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또박또박' 거북이걸음으로

by 황금지기


‘천천히 또박또박’ 거북이걸음으로 등락을 견디며 우상향하는 누적 수익 그래프를 그려가는 그가 투자자다. 파동이 곡선이듯 수익률 곡선 또한 등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으며, 그 시린 시간을 견뎌내는 인내가 우상향의 각도를 결정한다는 필연을 내면 깊이 수용해야 한다. 이 이해의 과정에는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통찰의 시간, 즉 ‘돈이 되지 않는 시간’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시장의 돈은 여유롭고 덤덤한 사람을 좋아한다. 반면, 두 걸음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은 외면한다.


사랑하는 이성의 마음을 얻으려 할 때 성급함과 이기심이 독이 되듯, 돈을 대하는 태도 또한 같아야 한다. 시장의 흐름에 맞춰가는 이타심으로 뜨겁게 대하되, 흐름이 아닐 때는 미련 없이 거리를 둠으로써 차갑게 사랑해야 한다. 돈의 속성을 이해할 때 비로소 투자자의 마음은 기다림에 여유롭고 대응에 덤덤해지며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게 된다. 매매 횟수를 늘리는 성급함은 원칙이 설 땅을 좁히고, 작은 손실조차 거부하는 이기심은 원칙의 숨통을 조인다. ‘천천히’는 매매 횟수를 최소화하며 기다리는 원칙의 깊이를 의미하고, ‘또박또박’은 손실을 짧게 잘라내며 빠져나오는 원칙의 길이를 의미한다.


“버텨줘서 정말 고마워.” 이 길 끝에서 자신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멋진 위안은 바로 이것이다. 천천히 기다려 깊이를 더하고, 또박또박 잘라내어 길이를 확보하는 것이 시간을 최대한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시간은 성급하게 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정성이 깃들며, 그 정성이 겉으로 배어 나와 세상을 밝히고 만물을 변하게 한다는 「중용」의 가르침은 투자자에게도 준엄한 생존의 법도다. 투자자에게 ‘반드시 변하겠다’라는 사즉생의 각오는 오직 구체적인 행동으로만 증명될 수 있다. 그것은 손실을 칼날처럼 짧게 베어내고 이익의 줄기는 인내로 길게 가져가는 것, 그리고 철저히 유리한 근거 위에서만 진입하고 약속된 마디에서 냉정히 결단하는 정성이다. 특히 ‘빠르게 실패하기’는 투자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핵심이다.


인생에서의 참된 사즉생이란, 인간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약한 의지력을 믿기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임을 수용하고, 자신을 강제적인 원칙의 환경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지혜다. 미래로 미루는 모든 언약은 그저 오늘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허망한 도피일 뿐이니, 변화는 오직 이 순간의 실행으로만 완성된다. 의지력이라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원칙의 골격이 무너지지 않도록, 매 순간 엄습하는 나쁜 습관의 유혹을 지극한 정성으로 막아내야 한다


정성은 원칙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다. 작은 원칙 하나에 정성을 다할 때 비로소 겉으로 배어 나오고, 그 빛이 계좌와 삶을 밝히게 될 것이다.




모든 기법과 개개인의 원칙에는 저마다 허용된 ‘자기만의 구간’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투자자는 시장의 모든 파동을 취하려 욕심을 부리고, 그 탐욕 때문에 원칙이 뿌리내릴 최소한의 시간조차 견뎌내지 못한다. 원칙으로 정한 경계 너머를 자꾸만 넘보는 것은 연필을 지나치게 눌러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너무 세게 누른 연필심은 기어이 부러지고 말 듯, 과도한 욕심이 들어간 원칙은 지키겠다는 다짐만 무성할 뿐 매번 처참하게 꺾이고 만다. 부러진 연필을 다시 깎느라 정작 중요한 문장은 제대로 써 내려가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무너진 원칙을 수습하느라 소중한 기회의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누구나 수익을 바라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욕심을 통째로 덜어내기 전에는 원칙과 동행하며 오르는 깨달음의 비탈길에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다. 비우지 못한 마음으로는 절망의 계곡 끝자락과 깨달음의 비탈길 사이에서 위태롭게 오르내리며 그저 나이만 먹어갈 뿐이다. 시장이 내준 몫만큼만 취하겠다는 겸손, 내 원칙의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가 없다면 영원히 부러진 연필심을 깎으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감정에 들어간 과도한 힘이다. 원칙이 매끄러운 글씨가 되어 새겨지려면, 가장 먼저 감정에서 욕심이라는 힘을 빼야 한다.




