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은 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같다.

by 황금지기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은 얼어붙지 않는다. 투자자 또한 특정한 생각에 꽂히거나, 고집스럽게 버티거나, 조급하게 추격하며 자신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 오직 파동의 흐름을 따라 유연하게 흘러갈 때만 살아남을 수 있다. 마음속에 작고 큰 소용돌이가 칠 때마다 평상심이라는 중심을 잡아야만 비로소 관점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파산을 부르지 않을 적절한 레버리지를 유지하며 유연함을 잃지 않는다면, 꼼짝달싹 못 한 채 시장에 갇혀 얼어버리는 최악의 파국은 오지 않는다.


기업이 생산 차질을 막기 위해 기계 설비를 끊임없이 예방·유지·보수하듯, 투자자 역시 인생의 거대한 위기를 막기 위한 예방 활동이 필수적이다. 뇌동과 추격이라는 치명적인 고장을 방지하는 그 활동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체계적인 훈련을 거듭하며, 긍정적인 경험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이다. 작은 차이들이 누적되어 거대한 격차를 만들고, 가장 본질적인 원칙 하나가 삶 전체를 좌우하는 것이 인생사다.


꾸준함은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복리를 담보한다. 똑똑함은 열흘 붉은 꽃처럼 금세 시들기 마련이다. 똑똑한 이들은 머리를 믿다 얼어붙은 강물에 갇히곤 하겠지만, 꾸준한 이들은 흐름 자체를 믿기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다 보면 잘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때로는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맞추기도 하지만, 어처구니없이 틀리는 날도 오기 마련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뜨겁게 노력하다가도 나태함의 늪에 빠지기도 하고, 잘 참아내다가도 조급함에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기복은 그리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잘하는 것’보다 ‘열심히 하는 것’이며, 그보다 더 본질적인 가치는 ‘안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사고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몸이 건강하다는 사실, 그리고 주어진 현재를 묵묵히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잘 먹고, 잘 씹고, 잘 싸는 오늘이 가장 소중한 승리다. 원칙의 선을 지키며 계좌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것은, 곧 투자의 가장 기초적인 리듬을 수호하는 일이다.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정성껏 소화해 내어야만 오래가는 투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평온함은 생에 있어 최고의 목적이자 그 자체로 가장 거대한 수익이다. 흔들림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감정의 기복도 그렇다. 그저 다시 안전한 원칙의 자리로 돌아와 고요히 숨을 고르면 그뿐이다.




시장에서 마주하는 순간은 대부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 작은 기다림이 결국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고점과 저점을 이으며 파동을 그려 나가는 행위는 시장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투자자에게, 인간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내뱉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시세가 거칠게 내리꽂을 때 공포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내려올 때까지의 기다림으로 매수점을 찾아야 한다. 시세가 뜨겁게 솟구칠 때 흥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서 매도점을 찾아야 시장에서 죽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올라왔을 때 매도점을 보고, 내려왔을 때 매수점을 보라. 이 단순한 순리가 이익은 길게, 손실은 짧게 가져가는 여지의 마법을 부린다. 무엇보다 기다림은, 예상과 다를 때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대응의 여지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내리꽂으면 심연까지 추락할 것 같고, 솟구치면 태양까지 닿을 것 같지만 파동은 예외 없이 등락한다. 만약 등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파동이 아니며, 살아있는 시장도 아니다.


요동치는 바다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 파동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온몸의 힘을 뺄 때 몸이 수면 위로 떠 오르듯, 투자자 또한 시장의 등락에 자신의 리듬을 일치시켜야 침몰하지 않는다. 시세를 보내 주지 못하면 결국 평정심을 내주게 된다.




투자의 여정에서 항상 터무니없는 상황에 내던져질 수 있고, 명백한 불운과 마주하거나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이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평정심이다. 그러나 한 번의 생각 차이로 인한 후회와 실수가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시장에서,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식의 막연한 평정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지독하게 잔인한 이 시장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체득한 ‘경험적 통찰’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가벼운 평정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터무니없는 확신을 안전하게 덮어줄 단단한 통찰이 없다면, 투자자는 절망의 계곡에서 쳇바퀴만 돌게 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그 쳇바퀴를 멈추는 법은 명확하다. 진입 전부터 ‘근거 있는 손실’을 설정하는 것이다. 앞고점과 앞저점을 기준으로 손실이 짧은 좋은 자리를 확인하고, 원칙이 어긋날 때 짧게 자르며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근거가 없는 손절은 포기와 다를 바 없으며, 근거가 있는 손절만이 다음 자리를 향한 희망의 결단이 된다.


