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으로 정한 선은 각자의 강물이다.

by 황금지기


투자자에게 원칙으로 정한 선은 각자의 마음 깊은 곳을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특히 데이트레이딩에서는 전날부터 이어져 온 흐름을 관조하며 파동을 그려내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시장은 참으로 묘하다. 수많은 우연과 또 다른 우연과 만나 겹치고 점철되며, 고점과 저점이 서로를 끌어당겨 수렴과 발산을 반복하고, 선과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때로는 지독한 불운이, 때로는 찬란한 행운이 탄생한다.


우연이 만들어 내는 불운과 행운의 횟수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이 던지는 주사위와 같다. 그러나 닥쳐온 불운을 짧게 끊어내고, 찾아온 행운을 끝까지 길게 가져가는 것—이것이야말로 운의 영역을 실력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투자자의 진짜 능력이다. 거친 파도에 배가 흔들리더라도 관점을 원칙의 밧줄로 굳게 묶어두라. 강물이 굽이치면서도 결국 바다를 향해 나아가듯, 원칙을 지키며 흐르다 보면 그 흔들림은 결국 지나가는 물결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투자는 원칙의 물길을 따라 묵묵히 흘러가는 것이다. 강물은 굽이쳐도 바다로 간다. 우연히 닥친 불운에 억울해하거나 행운에 취해 자만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원칙이라는 물길 위에 제대로 떠 있느냐는 사실이다.




확률의 세계에서 맞고 틀림은 영원히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원칙 안에서의 작은 어긋남을 굳이 실수라 부를 필요도 없다. 경계해야 할 단 하나의 명백한 실수는 바로 추격이다. 원칙의 선과 이격이 발생하는 순간, 투자자의 선택지는 단순해야 한다. 수익이든 손실이든 확정 짓거나, 진입하지 못했다면 보내 주는 것이다. 등락의 관점에서 추격이란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추격에 맛을 들이면 결국 소중한 세간살이마저 시장에 털리기 일쑤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추격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돌고 도는 파동이니 미련은 두지 마세요.” 이 가사를 수천 번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산술적으로 봐도 추격은 무모한 도박이다. 50% 확률의 첫 기차가 떠났다면, 그다음 정거장에서 성공할 확률은 25%로 급감한다. 설령 그 방향의 전체 확률이 80%라 해도, 이미 이격이 벌어진 다음 정거장에서의 성공 확률은 40%를 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추격의 성공 확률은 절대 50%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 확률적 증명이다. 파동의 평균 진폭을 넘어서는 추세의 진행 확률은 고작 20% 아래에 불과하다. 킥복싱에서 스텝이 엉켰을 때 무리하게 한 발 더 들어갔다가 상대의 니킥(Knee kick) 한 방에 고꾸라지듯, 추격은 공든 탑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떠난 기차는 말없이 보내주는 것이 투자자의 도리다. 평균 진폭을 벗어난 시세를 탐하는 것은 사선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추격만 하지 않아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여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속에 ‘내던져진’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쓸 만한 것은 주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에 쥐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중략) 청소는 끝없는 작업입니다. 습격해 올 무질서를 일시적으로 돌려놓는 일밖에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청소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우주로 퍼지는 무질서에 대항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질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파동의 마디를 취하려다 가시에 찔리고, 비탈길에서 넘어지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속가능성을 조금씩 높여간다. 투자자에게 원칙을 지키는 과정이란, 방 안을 청소하듯 매일 같이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나는 터무니없는 확신과 탐욕을 쓸어내는 행위다. 진화론적 한계로 인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본능적 욕구를 질서라는 빗자루로 쓸어 담는 것—이 마음 청소는 투자가 계속되는 한 끝까지 끝나지 않을 작업이다.


마음에는 매일 털어내야 할 감정 찌꺼기가 쌓인다. 투자는 습격해 오는 내면의 무질서를 원칙이라는 빗자루로 매일 쓸어내는 '마음의 청소'다. 무질서한 시장 속에서 매일 내면의 질서를 바로잡는 자만이, 확률의 바다에서 난파당하지 않고 항해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시스템’이라 일컫는 견고한 벽 앞에 서 있는 약한 알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길 구석은 없습니다. 벽은 말할 수 없이 높고 강고하고 차갑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자의 목숨에 깃은 완전한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 생명과 생명을 이어줄 때 느끼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찾아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높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굽이치는 강물처럼, 시장의 파동은 그렇게 등락한다. 파동은 투자자의 심리를 이미 훤히 꿰뚫고 있는 듯,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고점과 저점에서는 미련을 붙이고, 정작 가야 할 자리에서는 공포를 주어 털어내며 등락한다. 투자자는 이 거대하고 차가운 시장이라는 벽 앞에 선 한없이 나약한 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여정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원칙과 그 속에 깃든 것들을 믿고 끝까지 파동을 그려가는 '최선의 주고받음'에 있다.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 깨지지 않는 길이다. 벽이 견고할수록 더 유연한 파동의 리듬을 타야 하며, 차가운 시스템 속에서도 나만의 따뜻한 직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벽을 깨려 드는 알은 산산조각 나지만, 흐르는 파동의 결을 읽어내면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머리는 ‘의미’밖에 수신할 수 없지만, 신체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것도 수신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시그널’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신체는 ‘시그널이 되기 이전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감각이 ‘이웃집 마실’ 같아야 한다는 점이 무도에서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것은 필사적으로 무도를 연습하고 담력을 키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한 인간은 무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그 행동 방식에 숙련되어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투자 또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느끼고 반응하는 감각의 영역이다. 내가 어둠을 물리쳤기에 해가 뜬다고 믿는 것은 인간의 터무니없는 자만심이자 이기심일 뿐이다. 해는 뜨기에 어둠이 저절로 물러간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고, 그 순리대로 시장을 바라보는 것이 투자자 내면의 진정한 성장이다. 억지로 시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자르고 챙기며’ 마디를 취할 때에만 지속가능성이 담보된다.