환경을 변화시켜 습관화를 도모하는 안전 활동인 5S에서도 정리와 정돈이 선행되지 않은 청소는 그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투자자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성급함을 버리는 ‘정리’와 탐욕을 뒤로 무심하게 밀어내는 ‘정돈’이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기법을 닦는 청소를 반복해도 올바른 습관화에 도달할 수 없다. 기다림과 대응은 자주 사용하는 물건처럼 마음의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완벽이라는 무모한 환상에 매몰되기보다, 내 안의 편향과 원칙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찾아가겠다는 대범한 태도로 심리적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심리가 정립되지 않으면 기법은 백해무익하다. 정리와 정돈이 갖춰지지 않은 공간에서는 문제가 발생해도 이를 즉시 발견하는 ‘청결’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정리’라는 첫 단추부터 제대로 하지 않고는 습관화에 도달할 수 없다. 성급함과 탐욕을 걷어내고 자신과 모진 타협의 과정을 거치는 것—그 정제 과정 없이는 올바른 투자 습관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을 수 없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온 기법은 흉기나 다름없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을 때 원칙에서 벗어난 자신을 한눈에 발견하고 즉시 교정할 수 있는 투자자로 거듭날 것이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 안에 갇힌 존재와 같다. 유일한 출구는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꼭짓점의 작은 하늘뿐이다. 다행히 그 빛나는 구멍으로부터 바닥까지 튼튼한 동아줄 하나가 내려와 있다. 본성의 감옥을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를 다해 그 밧줄을 잡고 자신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등반을 위해서는 성냄과 탐욕이라는 무거운 짐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비워 가볍게 만들어야만 온몸의 힘을 오롯이 밧줄에 쏟아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의 박자를 지킨다면 당신이 걷는 길은 꽃길이 되겠으나, 그 리듬이 어긋나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꽃길은 무슨 꽃길’ 곧장 지뢰밭으로 변한다. 시장의 모든 자리는 그저 막연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검증을 통해 세운 확률적 우위를 묵묵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여유로운 자본으로 내가 정한 자리에서 대부분 시간을 편안한 ‘Green Zone’에 머물게 하겠다는 결단—그것이 바로 투자자의 힘에의 의지다. 버티는 인내를 통해 투자 곡선을 기어이 우상향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정직한 노력을, 투자자는 마땅히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투자자를 계곡에 붙잡아 두는 것은 욕심의 중력이다. 성냄과 탐욕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왜 이토록 위로 올라가기가 힘드냐며 하늘만 원망해서는 안 된다.




영화 「기생충」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계획을 세우면 인생이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거든.” 여행에 비유하자면 ‘어디로 간다’라는 큰 방향만 정한 채, 세부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것이다. 투자 또한 원칙이라는 큰 틀 아래 진입했다면, 그다음부터 펼쳐지는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진입 이후의 시간은 사전 계획에 얽매이기보다, 닥쳐오는 상황에 대응하며 그 흐름 자체를 충분히 즐기겠다는 마음이어야 한다.


잃지 않고 견뎌내는 것은 오롯이 실력의 영역이지만, 수익은 겸허히 순응하고 감사해야 할 운의 영역이다. 진입 이후에 품는 막연한 희망이나 간절한 기도가 부질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장에서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 되는 이유는, 계획에 무게 중심을 두는 순간 예상치 못한 변화 앞에서 원칙이 쉽게 부러지기 때문이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며 오직 실행만이 실체다.


투자는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기계적 반복이어야 한다. 감정을 내려놓을 때, 시장의 본질적인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본능을 이기는 길은 반복적인 대응을 몸에 새겨 습관으로 만드는 손끝의 감각에 있다.




“나를 길들여 줘. 나를 길들이면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여우가 말했듯,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길든다는 것은 그 존재가 다가올 시간을 미리 행복으로 채우는 마법과 같다. 투자자가 스스로 세운 원칙의 자리에 자신을 온전히 길들인다면, 비록 그 과정이 뼈를 깎는 고통일지라도 원하는 파동이 약속된 자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느덧 두려움이 아닌 설렘의 대상이 된다. 끊임없이 변명을 늘어놓으며 원칙을 부러뜨리려 유혹하는 ‘생각하는 나’와 마주할 때, 그 흔들리는 자아를 정해진 자리에 묶어두고 길들여 줄 유일한 스승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러기에 투자는 자신을 향해 걷는 가장 고독하고도 숭고한 여행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원칙에 철저히 길들여져야 한다. 길들여질수록 투자자의 삶은 행복해진다.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기에, 오늘 지켜낸 단 한 번의 원칙이 쌓여 인생을 바꾸고 시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 나무가 뿌리 내릴 토양은 바로 심리다. 확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기법은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으나, 심리는 제각각이기에 결국 심리가 전체를 좌우한다.