평정심은 마음이 아니라 근거가 만든다. 근거가 확실할 때 평정심은 무너지지 않는 요새가 되며, 짧은 손절은 다음 승부를 위한 희망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투자는 막연한 마음공부가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설계하는 이성적인 투쟁이다.




“실험 대상자들은 시시콜콜한 정확성을 중요시하고, 사건의 동시 발생과 연관을 혼동하며,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행동양식을 보였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많은 실험 대상자의 옹고집이었다. 이들은 한번 결정을 내리면 ‘될 대로 되어라.’라는 식으로 끝까지 밀고 나갔다. 상황이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차라리 계속 밀고 나가다가 상황이 극도로 나빠지면 냉소주의 같은 자기방어 전략으로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슈테판 클라인,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인간은 잘 듣고, 보고, 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오복(五福)과 이를 지탱하는 신체, 그리고 마음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불행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일상의 행복을 깨닫지 못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톨스토이가 “행복은 고만고만하고, 불행은 제각각이다”라고 말한 이유는, 지극히 평범한 안정을 너무나 쉽게 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의 파동 또한 그저 무작위로 오르내릴 뿐이다. 이 무작위성 속에서 얻은 단편적인 승리들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결국 투자의 여정은 ‘맞고 틀림’과 ‘좋고 나쁨’이 끝없이 교차하는 반복의 길이다. 이 무작위 우연에 대비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확신은 당신을 거대한 손실의 웅덩이에 가둘 것이며, 운이 좋은 뒤에 찾아오는 자만심은 또 다른 강력한 우연의 되치기로 파산에 이르게 할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 실수는 자산이 된다. 무작위의 우연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틀렸을 때 즉시 무릎을 꿇는 겸손이다.




"뇌는 끊임없이 틀과 설명을 찾는다. 이 과정 끝에 어떤 해석을 믿을지는 자유다. 가까운 사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경우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생명이 다한 것으로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전자의 시각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후자의 시각은 사람을 위로하게 한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시각에 달려 있다."

<슈테판 클라인,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깨달음이란 불확실함을 견뎌낸 지루한 시간에 대해 시장이 건네는 고귀한 보상이다. 투자의 성패 또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장은 우연으로 점철된 혼돈의 바다일지라도, 원칙의 선을 그냥 묵묵히 믿어보는 것—지극히 확률적인 게임일지라도 그 확률을 정직하게 신뢰하는 과정에서 통찰은 칼날처럼 예리해진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2차선 지방 도로를 달릴 때 중앙의 노란 실선을 믿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도로가 어떻게 휘어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그 선이 나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전진할 수 있듯이, 투자자 역시 원칙이라는 실선을 믿어야만 깨달음의 비탈길을 끝까지 오를 수 있다. 의미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사수하는 의지 속에서 탄생한다.


투자의 성패는 사건을 규정하는 시각에서 결정된다. 원칙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믿고 따를 때 원칙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던지는 무작위의 사건들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확률의 정직함을 믿을 때 통찰의 눈이 떠진다




해외선물이라는 잔인한 흔들림 속에서 투자 심리를 굳건하게 지켜줄 완벽한 성벽은 ‘증거금의 3배가 투자 원금’이라는 공식 즉 Lower Leverage다. 투자는 결국 심리 게임이며, 이 낮은 레버리지는 거친 파동 앞에서도 ‘여유롭고 덤덤한 심리’를 유지하게 돕는 강력한 방패가 된다. 시장에서는 상승과 하락 그리고 횡보, 즉 33%의 기대치를 가진다. 가령 다섯 가지 근거가 각각 80%라는 높은 확률을 가졌다고 낙관할지라도, 그 다섯이 동시에 적중할 확률은 수학적으로 고작 32.7%에 불과하다. 결국 3분의 1의 명중률을 안고 싸우는 셈이다.


슈테판 클라인의 「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에서 위에서 언급한 명제에 대한 훌륭한 두 가지 근거를 찾았다. 첫째는 기대치는 이윤에 확률을 곱한 값으로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10유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이때의 기대치는 5유로다. 8유로씩을 내기 돈으로 건다면 기대치보다 높은 판돈을 거는 행위로 통계적으로 반드시 파산에 이르는 손해 보는 게임이다. 내기 돈이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5유로의 이윤보다 3유로 초과하기 때문이다. 일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경우 확률만큼 가치 있는 정보는 없다.


