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자본과 정보가 결탁하여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거대한 돈의 흐름은 두터운 박스로 가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가벼워야 할 개인들을 흔들고 유혹한다. 그들의 전략은 명확하다. 개미의 심리를 무겁게 짓눌러 쪼그라들게 만든 뒤에야, 쉬운 파동을 만들어 수익을 독식하는 것이다. 심리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면, 아무리 안달복달하며 애를 써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거스를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투자는 지독한 심리 게임이다’라는 자명한 진리로 회귀하게 된다. 이미 지나가 버린 파동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으며, 미련을 쥐고 있을수록 오직 자신의 마음만 병들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토록 고통스러운 감정도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금방 흐릿해지고, 아무리 애써도 기억조차 하기 힘든 먼지가 되어버린다는 인생의 서글프지만 위대한 진리다.
시장은 불공평한 운동장이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기다려라. 그것이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후회나 아쉬움은 내일이면 먼지처럼 흩어질 감정의 파동일 뿐이다.
시시때때로 틀리고 변하며, 편향된 시선에 갇힌 인간이 감히 시장 앞에서 시시비비를 논해서는 안 된다. 잘하는 척, 잘난 척하며 애를 쓰고, 거짓된 가면을 쓴 채 억지로 시장을 끼워서 맞추려는 자는 결코 무아지경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세상사가 결국 파동이며, 마음먹기에 달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세상 이치에 순응(順應)이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나, 흐름을 거스르는 뇌동(雷同)이면 불통(不通)이자 소통은 끊기면서 손 쓸 도리도 없이 끝장나는 만사휴의(萬事休矣)에 이를 것이다. 결국 순응(順應)이 시장과 하나 되는 도통(道通)이자 흐름에 온전히 하나 되는 무아지경(無我地境)이다.
자신을 죽여야 파동이 산다.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말고, 파동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라. 뇌동이라는 불통의 늪에서 벗어나 순응이라는 도통의 길로 들어설 때, 매매는 흐름만 남는 경이로운 대응의 예술이 될 것이다.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마침내 손끝에 머문 힘까지 모두 빼라.” 비우지 못한 욕심과 섣부른 생각으로 자꾸만 시장에 집착하게 되는 마음의 힘을 빼야 한다. 집착이 강해질수록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동의 해석이 망가지는 까닭이다. 『장자』 ‘외편’에는 활쏘기 내기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보잘것없는 질그릇을 걸었을 때는 과녁을 맞히던 이들이, 값이 나가는 띠쇠를 걸자 명중률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황금을 거는 순간, 그들의 화살은 아예 과녁을 빗나가 허공을 가른다.
과녁은 그대로인데, 마음속에 황금이 들어온 순간 눈도 멀어버린 것이다. 지독한 심리의 늪지대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황금을 질그릇처럼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심리의 근육이 다져지는 시간이 절실하다. 투자자라면 마땅히 견뎌내야 할 필연적인 과정, 그것은 바로 욕심이라는 늪지대에서 발을 빼고, 내 안의 힘을 서서히 빼는 시간이다.
대충 쏴! 그래야 명중한다. 복잡해서가 아니라, 황금이라는 결과에 마음을 빼앗겨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잘 쏘려 애쓰지도, 억지로 맞추려 하지도 마라. 그저 대충 쏘듯, 마음의 힘을 빼고 황금을 흙으로 볼 수 있을 때, 화살은 비로소 파동을 꿰뚫게 될 것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돈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항상 인간이 돈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나의 생각이다. 돈에 집착할수록, 욕심을 낼수록, 그리하여 돈에 지배당하게 되는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의 참모습을 잃어버린 채 붕괴하고 마는 것이다.” 김진명의 소설 「카지노」에 나오는 이 문장은 투자의 본질을 관통한다. 돈을 쫓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지만, 돈을 다스리는 자는 비로소 시장의 주인이 된다.