원칙은 당신을 부로 인도하는 길들임이다. 여유로운 향기가 흐르는 고요한 방에서, 홀로 세운 약속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당신이라면 부로 향하는 징검다리를 건널 자격이 충분하다.




전체 주식 계좌를 대상으로 Y축에 손익을 놓고 그래프를 그린다면, 손실과 이익의 경계가 되는 X축의 선은 바로 ‘원칙의 세움과 지킴’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초심자의 행운이나 시류를 잘 탄 덕에 잠시 이익의 영역에 머물기도 하겠으나, 운이 온전히 작용하도록 원칙을 사수하며 자리를 지켜내는 것만이 진짜 실력이다. 수많은 투자자가 절망의 계곡에서 원칙의 파편들만 쌓아둔 채 좌절하는 이유는, 파동에 순응하며 원칙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야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버팀과 견딤의 시간만이 부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며 투자의 쓸모를 증명해 준다. ‘그럼에도’라는 부사는 절망의 끝에서 피어나는 무한긍정의 단어이자, 운명에 맞서라는 니체의 외침과도 같다. 본성의 중력이 나를 아래로 끌어내릴 때, ‘그럼에도’ 다시 원칙을 붙잡고 위로 향하는 그 의지야말로 평범한 투자자에서 깨달은 초인으로 진화시키는 동력이다.


계좌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원칙을 대하는 태도다. 본능은 아래로 끌어내리지만, 초인의 의지는 원칙을 디딤돌 삼아 위로 도약한다.




투자자라면 인지적 편향을 극복해야만 하지만, 편향은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본성이기에 그것을 줄여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동안 고요했던 내면은 순식간에 성냄으로 아우성치고, 굳건했던 평상심은 탐욕에 끊임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투자자에게 최선은 부정적 사건을 겪지 않는 것이며, 특히 ‘손실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낙천적 편향과 ‘버티면 결국 잘될 것’이라는 낙관주의 사이에서 조화로운 경계선을 찾아내는 일이다. 투자에서 원칙을 가장 자주 부러뜨리는 범인은 희망에 의지하는 막연한 기대이며, 원칙이라는 묘목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시드는 이유도 시간을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기대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며, 이기심이 클수록 기대치는 높아진다. 그리고 그 높은 기대치는 원칙을 가장 부러지기 쉬운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기심을 완벽히 지운 이타심은 사랑하는 이에게 밤하늘의 벌도 따주겠다는 말처럼 현실에서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면, 현명한 투자자는 차라리 ‘원칙과 조화로운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기심)이 곧 원칙을 사수하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 즉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자아를 객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탐욕을 단속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오만한 기대를 멈추고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파동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자리는 앞고점과 앞저점의 거리가 좁은 박스권의 흐름, 즉 상·하방의 확률이 비슷하여 어느 쪽도 유리하다 단언하기 힘든 애매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 애매함은 자리를 어렵게 만들고, 어려움은 심리를 복잡하게 꼬이게 하며, 결국 복잡해진 심리는 원칙을 쉽게 부러뜨리는 원인이 된다. 우리가 반복의 기쁨에 닿지 못하는 이유는 본질의 단순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단순하지 않으니 매번 새로운 복잡함에 직면하는 것이다. 투자의 세계에서 불확실한 자리를 미련 없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상수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상수는 결과의 적중 여부를 떠나 확연한 자리가 올 때까지 자신을 다스리며 기다린다. 대응이 전제된 상태에서 ‘맞추고 틀리고’의 이분법적 사고가 의미를 잃어버리는 심리적 무아의 상태—그곳이 바로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지점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복잡계에서는 지식의 양을 늘리는 더함보다, 내면의 심리와 조화를 이루는 지혜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옳다.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는 화학적 반응이 일어날 때, 행동은 억지스러운 다짐 없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진다.


깊어진 지혜는 복잡한 시장을 단순하게 바라본다. 그 단순함이 본능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지혜로운 투자자는 세상의 모든 파동을 알겠다는 오만을 버리고, 오직 자신이 아는 단순함의 영역에 머물며 시장과 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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