둘째는 결정 요인이 많아질수록 복합 확률은 급격히 낮아지기에 상대의 반응이나 시장의 우연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폰 노이만의 게임 이론이 승리 그 자체보다 상대편의 결정에 상관없이, ‘최악의 상황에서 손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은 최악의 파국을 피하는 것이다. 횡보장에서 잃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 66%의 확률적 우위를 점하고, 낮은 레버리지의 우연에 상관없이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이것이 불확실성을 이기는 유일한 논리다.


낮은 레버리지는 자체로 시장에 대한 겸손이다. 무리한 베팅으로 단판 승부를 보려 하지 말고, 레버리지를 낮추는 대신 시간의 지평을 늘려야 한다.




시장이란 거대한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스스로의 동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렁이는 파도의 흐름에 따라 출렁일 뿐이다. 그런데도 투자자가 혼자서 마음대로 파동을 그리며 그 궤적에 동력을 집어넣고 기도를 올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스스로 만든 환상에 갇혀 우왕좌왕하다 자초할 뿐이다. 가야 할 자리임에도 파도가 갑자기 잔잔해진다면, 그것은 힘의 응축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고 보는 것이 확률적이다.


언제든 시장의 함정에 빠질 수 있고, 어디서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마다 내 감정 속에 불어닥치는 탐욕과 공포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경험적 통찰’의 실체다. 바둑에서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전체의 흐름을 읽는 ‘형세 판단’이듯, 파동의 세계에서도 큰 흐름을 보며 맥점을 짚는 능력이 투자의 성패를 결정한다. 내 뜻대로 움직이는 시장은 없다. 오직 시장의 형세를 읽고 그 리듬에 순응하는 투자자만이 거친 바다에서 유유히 항해를 이어갈 수 있다.


마음이 동하면 감정은 동력을 얻는다. 파동이 잔잔해질 때 '갈 것이다'라는 확신 대신 '변할 수 있다'라는 의심으로 냉철하게 형세를 판단해야만 감정의 돌풍 속에서도 원칙이라는 중심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투자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벽 주위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아주 작은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여행자다. ‘지속가능성의 고원’ 위에 견고한 원칙의 벽을 세우기 전까지, 돈을 향한 수고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여정에서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실수는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경험일 뿐이다. 실수에 머물러 자책하면 실패에 가까워지지만, 그 실수를 분석하고 배우면 성공의 문턱에 다가선다.


설령 자주 망설이고 발걸음이 무거울지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이미 잘하는 것이다. 실수를 빠르게 인정하는 겸손함이야말로 시장에서 지속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는 최고의 마음이다.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면 충분하다면 시간은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망설여도 괜찮다. 다만 그 멈춤이 영원한 머무름이 되지 않게 하라.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을 견뎌내고, 때로는 익숙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때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투자자에게 있어 머리 위에 접시를 얹는다는 것은 곧 진입을 의미한다. 일단 시장에 발을 들이면 인간은 으레 “제발 뜻대로 되기를” 바라며 무의식중에 기도하게 되지만, 진정한 통찰은 그 기도를 멈추고 오직 눈앞의 흐름에 집중하는 대응에서 시작된다. 기도를 멈추고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낼 때, 죽어 있던 기법의 선들은 살아있는 경험적 통찰로 이어진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중해의 어느 해안가에서 바람의 율동을 음미하는 상상을 해 본다. 바람이 바다의 물결을 만들듯, 보이지 않는 심리와 수급이라는 바람(Wind)은 파동(Wave)을 만든다. 파동은 때로 ‘M’이나 ‘W’의 형태로 크게 요동치고, 때로는 끝없는 횡보 끝에 ‘L’자 형태를 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평균 진폭을 채우기 위해 수렴과 발산을 반복할 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옳거니, 바로 저것이지. 절대의 율동을 찾아 절대의 신뢰를 따르는 것이야”라고 독백하며, 그 정교한 파동의 법칙 앞에 나의 모든 불필요한 바람(Wish)을 내려놓고 싶다.


시장은 당신의 간절함을 들어주는 교회가 아니다 감정이 앞서면 그 어떤 기법도 종잇조각에 그려진 한낱 선에 불과하다. 접시를 깨뜨리지 않는 길은 발밑과 접시의 수평을 맞추는 대응 그 자체에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뿌리는 흔들리면서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