몸에 새겨진 감각은 결코 투자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지겨운 복기와 포기할 줄 모르는 반복 속에서 손끝에 박인 굳은살 같은 감각은 무의식적으로 올바른 대응으로 인도한다. 숙련된 감각은 이미 정답 너머의 길을 알고 있다.




시장은 무엇의 합인가? 누군가는 심리라 하고, 누군가는 탐욕이나 거대 자본의 합이라 말한다. 여기서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아마도 경험적 통찰을 무기로 시장의 부를 거두어 가는 극소수의 승자들일 것이다. 인간의 뇌 구조상 다수는 감정에 휩쓸리기에, 자본주의의 ‘부익부 빈익빈’ 원리는 시장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절망의 계곡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이가 선택해야 할 길은 명확하다. 그것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자, 다수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길이여야만 한다.


투자자는 그저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 등락을 지켜보며 대응할 뿐이다. “이 일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지만, 사람이 살면서 이치에 맞는 일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때 머릿속 저울로 확신의 무게를 달다 보면 왼쪽 이마 안에서 끊임없이 원을 그리는 두통이 찾아오거든요.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혼돈을 인정하고 그냥 무언가를 하다 보면 두통 같은 건 찾아오지 않거든요.” 시장이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 왜 예상과 다른지 끊임없이 따지며 저울질하는 행위는 결국 마음고생과 두통만을 부를 뿐이다.


확신을 두고자 애태우는 마음이 집착의 원인이다. 시장은 다수의 감정과 소수의 통찰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무심함이 곧 최고의 기술이며, 순응이 곧 최선의 통찰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노년의 시간은 수평으로 흐르는 급류가 아니라 기억이 술술 빠져나가는 밑 빠진 물탱크라고 느꼈다. 그의 창의력은 고갈되고 있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조금씩 줄어드는 생의 모래시계 앞에서 자주 조급해진다. 어깨 근육은 자꾸만 뻣뻣해지고, 끝나는 날까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종종 엄습한다. 그러나 다하는 날까지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냥 가야 함을 이미 알고 있다.


시장이라는 비정한 벌판에서, 때때로 먹이를 찾아 비굴하게 밤길을 헤매는 하이에나 무리 속에 섞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뇌동매매의 소음에 놀라지 않고, 오직 신호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사자가 되고 싶지만, 그 이상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그 사자가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단지 웅크리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뇌동으로 탐하는 시간은 밑 빠진 물탱크로 물을 붓는 것과 같다. 하이에나처럼 먹다 남은 파동의 찌꺼기를 쫓기를 멈추는 그 순간, 웅크리고 있던 사자가 깨어날 것이다.




어릴 적에 어떤 아이가 그에게 돌멩이로 새를 맞힐 때 사용하는 마술적인 주문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맞는다. 맞는다. 맞지 않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오롯이 확률로만 설명되는 시장에서 이 표현을 인용하면 이렇지 않을까. “맞는다. 맞는다. 맞지 않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내 잘못은 틀렸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돌멩이가 새를 맞힐지는 바람과 새의 움직임이라는 외부 변수에 달려 있듯, 시장의 진입이 수익으로 연결될지 여부 또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원칙대로 진입했다면 결과가 빗나가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진정한 잘못은 빗나간 돌멩이를 보며 자책하느라 다음 돌멩이를 준비하지 못하거나, 틀린 자리를 고집하며 물러나지 않는 오만함에 있다.


결과는 시장의 영역이고, 대응은 투자자의 예의다. 진정한 잘못은 틀렸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자르기'를 하지 않는 오만과 방종에 있다. 돌멩이를 던지는 것은 나의 일이고, 맞히는 것은 시장의 일이다.




시장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찾는 'Why(왜)'는 지극히 후행적일 뿐이며, 그 원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수록 뇌동매매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엄중한 대전제가 인식의 전반을 지배할 때, 확률적 사고의 문이 열린다.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어디서 틀려도 상관없다는 초연함에 기반한 이 확률적 상태를 내공이라 부른다.


인간은 진화론적 생존본능에 따라 내어놓을 줄 모르는 이기심을 가졌기에, 본능적으로 시장을 도박처럼 대하려 한다. 그러나 시장은 확률의 세계이며, 투자는 확률 게임이다. 이 게임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손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는 마음, 즉 나를 비우고 시장의 흐름에 내어주는 이타심을 가질 때 비로소 도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손실을 내어주는 마음이 곧 투자자의 이타심이다. 올바른 경험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통찰을 잉태하고, 마침내 손이 저절로 반응하는 감각에 도달할 때, 투자는 완성된다.




다수의 투자자는 시장을 너무나 만만하게 보고, 돈의 뒤를 쫓아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 뛰어든다. 그러나 시장과의 게임은 상대를 압도하여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적당히 깨지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버티는 것이 그 본질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리며 그토록 고단한 시간을 버텨내는가. 그것은 바로 시장이 스스로 돈을 벌어다 주는 시기다. 주식시장에서 몇 년에 한 번씩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대세 상승장의 물결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내 자본과 심리를 보존하는 것이 투자의 핵심이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말처럼, 멀리 보며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파산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선 분별력을 잃을 만큼 큰돈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잃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아야 하며, 심리적 한계를 경험하고 통찰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영리하게 패배할 줄 아는 자만이 큰 파도를 탈 자격을 얻는다.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시장은 준비된 자에게 수익을 쥐여줄 것이다. 그때까지 할 일은, 분별을 잃지 않을 만큼만 영리하게 손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자기감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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