눈에 반한 안나의 얼굴에 돌던 그 생기가 필연이었듯, 이 흔들림에 박자를 맞추는 것은 투자자의 숙명이다.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헛된 희망을 극복하고, 오직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던져야 한다. 인간은 희망 때문에 흔들리고, 맞추려는 오만 때문에 고통받는다. 희망 저 너머에서 흐름은 그저 무심한 흐름일 뿐이다.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을 환상과 집착의 도구로, 혹은 기도의 제물로 삼는 그 가벼움을 끊어내지 않고서 어찌 방법을 논하겠는가.


브론스키가 안나의 얼굴에서 발견한 생기의 은유에서 사랑이 시작되었듯, 투자자는 시장을 상대로 함부로 은유를 부려서는 안 된다. 가벼운 존재인 인간이 감히 시장을 맞추려 들면 그 거대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심리가 먼저 무너지게 된다.


생각은 시장을 은유한다. 시세를 맞추려는 욕심과 돈에 대한 집착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자유롭게 날던 새는 스스로 새장에 갇히고 만다. 원칙이라는 닻을 내리고 흐름의 율동 속으로 기꺼이 침잠해야 한다.




포커를 쳐 본 사람은 안다. 판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카드라는 외부 변수가 찾아와야 한다는 것을. 만약 운의 흐름이 받쳐주지 않는 날이라면, 그날의 최선은 오직 하나, 적게 잃는 것뿐이다. 파동의 세계에서도 원칙에 부합하는 파동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수익을 내기란 힘든 법이다.


여기서 핵심은 ‘좋은 카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 변수이지만, 나쁜 카드에서 적게 잃으며 기회를 기다리는 마음은 내부 변수라는 점이다. 결국 이 내부 변수인 투자 심리가 승패를 결정짓는다. 한 번에 크게 잃지 않아야 게임에 지속해서 참여할 수 있고, 살아남아 있어야만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큰돈은 ‘베팅의 기술’에서 결정된다. 상수는 높은 확률의 길목에서는 과감하게 베팅하며, 낮은 확률의 안개 속에서는 베팅을 거두어 몸을 사린다. 이 기술을 체득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퇴출당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이 바로 상수가 원칙을 목숨처럼 고수하는 이유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필요하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환희도 깊은 실망도 거두어들여야 한다. 성급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 순간의 흐름을 온전히 즐길 줄 알아야 하며, 헛된 희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오직 눈앞의 파동에 순응하며 맞춰가야 한다. 평범한 인간이 두려움, 허무, 성급함, 그리고 희망이라는 이 거대한 본성들을 모두 극복해 내야 하니, 투자는 실로 요물 중의 요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결국 끊임없는 극복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극복을 시도하는 매 순간이 삶에 의미를 더해주는 법이다. 시장의 흐름에 맞추려 애쓰는 그 진지한 몸짓이야말로, 진짜 자신을 만나는 성스러운 과정이다.


투자는 나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이겨내는 곳이다. 요물 같은 감정들이 흔들 때마다, 그것을 삶의 의미를 채울 기회로 여겨야 한다. 원칙이라는 무게를 통해 대지처럼 단단해질 때, 시장이라는 요물을 다스리는 진짜 주인이 될 것이다.




감정이 엉키기 시작하면 그 어떤 기법도, 지식도 소용이 없다. 흐름 앞에 서서 단칼에 잘려 나갔어야 할 감정들이 질척이며 발목을 잡는 순간,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자, 보시게. 그 정도면 되었네. 이제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단칼로 베어 버리는 진정한 칼잡이가 되시게. 두 눈 부릅뜨고 오직 시장의 흐름대로, 결대로만 칼을 휘두르시게.”


“일단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면 무조건 자르시게. 단 한 번만 멈칫해도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상념의 파도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 말일세. 한 번의 망설임이 곧 패배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단칼로 베다 보면 무엇이 되어도 될 걸세. 오직 발걸음만 엉키지 않는다면 말이지. 우리에게 선택지가 따로 있는가! 칼잡이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평정심뿐이라네. 흔들리는 가격에, 빨강과 파랑의 손익 숫자에, 그리고 내면의 온갖 상념에 흔들리지 마시게. 엉키면 그날로 끝일세.


멈칫하는 순간, 시장의 칼날이 당신을 겨눈다. 투자는 머리로 하는 분석이 아니라, 훈련된 감각이 행하는 단호한 결단이다. 손실을 마주했을 때 ‘조금만 더’라는 상념이 고개를 들기 전, 이미 칼은 휘둘러져 있어야 한다.



“감정에 충실한, 그저 평범하고 순진한 사람이 투자자가 되었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자명한 일이지.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네.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이제는 부질없는 생각의 문을 굳게 닫으시게. 문을 닫아야 비로소 진정한 통찰의 문이 열리는 법일세.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영혼의 상쾌함을 맛보게 될 걸세.”