눈앞의 수익을 탐하기보다 잃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곳간을 채우려 조급해하지만, 곳간이 비지 않아야 다음 수를 도모할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철저한 복기와 반복을 통해 직관과 자제력이 마침내 충동의 무덤 위에서 꽃을 피웠을 때, 그때 비로소 각자의 그릇만큼 돈을 담으면 된다. 요동치는 감정에서 일관성 있는 원칙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기까지,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은 모든 투자자가 견뎌내야 할 필연이다.
돈에 지배당하는 순간 투자는 붕괴한다. 돈에 지배당할 것인가, 돈을 지배할 것인가. 충동을 이겨낸 원칙의 뿌리가 깊어질 때 비로소 돈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시장은 거대한 자본이 오가는 장소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밑바닥까지 드러나는 치열한 심리 전쟁터다. 소설 「카지노」는 그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갑옷이 바로 ‘원칙’임을 일깨워 준다.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확률의 영역은 소멸하고, 오직 파멸을 부르는 감정의 도박만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원칙을 목숨처럼 사수하라. “그 말은 작은 승부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큰 승부에서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인생의 승부를 다루는 사람에게 그때그때의 결과는 아주 조그만 티끌일 뿐이다. 그 티끌을 이어주는 하나의 커다란 원칙, 그 원칙에 결손이 나서는 인생의 승부를 결코, 이겨낼 수 없는 법이다.”
승부의 끝자락까지 원칙의 끈을 놓지 마라. 처음부터 지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그놈의 욕심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다. 조금 이기면 긴장이 풀리고, 더 큰 수익을 향한 갈증은 끝없는 욕망의 심연에 하염없이 돌팔매질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그 통제하지 못한 욕심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간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내 안의 욕심이란 괴물과 싸우는 고결한 투쟁이다.
원칙이 허물어지면 심리가 무너진다. 본전을 수호하고 원칙을 예우하라. 그것이 당신을 시장의 먹잇감이 아닌, 승부의 지배자로 만들 것이다.
투자는 단순히 자산을 증식하는 기술이기 이전에, 인간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도박 본능을 다스리는 치열한 수양의 과정이다. 소설 「카지노」는 손실이 발생했을 때, 냉철했던 확률의 영역이 어떻게 처참한 도박의 늪으로 변질되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투자의 진정한 숙제는 지독한 자제력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지혜가 시장의 파동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고독한 일이다.
돈을 잃는 순간, 당신의 심리적 토대도 함께 무너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래 카지노 게임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너희가 100만 달러를 앞에 놓고 있긴 하지만 거기서 10만 달러만 빠져도 반반의 승부가 되고 만다. 즉 잃어버린 10만 달러를 찾아오느냐 아니면 가진 90만 달러를 다 잃느냐 하는 것의 확률은 정확하게 50%인 것이다.” 손실을 복구하려는 강박이 고개를 들면 이미 투자자가 아닌 도박꾼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결과보다 원칙을 사수하는 과정의 치밀함을 중시하라. 돈을 쟁취해 오는 과정이 진지하고 정교할수록 그 결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된다. 반면, 요행으로 얻은 쉬운 수익은 당신의 자제력을 갉아먹고 결국 더 큰 파멸을 부르는 미끼가 될 뿐이다. 본래 시장이란 인간의 패배를 전제로 설계된 곳이다. 그 숱한 패배의 지뢰밭 속에서 다치지 않고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려 곳이다.
손실을 복구하려는 마음이 확률을 도박으로 만든다. 내 안의 도박 본능을 어떻게 격리하고 처리하느냐—이것이야말로 투자자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인간이 죽을 때까지 풀어야 할 단 하나의 숙제다.
최배달 선생의 <333 정신>은 투자의 훈련 과정에서 뼈에 새길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어떤 기술이든 300번 연습하면 흉내를 낼 수 있고, 3,000번 연습하면 실전에 쓸 수 있는 정도가 되지만, 3만 번을 반복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투자자 역시 이토록 지독한 반복과 복기의 과정에 지치지 않아야 비로소 시장의 파동을 온몸으로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두려울 때는 상대도 마찬가지로 두렵다. 상대는 신이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시장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되, 동시에 “나는 싸우는 게 두렵다. 맞는 것도 두렵고, 지는 것이 두렵다. 싸우다가 죽는 것보다, 불구나 폐인으로 살아남을까 봐 더욱 두렵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내 안에서 바람처럼 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소리”라고 고백했던 솔직함을 기억해야 한다.