“자네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샘솟고 연이어 돋아나는 상념들은 모두 잡초라고 생각하시게. 인간은 그 쓸데없는 생각의 잡초들에 치이다 늙고 병들어 가는 존재일 뿐이라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개의치 말고, 원칙에 어긋난다 싶으면 즉시 잘라 버리게. 지금 자네가 걷고 있는 이 매매의 길은, 어쩌면 자네의 삶에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네.”


생각의 문을 닫아야 통찰의 문이 열린다. 흐름 앞에서 괴로운 진짜 이유는 시장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생각의 잡초들이 너무나 무성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미련과 ‘어쩌면’이라는 헛된 희망은 모두 원칙의 대지를 망치는 베어내야 할 잡초들이다. 이 잡초들을 방치하면 시야는 흐려지고 결국 본능의 늪에 빠지게 된다.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든, 상황이 더 나빠지든 결코 결과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투자의 실력이란 오직 조건 없는 원칙의 반복을 양분 삼아 쌓아 올려지는 법이다. 그저 잘 되기만을 기도하며 머물러 있다면 시간만 흐를 뿐, 당신에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투자는 절대적으로 인간의 본성 너머로 건너가기 위한 고독한 모험이어야 한다. 때로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그 경계를 건너가야만 비로소 본질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기존의 익숙함과 편안함이라는 낡은 집—설령 그 집이 아무리 고급스럽고 화려할지라도—그곳에 머무는 한 지독한 습관과 인간 본성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끊임없이 깨지고, 깨치며 현상과 부딪치는 열정이 넘치고도 남아야 한다. 인생은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알을 깨뜨려 나가는 연속된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멈추고, 행동으로 건너가라. 익숙한 실패보다 낯선 원칙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믿고 알을 깨는 고통을 기꺼이 수용해야만 '사고파는 기술'을 넘어 '삶의 예술'로 거듭날 것이다.




진입과 동시에 손실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세가 분출된 중간 진입일 가능성이 크다. 파동이 이미 진행 중인 애매한 자리에서 ‘눌림 주겠지, 반등하겠지’라는 생각을 개입하면서 매매는 흐름을 비껴가기 시작한다. 오직 확률에 기반하여 기계적으로 진입해야만 한다. 시장이 오르면 수익이고, 내리면 손실이다. 이 단순한 진리 앞에 감정이 설 자리는 없다.


손실이 나면 다시 기다려 다음 진입점을 찾고, 방향이 바뀌면 바뀐 흐름을 따라 다시 자리를 기다리면 된다. 지지받는 자리를 보여주면 진입하고, 자리를 놓쳤다면 미련 없이 보내 주는 그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무엇인가. 시장이 자리를 보여주면 행하고, 손실이면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보여주지 않고 가버리면 내 것이 아니라 여기며 인사를 건네면 그뿐이다.


매매는 예측이 기다림과 대응의 반복이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진입점은 흐릿해지고 손가락만 우왕좌왕한다. 추격의 유혹을 이겨내고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성장의 증거다.




시세의 추격하는 폭만큼, 확률적 우위와 대응의 여지를 스스로 갉아먹게 된다. 시장은 참으로 영악하여, 손실을 확정 짓고 자르면 보란 듯이 반등하며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든다. 반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을 때는 시세가 폭발하는 장면을 끝없이 보여주며 인내를 조롱한다. 시각적 자극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 원칙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도록 유도하는 것, 그것이 시장이다.


안타깝게도 다수의 투자자는 시장이 설계해 놓은 이 ‘필패의 늪지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곳에서 부질없이 ‘다짐과 어김’이라는 절망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 명심하라. 일단 내 눈에 확연히 보이고 나면 이미 늦은 것이다. 조급함에 추격하면 매매는 확률적 선순환이 아닌 단판 승부의 ‘일회성 게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추격이 이어지면, 공들여 쌓아온 확률적 선순환 구조는 붕괴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가서 얻는 수익은 재앙을 부르는 독이 된다. 시장이 파놓은 늪지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놓치면 내 것이 아니다’라는 매몰찬 외면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소설가의 형성 과정을 표본이 될 만한 이야기의 형태, 즉 ‘신화’의 형태로 상상해 보니, 이 과정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로 드러난다. 사울은 바울이 된다.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밀란 쿤데라, 커튼>


진정한 투자자는 좌뇌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투자자에게 있어 ‘주관’이란 신에게 바쳐야 할 제물과도 같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주관적 토템 사상을 버리고, 철저한 객관화로 개종을 요구받는다. 이 개종은 생존을 위한 절대 조건이다. 하지만 시장은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그 누구도 이 개종을 강요하지 않으며, 다수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눈이 멀어 이 엄중한 요구를 외면한다.


이것은 기존의 사상을 완전히 버리는 생의 전환기와 같아야 한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만큼이나 극심한 내면의 투쟁이 필요하기에, 주관에서 객관으로 건너가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그 정도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올바른 투자 습관을 갖추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반복과 복기의 시간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주관을 죽이고 객관의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수행의 시간이어야 한다.


주관이 고개를 숙인 만큼 흐름이 보인다. 당신의 분석, 당신의 확신, 당신의 기대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 오히려 그 주관이야말로 당신의 계좌를 갉아먹는 가장 위험한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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