반복은 무기를 만들고, 겸손은 갑옷을 만든다. 3만 번의 복기가 당신의 손에 감각의 검을 쥐여준다면, 두려움을 인정하는 낮은 자세는 당신을 지켜주는 단단한 갑옷이다. 상수는 두려움이 없는 자가 아니라, 두려움을 알기에 원칙을 생명줄처럼 붙잡는 자다.
시장과 인간 마음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커서 원칙을 세우기는 쉬우나 이를 지켜내기는 지극히 어렵다. 성급함과 희망을 좇는 인간의 본성은 곧게 뻗은 '직선이지만, 자연계의 섭리를 따르는 시장의 파동은 사계절의 변화처럼 '곡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꽂히고 급하게 추격하는 인간의 본성은 단조로운 직선에 불과하여, 극복하지 않고서야 곡선이 지닌 유연함과 여유로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우리가 행하는 반복과 복기의 종착역은 바로 이 곡선의 유연함을 체득하는 데 있다. 파동을 직선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곡선의 파동 앞에서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수없이 맹세를 거듭해도 파동은 여전히 곡선인데, 인간의 본성은 직선의 욕망으로 꽂히고 추격한다. 파동이 곡선을 그린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필연의 과정이 바로 복기와 반복이다. 파동이 곡선임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느끼게 될수록 마음의 흔들림은 줄어들게 된다.
직선의 욕망을 버려야 곡선의 흐름이 보인다. 매매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시장의 굽이치는 리듬을 무시한 채 직선적인 욕심을 억지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유연함이야말로 진정한 상수의 무기다.
“여보게.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필요한 단어일세. 입에 올리지도 말게.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 아닌가. 이곳 시장에서의 실패는 자네가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아주 좋은 증거일 뿐이라네. 지극히 인간적인 면의 궁극을 찾아가는 그 치열한 과정, 그 안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시간 자체가 바로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네. 그러니 성급하게 굴지 말게. 부질없는 희망은 내려놓고, 지금 지나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찾으시게.”
“지금 깨지고, 또 그 안에서 깨치며 버티는 이 시간이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네. 혹시 아는가. 자네가 그토록 갈구했던 돈이라는 결과보다, 이 지독한 시간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훨씬 더 크고 고귀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지 말일세.”
버티는 자만이 도달하는 여유로운 내면이 시장이 주는 가장 큰 배당금이다. 포기를 고민하지 마라. 무너진 이유는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거대한 파동 앞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파동은 굽이치는 강물과 같은 유연한 곡선이기에, '나만 두고 갈까?' 안달복달하지만, 다시 데리러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시장은 인간의 눈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클릭하는 순간이 고점이 되고, '아차!' 싶을 때는 이미 파동이 꺾여 내려온다. 불안에 떨다 본전이나 손실로 털고 나오는 개미들의 심리를 시장은 꿰뚫고 있다. 파동은 이토록 연약한 개미들의 푼돈을 발판 삼아 도움닫기 하며 강한 시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파동을 그린다는 것은 정답이 정해진 객관식 문제를 푸는 일이 아니다. 매번 바뀌는 주관식 문제에 나만의 확률로 답을 적어 내려가는 과정이기에, 스스로 세운 원칙의 자리가 정답이 된다. 그러므로 머리의 똑똑함이 아니라, 꾸준함이 빚어낸 단단한 심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침묵(沈默)은 황금(黃金)이자 자신을 알아가는 지기(知己)다. 또한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다. 침묵할 줄 안다는 것은 사색할 줄 안다는 것이며, 사색은 기다림과 대응을 스스로 체득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새겨진 것처럼, 성급함의 극복은 '기다림'이었고 부질없는 희망의 극복은 '대응'이었다.
침묵하면 기다리는 힘이 생기고, 사색하면 대응하는 힘이 생긴다. 나만 두고 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할 때 침묵하라. 성급함을 버린 자리에 기다림을 채우고, 헛된 희망을 버린 자리에 대응을 채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